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 * *
조슈아 클라멘스 백작.
왕의 동생이자선왕의 유일한왕자. 라리사 모어와의 결혼으로 모든 권리를 잃고 백작으로 추락한 사람. 그리고 조카인 세스에게 약혼녀를 배 앗겼다는 불명예를 안겨 준 배신자.
‘이 시점에서 나를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솔직히 말하면 너무 뜬금없었다. 무슨 목적으로 찾아왔는지도 짐작이 되지 않았다.
‘회유나 협박? 아니면 둘 다?'
머리를 굴리느라 침묵이 길어진 탓일까. 루시아가 어색한 표정으로 물었다.
“제가 실수했나요? 그냥 돌려보낼까요?"
"안 돼! 우리가 피하는 것 같잖아!"
카밀라가 팔짝 뛰며 반대했다.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찾아온 이상 돌려보낼 생각은 없어요. 여러분만 괜찮다면 여기서 만나죠.”
모두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일하게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테오만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럼 모셔 올게요.”
어색하게 밖으로 나간 루시아가 잠시 후 낯선 남자와 함께 돌아왔다. 나와 눈이 마주친 남자가 찔끔하며 예를 표했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조슈아 클라멘스입니다.“
묘하게 왕과 닮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날카로우면서도 우아한 왕과 다르게 한 떨기 우산이끼처럼 우울하고 축축한 분위기가 거슬렸다.
나는 고개만 까딱거렸다.
“이블린 엘마이어입니다. 무슨 일이시죠?"
길게 이야기할 것 없이 용건부터 묻자 움찔한 조슈아가 파르르 어깨를 떨었다. 세스가 저러면 청순가련 했을 텐데, 저놈이 저러니 청승 떤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공작 부인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뵈었습니다.”
"네 , 지금 하시면 됩니다."
"듣는 귀가 너무 많아서, 잠깐 주변을 물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에 안절부절못하던 조슈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눈꼬리를 팍 치켜든 카밀라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공작 부인과 단둘이 있고 싶다니, 무슨 의미죠? 전적이 있는 분께서 그런 말을 하시면 굉장히 불쾌합니다."
아이고, 잘한다. 우리 싹퉁 바가지.
카밀라의 공격력에 새파랗게 질린 조슈아가 파르르 입술을 떨었다. 안 그래도 파리한 남자가 약한 모습을 보이니 꼭 우리가 악당이 된 것 같았다. 악당 맞지만.
“제, 제가 공작 부인께 드릴 말씀은 왕가의 비밀과 관련이 있는 겁니다. 감당할 자신이 있으십니까?"
다 죽어 가던 우산이끼가 꼿꼿하게 머리를 치켜들었다. 그래도 왕자였던 가락이 있어서인지 제법 어흥 소리가 났다.
물론 카밀라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 이야기를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하시면 안 되죠. 폐하께서도 불쾌해하실 겁니다."
“그런······."
우산이끼가 도로 팍 쭈그러들었다. 카밀라 하나 이기지 못하다니, 공격력이 아메바 수준인 것 같았다. 나는 싱긋 웃으며 제안했다.
“상황이 이래서 모두를 물리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네요. 그러니 한 명만 여기 남기도록 하겠습니다.”
“한 명이라면?"
“마리아 프림로즈 양이라면 믿으실 수 있겠죠?"
“조, 좋습니다."
조슈아의 승낙에 마리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미안,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궁금해서 말이야.
상황이 이렇게 되자 우리 셋을 제외한 나머지는 밖으로 나가야 했다 카밀라가 뽀로통하게 입을 내밀었다.
“밖에서 오래 안 기다릴 거야.”
“조심하세요.”
걱정스럽게 속삭인 다이애나가 마지막으로 물러나 문을 닫았다. 보는 사람이 적어지자 어딘지 불안해 보이던 조슈아의 얼굴에 서서히 핏기가 돌아왔다.
“이제 자리에 앉아도 되겠습니까?"
"네네, 뜻대로 하세요.”
자리도 권하지 않는 무례를 비꼬는 것 이었지만 굳이 알은척하지 않았다. 우아하게 자리에 앉은 조슈아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는 흥미롭게 그를 마주 봤다.
"당신은 그분과 전혀 닮지 않았군요.“
“누구와요?”
"흠, 캐서린 공주 전하와 말입니다.“
뭐야,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꼭 닮아야 하는 법이라도 있어? 아니면 뭔가 수작이라도 부리려는 건가?
이리저리 눈을 굴리는 꼴을 보니 나를 낚으려는 함정 같아서 들어 주고 싶지 않아졌다.
“그보다 아까 말씀하신 왕가의 비밀이라는게 대체 뭔지 궁금한데요.”
내가 미끼를 물지 않자 당황하던 조슈아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도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아내, 라리사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마십시오.”
"······네?"
나는 황당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누가 누굴 괴롭혀?
“제가 뭘 했는데요?"
“다, 당신 때문에 라리사가 너무 괴로워합니다. 저는 남편으로서 더 이상 당신의 만행을 두고 볼 수가……."
“그러니까 묻고 있잖아요. 제가 뭘 해서 아내분이 그렇게 괴로워하시냐고요.”
내 말에 조슈아의 입이 딱 다물렸다. 흔들리는 눈을 보니 내가 뭔가를 했다는 근거는 없는 듯했다. 그냥 정황상 범인이 나라는 거겠지.
“사교계에서 명확함을 찾는 것보다 어리석은 것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럼 아무 생각 없이 내 아내가 너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 같으니까 행동 조심하라고 경고하러 오신 거네요?"
