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198화 (198/240)

198화

* * *

브란에 이어 교장과의 면담을 마친 세스가 마차에 올랐다 그때까지 하고 싶은 말을 꾹 참고 있던 모리스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것은 얻으셨습니까?"

"거의.”

브란에게서 들을 수 있는 것은 다 들었다.

이블린이 겪었을 고통을 헤아리면서. 이미 지나간 일이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분노와 무기력함을 억누르면서. 겨우 끝까지 버틸 수 있었다.

그렇다고 모든 의문이 풀린 것은 아니었지만.

“가장 궁금했던 부분은 들었다."

세스가 여기까지 온 것은 편지에 쓰인 ‘이블린의 죽음’에 대해 묻기 위해서였다. 거기에 더해 한 가지를 더 물어보지 않았다면 완전히 틀린 판단을 할 뻔했다.

"만약 누나가 우리 셋이서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한다면 괜찮지만, 기억나지 않는다면 빨리 나한테 돌아와야 해.”

브란은 어째서 이블린에게 그런 경고를 전했을까. 정작 이블린은 자신의 정체가 뭔지 전혀 기억하지 못 하는데.

“누나는 자신이 무엇인지 기억하지 못했지만, 우리가 원래는 셋이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걸 절대 잊으면 안 된다고 했죠. 만약 누나가 잊었다면 꼭 다시 알려 달라고 했어요. 그걸 잊어버린 누나는, 더 이상누나가 아닐 거라면서.”

브란의 대답을 들은 후에야 세스는 자신의 생각이 처음부터 어긋났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영원의 뱀은 꽤나 의뭉스러운 성격이더군.“

“예?”

"여러 가지 모습으로 장난치는 것뿐만 아니라 수수께끼를 좋아하는 것 같아.“

세계수 같은 고대신을 모시는 수족들은 대체로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였다. 그래서 악마라고 여겨 질 때도 있지만 사실 위대한 자연에 가까운 존재였다.

어린 소년이 어설프게 그린 마법진으로는 결코 소환 될 수 없는 존재. 영원의 뱀은 아마 처음부터 그곳에 강림하여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까?"

세스는 창밖의 어둠을 향해 물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어디선가 위대한 존재의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 * *

록웰 부인은 라리사 모어의 후원자가 되기로 했다.

록웰 가문과 빌러스 가문 사이의 중재에 실패했던 라리사 모어로서는 뜻밖의 횡재였다.

“이번 일로 톰의 상심이 워낙 커서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하답니다.”

은근슬쩍 톰을 떠맡기려는 수작에 싱긋 미소 지은 라리사가 다른 길을 제시했다.

“위로보다는 달콤한 복수가 좋지 않을까요? 위로는 잠깐이지만 복수의 짜릿함은 영원하니까요.”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록웰 부인이 바보라서 복수를 꿈꾸지 않은 게 아니었다. 그보단 이블린이 너무 막강한 상대였기 때문이다.

선분과 권력이 깡패인 이가 체면까지 돌보지 않으니 도저히 이 길 자신이 없었다.

“그럼 내게 맡겨 주세요. 부인을 대신해서 손을 써 드리지요. 약간의 대가만 지불한다면 말이에요.”

그렇게 두 사람은 힘을 합치기로 했다.

라리사는 제일 먼저 이블린이 레이디 로즈라는 사실을 널리 알렸다. 그리고 이블린이 중재인으로 성공하기 위해 톰을 두들겨 됐다고 소문냈다.

엘마이어 공작 가문에서 소문을 덮지 못하도록 많은 돈을 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이블린은 이번 일에 대해 감출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일인 것처럼 흔쾌히 인정했다.

“아, 팰 만해서 됐어요. 뭐 어쩌란 말이에요?"

그녀의 오만한 발언은 엄청난 화재를 일으켰다.

사람들은 모였다 하면 이블린의 발언과 행동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기 바빴다.

그러나 이블린은 원래 사교계의 폭군이었다.

그동안 해 놓은 짓이 있어서 남자 하나 두들겨 팬 정 도는 별로 충격적이지도 않았다. 그저 뻔뻔한 태도가 화제가 되었을 뿐이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펄쩍 뛰는 사람은 없었다.

“이상하지만, 오히려 그 점이 좀 멋있지 않아?"

