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 * *
나는 귀부인이 절대 하면 안 되는 행동에 대해 잔소리를 들은 다음 반성문을 써야 했다.
[다시는 테이블 위에 올라가지 않겠습니다.]
이걸 백 번이나 쓰고 있자니 손가락이 아팠다. 시무룩한 내 옆에서 같이 반성문을 쓰던 마리아가 가자미처럼 눈을 흘겼다.
“당신 때문에 정말 별걸 다 해 보네요.”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됐어요. 심정은 이해하니까.“
종이 위에 대충 글자를 끼적거리던 그녀가 한숨을 쉬더니 툭 말을 던졌다.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네?"
"결투 말이에요. 약혼녀를 빼앗겼으니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거예요. 억지로 결투한 것일 테니까 쓸데없는 일로 풀 죽지 말아요.“
뜻밖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리아를 바라봤다.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한 마리아가 다시 바쁘게 펜을 움직였다. 나는 활짝 웃었다.
“고마워요, 마리아. 사실 진짜 신경 쓰였거든요.”
"당신은 정말 남편을 좋아하네요.”
마리아가 꼭 희귀한 동물처럼 나를 쳐다봤다. 내가 세스를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라 머쓱하게 뺨을 긁적일 수밖에 없었다. 픽 웃은 마리아가 덧붙였다.
"혼자만 행복하지 말고, 괜찮은 남자 있으면 좀 소개 시켜 줘요. 조신하고 집안을 잘 돌볼 남자면 더 좋고요.”
“어…….”
"왜요? 내가 이런 말을 하니 이상해요?"
“아뇨, 요즘 자주 듣는 말이라서.”
정확히는 내 시녀들에게서 들었다. 그들은 종종 조신한 남자가 있으면 소개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요즘 조신한 남자가 유행인가?'
내가 조신남을 찍어 내는 공장을 갖고 있지 않는 이상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요였다.
"당신 주변이라면 알 만하네요. 하지만 제일 먼저 나를 챙겨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요. 프림로즈는 데릴사위를 들여야 하는 입장이니까.“
당당하게 자선부터 챙기라고 명령한 마리아가 만족 한 듯이 펜을 놀렸다. 나도 다시 반성문 쓰기에 집중하려는 순간이었다.
가벼운 노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피오나가 들어왔다. 그녀는 얌전히 반성문을 쓰고 있는 나를 보고 온화 한 미소를 지었다.
“이블린,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 * *
“왔느냐?”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왕이 손수 포도주를 따르고 있었다. 조슈아는 이미 떠났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딘지 착잡해 보이는 왕의 앞으로 가서 깊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폐하.“
"네가 뭘 죄송해. 내 동생이 바보인 것이 문제지."
아무리 동생이 등신이라도 대가리가 깨진 모습을 보면 속상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왕은 나를 탓하지 않았다.
“그만하고 이리 와서 앉아라.”
나는 되도록 얌전히 의자에 앉았다.
“그놈이 네게 뭐라고 했는지 들었다. 참 어처구니가 없어서. 잘도 제게 유리한 부분만 지껄였더군.”
생각만 해도 화가 나는지 얼굴이 벌게진 왕이 포도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피오나가 조용히 내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나는 왕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럼 그게 실현될 일은 없는 거죠?"
“당연하다.”
한숨을 쉰 왕은 조슈아가 말하지 않은 부분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네게 레베카 왕녀에 대해 말한 적이 있지? 그녀의 영향으로 선왕께선 딸인 나를 후계자로 삼는 것에 주저함이 없으셨다. 조슈아가 태어난 뒤에도 마찬가지였지.”
레베카왕녀가 남긴 뜻밖의 긍정적인 영향이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불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아스트리아의 미래를 위해 조슈아를 후계자로 삼으라고 선왕께 말씀드렸다.”
