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 * *
“녀석, 뒤도 안 돌아보고 가 버렸군.”
왕은 시원섭섭한 얼굴로 포도주를 따랐다. 술이 너무 과하다며 눈을 홀긴 피오나가 얼른 술병을 치워 버렸다.
“이블린이라면 그럴 거라 예상하셨잖습니까.”
왕이 이야기가 끝난 후에야 만남을 주선한 것은 이블린이 거절하길 바라서였다. 상대가 신성 왕국의 성기사단장 레오디나스였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이블린은 당장 집에 봐해서 안 될 것 같다며 훌쩍 떠나 버렸다. 피오나는 그 점이 불만인 듯 했다.
"저는 만나게 해 주는 쪽이 좋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블린의 편이 늘어서 나쁠 것은 없지 않습니까.“
”놈의 목적을 알고 있으면서 그런 소리를 하는군. 이블린에게 대지신의 광영은 필요 없어. 그럴 거였다면 녀석이 천공신의 선녀라는 사실을 숨기지도 않았을 거다."
이블린이 사도이자 수많은 신수를 거느린 것이 알려 진다면 출신을 뛰어넘어 엄청난 권력을 손에 쥘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성스러운 권력이었다.
이블린이 종교적인 지도자로 군림한다면 상관없지만, 공작 부인으로 살아가고자 한다면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이블린의 약점인 출신을 없애지는 못하지. 더 두드러지게 하면 몰라도.'
노예 출신의 고위 신관이 존재하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신성함은 세속의 모든 것을 뛰어넘는 조건이 아니었다.
사실 왕에게 가장 좋은 길은 이블린을 천공신의 신녀로 발표하고, 세스를 다른 여자와 정략 결혼시켜서 흠 없는 후계자를 생산하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두 녀석이 서로 붙어서 떨어지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편법을 써야 했다.
“신성 왕국은 이블린의 혈통을 만들어 주고, 기적을 일으키는 배경 을 설명해 주는 정도로 족하다. 그 이상으로 관계가 깊어지면 곤란해.”
왕은성녀의 가문을 노리고 있었다.
성녀 마르타는고위 성직자를 많이 배출하기로 유명한 명문가 출신이었다. 황금 혈통이라 불리며 존경받는 이 가문의 가계도에 이블린을 넣는 것이 왕의 목표였다.
‘그 이상온 어림도 없지. 귀염둥이는 나 혼자 독점해야 하는 법.’
잘못하면 내 꿀단지가 남의 꿀단지가 될 수 있었다.
왕은 신성 왕국에도, 나바르 왕국에도 이블린을 넘보지 말라고 털을 곤두세우는 중이었다. 그런 상황에 멍청한 동생이 내부의 적으로 설쳐 대니 머리가 아팠다.
“조슈아는 무사히 돌아갔나?"
"네, 치료를 받으신 후에 마차로 모셔 드렸습니다."
"별말은 없었고?"
”……왜 맞았는지 모르겠다는 소리는 하셨습니다."
“멍청한 놈.”
조슈아는 꽃병으로 머리를 맞은 뒤로 내내 어리벙벙한 상태였다. 자기가 이블린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순순히 털어놓을 정도였다.
충격으로 명하던 동생의 눈을 떠올린 왕은 괜히 찜찜해졌다.
"설마 이블린에게 반한 것은 아니겠지?"
”······폐하.”
“아니, 왜 소설에 자주 나오지 않나. 나를 이렇게 막대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라든가.”
피오나가 못마땅한 얼굴로 왕을 노려봤다. 찔끔한 왕이 떠드는 것을 멈췄다.
“그분은 라리사 모어에게 진심이지 않습니까.”
"글쎄 진심인지 고집인지는 녀석만이 알겠지.”
조슈아가 바보가 아닌 이상 라리사가 자신을 이용한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를 여태 놓지 못하는 건 잃은 게 너무 커서일 것이다. 자신이 틀린 선택을 했다고 인정하지 못하는 동생을 떠올린 왕이 한숨을 쉬었다.
“내가 너무 녀석을 오냐오냐 키웠어.”
"원래 아이란 뜻대로 자라지 않는 법이지요.”
피오나가 이블린의 반성문을 들여다보며 같이 한숨을 쉬었다.
* * *
“이비.”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니, 가출한 김세스 씨가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스가 보고 싶어서 집으로 오긴 했지만, 이렇게 떡 하니 돌아와 있을 줄은 몰랐기에 깜짝 놀랐다. 나는 허겁지겁 세스를 향해 뛰어갔다.
당황한 세스가 나를 맞으러 왔다. 곧장 그의 품으로 뛰어든 나는 세스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익숙한 향기 에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왔다.
"······다녀왔어."
꺼이꺼이 우는 나를 꼭 안은 세스가 속삭였다.
나는 태연히 말하는 그가 얄미워서 어깨를 꽉 깨물어 버렸다. 분명 아플 텐데도 꼼짝도 하지 않는 모습에 더 이상 힘을 줄 수가 없었다.
결국 깨문 어깨를 놓아준 나는 작게 웅얼거렸다.
“가출 남편 진짜 밉다.”
“미워하지 마, 응?"
“사, 사흘 만에 돌아온다고 해 놓고. 이틀이나 더 기다리게 하고.”
“미안해. 나도 정말 보고 싶었어.”
