202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가르쳐 췄지."
세수가 한숨처럼 말했다. 나는 선뜻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나는 당신이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얼마나 괴로웠는지 이미 알고 있다고 착각했어. 동생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멍청했는지 깨닫게 됐지.”
불안으로 조여들었던 심장이 다른 이유로 먹먹해졌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울음이 나오는 것을 참았다.
“이미 지나간 일이에요. 저도 다 기억하지 못하는데요, 뭐.”
“그건 핑계가 안 돼.”
세 스는 내 뺨과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당신은 기억하지 못해도 나는 알아야 해."
“그건 너무 억지잖아요."
“억지는 그런 게 아니야. 이비."
에스의 새파란 눈동자가 일그러졌다.
"당신이 괴로워할 때 내가 아무것도 몰랐다는 게, 당신의 고통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더 억지야."
"······."
“내가 당신의 옆에 있어야 했어. 그러지 못한 게 너무 후회돼."
예전에 나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과거로 돌아가서 괴로워하는 세수를 안아 주고 싶다고. 홀로 외로웠을 소년을 위로해 주고 싶다고. 내게 그럴 힘이 없다는 것이 분하고 안타까웠다.
부부는 닮는다는데 우리는 좀 이상한 쪽으로 닮은 것 같았다. 나는 손을 내밀어 나처럼 상처투성이인 남자를 잡아당겼다.
“그때 못 한 걸 지금 해 주면 되죠.”
눈이 커진 세수가 순순히 내게 끌려왔다. 나는 내가 맛본 그 무엇보다 더 달콤한 입술에 매달렸다.
과거의 내게 지금 이 순간을 말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누군가 너를 아끼고 사랑해서, 네 괴로움을 미처 알지 못했던 것까지 아파할 거라고. 그런 사람이 꼭 네 앞에 나타날 거라고.
당연히 믿지 못했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덜 울지 않았을까?
* * *
눈을 뜨자 배가 볼록해진 복실 이와 코코가 쿠션에 엎어진 채로 쿨쿨 잠든 것이 보였다.
돌아온 탕아의 전형적인 모습에 쿡쿡 웃음이 나왔다. 뒤에서 나를 꼭 끌어안고 있던 세수가 따라 웃는 게 느껴졌다.
나는 세수 쪽으로 돌아누웠다.
"저 오래 잤어요?"
“아니, 조금?”
세수가 나른한 얼굴로 소곤거렸다. 평온하게 풀어진 표정이 좋아서 꼬물꼬물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나를 안아 주는 품에 푹 파묻혀서 익숙한 향기를 맡 고 있으니 마음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그래서 그에게 물어볼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세수."
"응?”
“제 동생이 그 이야기도 했어요?"
“어떤 이야기?"
"······."
나는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고 망설였다. 세수 그런 나를 재촉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예전에, 가문이 반역죄로 망하기 전에요. 그때 전 사람들에게서 정보를 캐내는 일올 했어요.”
“응.”
“대부분은 강제로 잡혀 온 사람들이었어요. 전 그게 나쁜 짓인 것을 알면서도 도왔어요.”
쓸모가 없으면 지하실로 돌아가게 될 테니까.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정보를 빼냈다. 때로는 술에 취한 사람들에게서 몰래 훔치기도 했다.
"들었어.”
“저한테 실망하지 않았어요?"
“왜?”
“제가 너무, 비루하게 살아서요.”
내가 긍지 높은 사람이었다면 지하실로 돌아갔을 것이다. 용감한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멀리 도망쳤을 테고. 하지만 나는 나쁜 짓에 협조해서라도 안전하게 살아남으려고 했다.
“전혀 단한 번도 그런 생각한 적 없어.”
단호한 대답에도 나는 그를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세수라면 나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 테니까.
시무룩해하는 나를 알아챈 세수가 웃었다.
“이비, 나는 당신에게 실망할 정도로 정의로운 인간이 아니야 나야말로 당신이 실망할 일들을 많이 했어.”