소녀들 사이에는 이블린을 동경하는 분위기까지 생겼다.

예상 밖의 반응에 이룰 득득 갈던 라리사 모어는 좀 더 많은 돈을 부려 유명 인사들을 움직였다.

‘어디 끝까지 모른 척할 수 있나보자.'

* * *

왕관을 쓴 사자가 그려진 테이블이 부서질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친 왕이 살벌한 눈으로 대신들을 노려봤다.

“그래서 뭐 어쩌란 말인가? 왜 남의 집 아들을 됐냐고 공작 부인을 불러서 혼내란 뜻인가?"

“소, 소인은 그런 뜻이 아니옵고 공작 부인의 행동이 좀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아닐까 하여…….”

말을 꺼낸 대신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더듬거렸다.

“아랫도리 잘못 놀린 놈을 혼냈다는 이유로 공작 부인을 호출하라니, 이게 지금 무슨 망발이야!"

대전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호통을 친 왕이 찔끔 목을 움츠린 대신들을 핵 둘러봤다.

“이런 사소한 일로 잠의 귀를 더럽힐 시간에 국정에 나 좀 더 신경을 써라!"

처음 다프네와 톰 사이의 문제가 불거졌을 때 왕은 톰이 저지른 범죄를 어떻게 처벌할 것인지 검토하라고 명했다.

그때 대신들은 벌떼처럼 일어나 폐하께서 어찌 이런 사사로운 일까지 신경 쓰시냐고 반대했다. 왕이 이번 일을 명목 삼아 자신들의 목을 조일까 봐 걱정해서였다.

그것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던 왕이 대신들을 갈구 기 시작한 것이다. 할 말이 없어 헛기침을 연발한 대신들은 눈치 없이 말을 꺼낸 이를 힐끔힐끔 째려봤다.

‘아, 진짜! 낄 때 안 낄 때도 구분을 못 해?!'

‘분위기 봐라. 겨우 좀 살 만하게 맞춰 놨더니!'

사방에서 찔러 드는 칼날 같은 시선에 말을 꺼낸 대신은 모른 척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도 돈 받은 값은 했으니까.'

한마디 하고 입을 닦기엔 너무 큰돈이었다. 하지만 대신은 더 이상 나설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 * *

부인에 대한 정조를 지키며 수절한 것이 인생의 유일한 업적인 케인 엘마이어는 이번 일로 제 주가를 올리려고 애썼다.

"애초에 말이야. 남자가 바람을 피우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안 생겼을 것 아닌가? 나 때는 이런 일은 상상도 못 했어! 요즘 것들은 까져도 너무 발랑 까져서 큰일이야. 에잉, 쯧쯧!"

하지만 본인 자랑이 너무 넘쳐서 큰 효과는 없었다.

정작 주가를 높인 것은 슬그머니 나선 토비아스였다.

"저는 공작 부인의 행동을 이해합니다. 톰 록웰은 너무 경솔한 짓을 했습니다. 남자로서도, 귀족으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저라면 약혼녀의 마음을 결코 그렇게 아프게 하지 않았을 겁니다.”

"까아악! 토비아스 니임! "

"토비아스 형! 저를 가져요!"

방탈출과 그리핀 런을 통해 수많은 팬들을 거느리게 된 토비아스였다. 그런 그가 톰 록웰을 저격하자, 수군거리던 사람들마저 이블린이 그럴 만했다는 쪽으로 여론이 바뀌어 버렸다.

그와 함께 프리지어 궁에는 이블린에게 보내는 편지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갔다.

이블린의 행동을 응원하는 소녀들의 편지와 우리 딸도 십자매에 넣어 달라는 엄마들의 요청. 고리고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자선의 남자 형제를 렌탈 보내고 싶다는 계약 신청서였다.

이블린은 거기서 렌탈 계약 신청서만 똑 떼어 의상부 친구들에게 전해 주었다. 1차 심사를 위해서였다.

사교계의 정보는 그녀보다 의상부 친구들이 더 빠삭 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렇게 자신의 형제를 팔아먹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다니. 악마가 울고 가겠어.”

신청서를 뒤적거리던 카밀라가 혀를 내둘렀다. 그녀가 어지른 것을 정리하던 마리아가 냉담하게 대꾸했다.