화를 내야 하는 순간인데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회를 낼 수가 없었다. 나는 훌쩍거리며 그의 어깨에 뺨을 비볐다.
내 이마에 입술을 누른 세스가 속삭였다.
"매일 당신 꿈을 꿨어. 당신 생각만 하고.“
"히잉······.“
그럴 거면 왜 가출했냐고!
내가 다시 펑펑 울자 세스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내 등을 다독거렸다.
-꾸?
그때, 세스의 품에서 기어 나온 복실이가 온몸으로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이어서 나타난 코코도 내 눈물을 말려 주려는 듯 날개를 열심 첩 파닥거렸다.
그 모습에 울다가도 풋 웃음이 터졌다. 나는 두 마리의 가출 청소년들을 손으로 콕콕 찔렀다.
"엄마 버리고 아빠랑 놀러 가니까 좋아?"
-뿌······.
-끗······.
두 녀석은 순식간에 쪼글쪼글해졌다. 눈만 데굴데굴 굴리는 모습에 이제 화도 나지 않았다.
나는 제일 궁금했던 부분부터 물어봤다.
"외삼촌은 만났어?"
-꾸우우 꾸꾸!
-까각각 깟!
브란에 대해 묻자 갑자기 신이 난 녀석들이 파닥거리며 주변을 날아다녔다. 나는 녀석들이 왜 이러는지 궁금해서 세스를 바라봤다.
"외삼촌을 이겼다고 좋아하는 거야.”
“······?”
대체 아카데미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복실이와 코코는 두 눈이 벌게져서 고기와 씨앗을 와구와구 먹어 댔다. 그동안 애를 굶겼나 싶을 정도였다.
젖은 머리를 말리던 세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복실이는 예상했는데, 코코까지 입맛이 까다로울 줄은 몰랐어.“
두 녀석의 먹이를 구하러 다니느라 진땀을 뺐을 그가 안쓰러웠지만 애써 뽀로통하게 말했다.
“그게 바로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거든요?"
그러게 누가 말도 없이 가출하래. 집 나가면 고생이라는 거 몰라?
내 투덜거림에 작게 웃은 세스가 입을 삐쭉거리는 내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나는 씻어서 한결 화사해진 그의 얼굴과 가운 틈으로 슬쩍 보이는 가슴을 모른 척 훔쳐봤다.
"화 많이 났어?"
"음, 지나가는 남자 두들겨 패서 파혼시키고, 다른 남자머리를 꽃병으로 깨 버리는 정도로요?"
”······응?“
“아, 남편과 자식들이 가출했는데 뭘 바래요. 적어도 사람은 안 죽였잖아요."
흥흥 코웃음을 치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세스가 조심스럽게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미안해. 많이 속상했어?"
"······."
“당신 동생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어. 만에 하나라도 당신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거든.”
알고 있다. 세스가 나를 걱정해서 그랬다는 것쯤은.
하지만 사랑하는 가족들이 한꺼번에 사라진 빈자리가 너무 커서 조금은 투정을 부려 보고 싶었다.
한숨을 쉰 나는 손을 뻗어 세스의 뺨을 어루만졌다. 조금은 까칠해진 것 같은 느낌에 마음이 아려 왔다.
그에게서 전해지는 부드러운 감정은 그리움과 닮아있었다. 그도 나만큼 나를 그리워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완전히 풀어졌다.
"브란은 잘 지내요?"
“아주 건강해. 누나를 돌려 달라면서 좀 울었지만.”
“네?”
항상 어른스러운 척하는 녀석이 그랬다니 전혀 상상이 안 되는데? 의아해하는 나를 보고 세스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정말 당신을 좋아해. 내가 유일한 가족을 빼앗았다고 미워하고 있고.”
“아직 애라서 그렇죠. 다 크면 자기 짝 찾는다고 정신이 없을 걸요?"
"······글쎄.”
에휴, 우리 남편이 가출하더니 또 어디서 자존감을 팔아먹고 왔나보다.
나는 쓸데없이 자책하는 세스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세스가 선선히 나를 안아 주었다. 나는 이제 내 것처럼 딱 맞는 품에 기댄 채로 물었다.
“그래서요, 듣고 싶은 말은 다 들었어요?"
“응.”
"브란이 뭐래요?"
녀석이 어떤 흑염룡을 창조했는지 궁금해 하는데 세스가 고개를 숙였다. 내 이마에 부드럽게 키스한 그가 속삭였다.
"당신과 처음 만났을 때의 이야기를 해 줬어.“
“······아, 그렇구나.”
쓸데없이 현실적인 이야기를 했나 보다.
세스에게서 전해지는 감정이 너무 무거워서, 지금 무슨 생각을 하냐고 물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마를 만지작거리며 어색하게나마 웃었다.
“다른 이야기는 없었어요?"
“거의.”
다른 이야기도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되도록 명랑하게 말하려고 애썼다.
“신경 쓰지 말아요. 그때의 일은 저도 거의 다 잊어 버렸거든요."
“이비, 그때의 일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어?"
속삭이는 것 같은 음성에 쭈뼛 소름이 돋았다.
기억나지 않는 과거가 꾸물거리며 발목으로 기어오르는 느낌이었다. 나는 나를 붙잡는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으려고 애쓰며 고개를 저었다.
“전에 말한 정도요? 그때의 감정은 기억나지만, 다른 것들은 거의 잊었어요.”
세스는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불안으로 가슴이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세스, 브란이 뭐라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