“어떤 일이요?"
"살인이나 납치나 고문 같은 것들. 그 외의 나쁜 일들도 많이 저질렀어. 당신처럼 후회하지도 않았지. 당신 남편은 끔찍한 악당이야."
전쟁터에서도 가장 위험한 곳만 골라 다녔던 영웅이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그의 가슴을 콕콕 찌르며 속삭였다.
"악당 씨, 무서우니까 빨리 키스해 줘요.”
어깨를 들썩이며 웃은 세수가 내 이마에 살짝 입술을 눌렀다. 나를 또다시 기절시키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이비, 당선은 나쁘지 않아. 어쩔 수 없었던 일로 자 책하지 마."
위로하듯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따뜻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전 착한 사람이 아니예요. 착해지고 싶지도 않아요. 앞으로 못된 짓도 더 많이 할 거예요.”
누군가를 함정에 빠트리거나, 누군가의 머리를 터트리거나, 거짓말하고 속이고 매장 시킬 거다.
“내가 나본 사람이라도 계속 날 좋아해 줘요.”
내 뻔뻔한 요구에 세수가 웃었다. 그는 더 없이 다정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미 그러고 있는걸.”
내심 조마조마했던 나는 기쁨으로 활짝 웃었다. 이제 나는 남편의 동의를 얻은 합법적인 망나니 였다. 한결 여유를 되찾자 계속 궁금해 왔던 것도 물어봤다.
"브란이 과거 이야기만 늘어놓진 않았을 것 같은데, 새로 알아낸 것들은 뭐예요?"
”……말하지 않는 쪽이 좋을 것 같아, 미안해.”
혹시나 했는데 역시였다.
불만스러웠지만 내겐 조개처럼 다물린 세스 입을 열 재주가 없었다. 세스는 유독 보안이 철저한 조개였다.
‘제이 리드를 추궁해 볼까?'
묘하게 허술한 브란의 룸메이트를 떠올린 나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대신 한 가지만 솔직하게 대답해 줘요.”
“어떤 걸?"
“조슈아와의 결투에서 져 주지 않으려고 한 이유가 뭐예요?"
“조슈아?“
세스 눈이 좌우로 움직였다. 그 짧은 순간에 그는 대강의 상황을 파악한 것 같았다.
"폐하께서 말씀하셨나? 굳이 그 이야기를 하신 건 조슈아와 만난 모양이군. 그가 뭐라고 했지?"
“대답은 안 해 주고 절 추궁하는 거예요?"
입을 삐죽거리자 세스가 아차 하는 얼굴로 변했다.
나는 그의 팔을 쿡쿡 찔렀다.
“왜 조슈아에게 억지로 항복을 시켰어요? 가문의 명예 때문에? 아니면 라리사 모어를 주기 싫어서?"
만약 후자라면 오늘은 부부 싸움이다! 내가 눈을 부리부리 뜨고 노려보자 세스는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내가 처리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어.”
“그게 무슨 뜻이에요?"
”라리사 모어가 조슈아를 해치게 두고 싶지 않았어. 그는 절대 감당하지 못할 테니까."
치정 사건으로 생각한 나와 달리 세스에겐 호러물이였던 것 같았다. 나라도 아는 사람이 조커나 한니발 렉터와 결혼한다고 하면 때려서라도 말리고 싶었을 것이다.
갑자기 세스가 측은해진 나는 그를 꼭 안아 주었다.
“정말 고생이 많았네요."
“당신이 이해해 주는 건 기본데, 왜 슬퍼지지?"
세스가 미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본의 아니게 풋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이 분위기에선 내가 조슈아의 뚝배기를 깬 걸 고백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일단 밑밥부터 깔자.
"······세스, 있잖아요."
"응?"
“조슈아가 좋아요, 제가 좋아요?"
뜻밖의 말이었는지 세스 눈이 동그래졌다. 곧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는 것에 나도 모르게 입이 튀어나왔다.