나는 깜짝 놀라 왕을 쳐다봤다. 이거야말로 왕가의 비밀이자 내가 들어선 안 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왕은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왕실의 유일한 왕자로서 오냐오냐 자란 조슈아에게 후계자라는 짐은 무거운 것이었다. 그 애 는 전처럼 자유롭게 지내면서 후계자로서의 권리는 누리고 싶어 했어. 한마디로 왕의 재목으로는 부족했지."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선왕은 자신이 오랫동안 왕좌를 지켜 조슈아의 자식에게 보위를 물려주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불안 속에서 7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조슈아는 그런 전쟁을 치르기엔 너무 심약했다. 녀석은 전장에서 사소한 부상만 입어도 수도로 돌아가기를 반복했어. 그리고 그 자리는 세스가 대선 채웠다.”
존재감도 없는 왕의 후계자보다 전쟁 영용의 명성이 높아진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조슈아는 그런 세스에게 열등감을 느꼈다.
“조슈아가 라리사 모어의 유혹에 넘어간 건 아마 세스의 것을 뺏고 싶다는 욕망도 있었을 것이다.”
세스가 전쟁에서 뛰어다닐 때, 수도에서 머무르던 조슈아는 라리사 모어와 바람이 났다. 그 사실을 안 선 왕은아들에게 너무나도 큰실망을 느꼈다.
선왕은 조슈아를 강제로 전쟁터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날 때까진 돌아오지 말라고 명령했다.
조슈아에겐 다행스럽게도 그때는 7년 전쟁의 끝물 이었다. 하지만 그가 복귀하자마자 큰 사고가 일어났다.
“중앙 해전에서 아군의 배들이 침몰하면서 나와 조슈아가 동시에 바다에 빠졌다.”
그 긴박한 순간에 세스는 왕을 구하는 것을 선택했다.
”……기절했다 눈을 떠 보니 젖어서 파랗게 질린 세스가 나를 끌어안고 있더군. 고맙다고 말해야 할 순간 이었다. 내 목숨을 살려 줘서 감사하다고.”
왕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 세스에게 화를 내고 말았다. 왜 후계자인 조슈아가 아니라 나를 구했냐고.”
허둥거리던 세스는 다시 바다에 뛰어들었고, 기어코 조슈아를 찾아서 돌아왔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고 왕은 몇 번이나 탄식했다.
"날 구하기 위해 바다에 뛰어든 그 애를, 나는 신하처럼 바다로 다시 내몰고 말았지. 내 평생 가장 후회하는 일이다."
나는 자책하는 왕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어쩌면 왕이 세스를 후계자로 삼고 싶어 하는 건 그때 일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다시 한번 한숨을 쉰 왕이 이야기를 이었다.
“조슈아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배의 파편에 부딪쳐 심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지. 그 때문에 나와 마찬 가지로 불임이 되었다."
“네?"
나는 깜짝 놀랐다. 조금 전에 조슈아가 한 말이랑 너무 다르잖아?
“그 사람은 세스가 결투에서 자길 찔러서 불임이 되었다고 하던데요.”
“이미 그전부터 불임이었다. 그 못난 놈이 여전히 세스의 탓을 하고 다니나보군.”
조슈아는 세스가 자신을 먼저 구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불구가 되었다고 원망했다. 그리고 결투 중에 상처를 입자 모든 것을 세스의 탓으로 덮어씌운 것이었다.
“전 그 결투라는 것도 잘 이해가 안 가요. 정말 세스가 그에게 검을 휘둘렀나요?"
내가 아는 세스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약점을 만들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조슈아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 ……그래, 하지만 세스의 의지는 아니었지."
라리사 모어는 왕의 후계자와 전쟁 영웅이 자신을 두고 다투는 그림을 원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가치를 한껏 높이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을 위해 결투를 해 달라는 라리사 모어의 부탁에 조슈아는 고민에 빠졌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라리사 모어가 세스를 버리고 왕실에 떳떳이 시집올 수 있는 방법은 결투뿐이었다.
그에겐 세스가 절대 자신을 베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래서 평생의 소원이라며 선왕에게 결투를 허락해 달라고 빌었다.