내 말이 정곡을 찔렀는지 조슈아의 어깨가 움찔했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껏 진지하게 그를 상대하던 내가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솔직하게 말하죠. 전 부인께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부인이 괴로워하신다는 것도 처음 들었네요.“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조슈아가 불신 어린 얼굴로 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믿으실 필요는 없어요. 곧 알게 되실 거니까요.”
“예?”
“제가 앞으로 부인을 묻어 버리기 시작하면 지금까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시게 되겠죠."
조슈아가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저, 절대 그렇게 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겁니다! 당신이 그런 짓을 한다면!"
“한다면?“
“모두의 앞에서 그날 있었던 결투에 대해서 이야기 할 겁니다!"
뭔 소리여, 이건 또?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조슈아의 표정이 의기양양해졌다.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하긴, 당신 남편도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없었겠죠. 라리사를 걸고 한 결투에서 저한데 비겁한 짓을 했다고는!"
마치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 세스가 라리사 때문에 결투를 했다고? 순간 이성을 잃을 뻔했던 나는 삐딱한 미소를 지으며 조슈아를 훑어봤다.
“처발렸겠네?"
"······예?"
“꼴에 세스한테 이기진 못했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어떻게든 질긴 목숨으로 살아 있네요?"
조슈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분노로 파들파들 떨던 그가 소리를 높였다.
"세스 엘마어어는 그때 이미 항복한 저를 기습해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기사로서의 명예도 잊고 제 복수심을 채우려고 했단 말입니다!"
“그냥 죽지 왜 살았대?"
의아하게 중얼거리자 조슈아가 멈칫했다. 그는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다, 당신은 그가 기사도를 저버리고 무방비한 상대를 죽이려고 했다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네, 당선이 지금까지 뻔뻔하게 살아 있는 이유가 더 궁금한데요.“
기사도가 뭐 밥 먹여 줘? 남의 약혼녀랑 바람피운 놈이 잘났다고 지껄이는 꼴 좀 봐라.
“그때 나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세스 엘마이어의 공격이 남자로서의 미래를 끝장냈고, 나는 불구가 되어 왕위 계승권을 박탈당했습니다.”
검이 영 좋지 못한 곳을 스친 모양이다. 그거참 깨소금 맛이라고 생각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요?”
“일국의 왕자가 치명상을 입은 일입니다 선왕이 세스 엘마이어를 감싸서 모든 것을 덮지 않았다면 절대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반사적으로 조슈아를 훑어봤다. 검이 영 좋지 못한 곳을 스치지 않았다고 해도 이 띨띨이가 왕이 될 일은 없었을 것 같은데.
“세스 엘마이어는 제 누님의 충신이었지요. 만약 그가 누님과 짜고 제 왕위 계승권을 박탈하기 위해 손을 썼다고 말하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독버섯처럼 표독한 표정으로 변한 조슈아가 한 마디 한 마디 힘주어 내뱉었다.
"귀족들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특히 세스 엘마이어는 왕의 후계자가 될 자격을 잃게 될 겁니다!"
그러니까 이거, 라리사 모어를 보호하려고 왕이고 세스고 죄다 진흙탕에 처박겠다는 소리인가?
"허허.“
너무 어이가 없어서 백 년 목은 도라지처럼 껄껄 웃은 나는 다음 순간 벌떡 일어나 테이블 위로 뛰어올랐다.
“이블린!"
마리아의 비명과 함께, 내 손에 붙잡힌 기다란 꽃병이 조슈아의 머리에 부딪치며 산산조각 났다.
순간 휘청한 조슈아가 제 머리를 더듬거렸다. 피가 묻은 손을 본 그가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비실거리며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야.“
나는 차가운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마음대로 해. 근데 네가 그렇게 지껄일 때까지 살아 있을지는 모르겠다.”
"······."
조슈아가 멍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피식 웃으며 아직 내 손에 잡혀 있는 꽃병 조각을 그의 앞으로 툭 던졌다.
“네 아내를 괴롭히지 말라고 했지? 그런데 너희 둘은 내 남편을 지금까지 계속 괴롭혔잖아.”
너희의 낭만적이고 비극적인 로맨스를 위해서 우리 세스를 산 채로 갈았잖아.
“그러니까 목숨으로 사죄해 주지 않을래? 응? 귀찮게 하지 말고 좀 죽어 주라.”
새파랗게 이를 드러낸 내 증오에 조슈아가 파르르 떨었다. 피 묻은 머리를 감싸 쥐고 고개를 떨어뜨린 모습이 영락없는 가련한 피해자였다.
“조쉬!"
바로 그때, 벌컥 문이 열렸다. 혼비백산한 왕이 대기실 안으로 뛰어들었다.
"네가 감히 이블린을……!"
성난 사자처럼 소리를 지르던 왕이 멈칫했다.
왕은 바닥에 주저앉은 조슈아와 테이블 위에 서 있는 나를 번갈아 본 다음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나는 눈치껏 테이블 아래로 내려와 깨진 꽃병 조각을 툭툭 차서 구석에 밀어 넣었다.
몇 분 후,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온 왕이 헛기침을 했다.
"클라맨스 백작, 당장 일어서서 짐을 따라오도록.“
“······누님, 하지만-"
"백작, 지금 짐은 국왕으로서 명령하는 것이다!"
왕의 호통에 움찔한 조슈아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지금 나눈 이야기는 그때 다시 하도록 하죠.”
“싫은데? 난 할 말 없는데?"
내 빈정거림에 입을 꾹 다문 조슈아가 절뚝절뚝 왕을 따라나섰다. 아까 주저앉을 때 발목을 다친 것 같았다.
참 가지가지 한다고 투덜거리는 내 앞에 스윽 나타난 시녀장 피오나가 이리 오라고 살랑 살랑 손짓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무죄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나는 피오나에게 연행되어 끌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