“제가 조슈아의 머리를 깨면 절 싫어할 거예요?"
“왜 굳이 머리를 깨는지 모르겠지만, 조슈아 때문에 당신을 싫어할 일은 없어.”
좋았어. 일을 저지른 뒤지만 허락은 받았다.
“그럼 제가 조슈아를 괴롭혀도 괜찮은 거죠?"
“······괴롭히고 싶어?"
“네, 무지막지 괴롭히고 싶어요."
조슈아를 괴롭혀서 라리사에게서 떼어 내는 게 내 목표였다 그런데 세스가 떨떠름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싫어요?"
"당신이 조슈아에게 관심을 가지는 게 싫어.”
“그냥 괴롭히려는 건데요?"
“당신이 괴롭힌 사람은 꼭 당신을 좋아하게 되더군. 사실 그럴 때마다 질투가 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스를 올려다봤다. 세스는 민망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
“당신이 나한테만 관심을 줬으면 좋겠어.”
오랫동안 꾹꾹 눌러 담고 있었을 서툰 고백이었다.
나는 꼬물꼬물 몸을 일으켜 그의 턱 끝에 살짝 입을 맞췄다.
“세스, 세상에서 제일 좋아해요.”
"······."
“정말로요. 전 세스가 제일 좋아요."
파르르 떨리는 푸른 눈을 긴 속눈썹이 감춰 버렸다. 나는 두려운 것처럼 꾹 감긴 그의 눈꺼풀 위에도 키스 했다.
무서울 정도로 강한 남자가 자신에 대한 애정에는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사랑스럽고 가련했다. 눈가에 쪽쪽 키스하는 나를 붙잡은 세스가 속삭였다.
“당산이 나를 잊어도, 다시 좋아해 줄 거라고 약속해 줘.”
이상한 말이었지만 세스가 너무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할게요.”
세스가 내손을 꼭 잡았다.
나는 그를 불안하게 만든 것이 브란의 말인지, 아니면 조슈아인지 궁금했다. 불안의 늪에 푹 잠겨 있는 세스를 끌어내고 싶었다.
“조슈아는 포기할게요. 앞으로 관심도 안 가지고요.”
나는 되도록 귀엽게 눈을 깜빡이며 말을 이었다.
“대신 이번 연회 때 코끼리 타도 돼요?"
"······이비.“
“딱한 번 만요, 네?"
“너무 위험해서 안 돼.”
날고양이도 타고 다녔는데 왜 코끼리는 안 되냐고 묻자 세스가 한숨을 쉬었다. 그는 나를 꼭 끌어안은 채로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코끼리 코끼리 노래를 불렀다. 세스를 어떻게 설득하나 고민했는데, 조슈아 덕분에 아주 쉽게 코끼리를 탈수 있을 것 같다.
* * *
사교계에선 엘마이어 가문에서 열리는 연회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유명세에 비해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블린 엘마이어가 여는 첫 연회였기 때문이다.
연회는 여는 이의 교양이 한눈에 드러나는 시험대.
사교계에 돌풍을 몰고 온 폭군이 이번에도 충격을 던져 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모두가 떠들어 댔다.
“이번엔 조금 힘들지 않을까요. 연회에는 까다로운 규칙도 많고.”
"저번 무도회도 폐하께서 대신 열어 주신 거죠. 솔직히 별 특별한 것도 없었고요.”
사교계에선 이제 이블린의 출신에 대해 언급하거나 무시하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이블린이 특별한 뭔가를 보여 줄 것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초대장도 아주 평범하더라고요. 이번에는 조용히 지나갈 모양이에요.”
초대장을 받은 사람들 또한 아쉬운 기색을 드러냈다. 하지만 매번 어떻게 특별한 모습을 보여 주겠냐며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물론 이블린은 그들의 기대에 맞춰 주지 않았다.
연회 당일 정오. 이블린의 습격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