당연히 왕은 반대했다. 생명의 은인이자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에게 이런 짓을 해선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왕께선 허락하셨다. 대신 결과를 증명할 증인만 두고 비밀리에 결투를 진행하라 명령하셨지. 그때 이미 조슈아를 왕실에서 쫓아낼 생각이셨던 것 같다."
그렇게 비밀리에 결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에서 벗어난 결과가 나왔다. 세스가 조슈아에게 져 주지 않았던 것이다.
“네? 정말요?"
“그래, 세스는 조금의 체면도 봐주지 않고 조슈아를 패배시켰다.”
세스는 달려드는 조슈아를 몇 번이나 걷어차 쓰러뜨린 다음 항복을 요구했다.
예상 밖의 상황에 당황하던 조슈아도 별수 없이 항복해 버렸다. 연약한 왕자님께 세스의 공격은 너무나 가혹했던 것이다.
이변이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당시의 결투는 회랑으로 둘러싸인 중정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그런데 회랑의 2층에서 세스쪽으로 불타는 화로가 떨어진 것이다.
세스는 재빨리 화로를 피했지만 쏟아지는 불과 재 지 피할 수는 없었다. 불에 둘러싸인 그는 발작을 일으켰고 조슈아를 검으로 찔러 버리고 말았다.
날뛰는 세스를 제압하는 것에는 왕궁-기서들이 전부 다 동원되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 비밀이었던 결투가 세간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왕은 침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세스가 불에 공포를 느낀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전장에서 불길을 뚫고 적과 싸운 적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라리사 모어는 세스의 약점을 알고 있었다.”
세스에게 화로를 떨어뜨린 범인은 바로 라리사 모어였다. 왕궁의 시녀로 위장한 그녀가 붙잡혀 오자 선왕은 크게 노하여 라리사의 목을 벨 것을 명했다.
“그때 다 축어 가던 조슈아가 일어나 라리사를 살려 달라고 매달렸지.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다는 이유로 말이다.”
불구가 된 아들이 유일하게 가진 자식 이었다. 선왕은 차마 라리사 모어를 죽일 수가 없었다. 대신 그들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기로 했다.
“선왕께선 조슈아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하셨다. 왕족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거두고 귀족으로 살아갈 것을 명하셨지.”
그렇게 해서 왕실의 일원이 되려던 라리사 모어의 야망은 좌절되었다.
세스 역시 자신의 명예를 내려놓아야만 했다. 그는 약점이 드러난 자신은 왕의 검으로 있을 수 없다며 모든 특권을 반납하고 은퇴했다.
선왕은 세스를 레베카 왕녀의 외손자로서 아꼈다. 뛰어난 기사이자 신하로 사랑했다. 그렇기에 세스의 이른 은퇴에 무척 상심하고 말았다.
“나는 선왕께 세스의 모든 권리를 되찾아 줄 것을 맹세하고 후계자가 되었다.”
이야기를 마친 왕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왕에게도 이번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쉽지 않았던 것 같았다.
나 역시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내가 몰랐던 세스의 상처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조금은 울고 싶고 , 아주 많이 세스가 보고 싶었다.
“조슈아의 일은 걱정할 것 없다. 세스에게 덤벼들 명분도 없을뿐더러, 두 번 다시 널 귀찮게 굴지 못하게 해 두었으니까.”
“네, 폐하. 전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어요.”
또 만나면 뒤통수를 아예 뭉개 버릴 데니까.
그때, 테이블 너머로 손을 뻗은 왕이 내 손을 꼭 잡아 왔다. 거기서 느껴지는 감정은 미안함과 기대였다.
“이블린 내가 이런 요구를 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너만은 끝까지 세스의 편이 되어 줬으면 한다.”
“그것만큼은 자신 있습니다, 폐하.”
나는 맹세하듯이 말했다. 그러자 왕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평안한 표정이 되었다.
“짐이 하고 싶은 말은 여기까지다. 그리고 너를 꼭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하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