"악마가 아니니까 필요도 없는 형제를 지금껏 살려 둔 거야.“

“그, 그런가?"

마리아의 무능한 오라비, 리처드 프림로즈를 떠올린 카밀라가 버벅거렸다. 그녀가 식은땀을 홀리는 것을 눈치챈 이블린이 킬킬 웃었다.

”에잇, 속 편하게 웃긴 우리가 누구 때문에 밖에도 못 나가고 이러고 있는데.“

연일 화제를 몰고 다니는 이블린 때문에 의상부 시녀들도 덩달아 대기실에 갇혀 있었다. 나무에 매달리거나 마법 도구로 안을 엿보는 극성스러운 사람들 때문에 창문도 커튼으로 다 가려 놓은 상태였다.

이블린이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정말 미안해요.”

"흥, 마음에도 없는 사과는 됐거든요. 그러고 나서 또 사고 칠거잖아요?"

”에이, 이번 사고는 같이 쳤잖아요.“

이블린의 너스레에 신청서를 정리하던 마리아가 힐끗 시선을 던졌다.

"저도 좀 궁금하네요. 사고 친 거야 그렇다 쳐도,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도발적인 말을 한 거예요?"

이블린의 이번 발언은 결코 이블린답지 않았다.

그녀는 절대 생각 없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즉흥적인 것 같아도 반드시 어느 정도 계획이 세워져야 움직였다. 그 속도가 남들보다 빠를 뿐.

"당신, 뭔가 노리는 게 있죠?"

마리아의 날카로운 물음에 싱긋 웃은 이블린이 수줍게 답했다

"음, 한번 시험해 보고 싶었거든요.“

”뭘요?“

"누군가의 머리에 꽃병을 내리치고 발차기를 날려도 다들 박수 치고 호용해 줄지.”

"······미쳤어요?"

마리아는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반면 앗! 소리를 내며 벌떡 일어난 다이애나가 손발을 바동거리며 뭔가를 표현하려 애썼다.

“그, 그때 말한 그 목표군요!"

“뭐? 무슨 말이야?"

어리둥절해하는 카밀라와 달리 핀은 단번에 다이애나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는 감탄하는 얼굴로 이블린을 바라봤다.

“그 수많은 일들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목표를 고수하고 있다니,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아, 왜 너희끼리만 아는 소리 해!"

카밀라가 역정을 내자 헛기침을 한 핀이 설명했다.

"예전에 제가 한번 목표가 뭐냐고 여쭤본 적이 있었거든요.“

"목표? 이블린의 목표 말이야?"

"예, 그때 왕궁 한가운데서 누구 머리채를 잡고 패대 기를 쳐도 괜찮았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순간 모두의 시선이 이블린에게 쏠렸다.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돈 이블린이 핀을 칭찬했다.

“우와, 핀 어떻게 그때 한 이야기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다 기억해요? 진짜 대단하다.”

“제가 좀 하죠."

“아니, 이게 무슨 미친 소리야?!"

카밀라가 말도 안 된다는 것처럼 파닥거렸다.

"차라리 포도주를 끼얹거나 부채로 뺨을 때려! 아니면 독을 탄 홍치를 먹이든가! 왜 머리채를 잡고 패대기를 치고 꽃병으로 머 리를 깨? 당신 귀족이잖아!"

고개를 갸웃한 이블린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난 그래도 될 것 같은데?"

"안 돼! 아, 안 될걸? 아마도······?"

카밀라의 목소리에서 급격히 자신감이 사라졌다. 도움을 청하듯 두리번거리던 그녀가 마리아를 쳐다봤다.

“마, 마리야 좀 말려 봐.”

"당신, 설마 그걸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요? 그래도 된다는 확신을 얻을 때까지?"

마리아의 물음에 이블린은 씩 웃기만 했다. 마리아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정말 왜 라리사 모어와의 정면 대결을 피하나 했더니.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이유일 줄이야."

“뭐든 확실한 게 좋죠.”

이블린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그 모습이 정말로 광인 같아서 카밀라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그때,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신성 왕국의 차기 성녀인 루시아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

“이블린 님, 손님이 찾아오셨는데요.”

"음? 저한테요?"

"네, 조슈아 클라멘스 백작님이라는데. 어떡할까요?"

라리사 모어의 남편. 조슈아 클라멘스의 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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