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 * *
톰이 너덜너덜 넝마가 되어 돌아오자 록웰 가문은 발칵 뒤집혔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록웰 부인은 당장 다프네의 집으로 쳐들어갔다.
“자매라니 무슨 헛소립니까. 우리 다프네에겐 오빠 하나밖에 없습니다.”
다프네의 엄마인 빌러스 부인은 싸늘하게 대응했다. 당사자인 다프네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당신 딸의 의자매라고 했다니까? 어디서 그런 깡패 같은 여자들을 불러와서 우리 애를 때려?!"
“하지만 저는 의자매가 없는데요? 집에 복숭아나무도 없고…….”
“그럼 우리 이들이 거짓말을 했단 소리야?!"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록웰 부인도 속으로는 아차하고 있었다. 빌러스 가문 전체가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좀 더 조사를 하고 왔어야 했는데.'
너무 흥분해서 그대로 달려와 버렸다. 이러다가는 역풍을 맞을 수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빌러스 부인이 눈썹을 치켜들었다.
"보자 보자 하니 진짜 어처구니가 없군요. 증거도 없이 우리 애 탓이라고 덮어씌우면 답니까?"
“아니, 상황을 보면……!"
“우리가 관련 있다는 증거부터 내놓고 이야기하시죠. 몰상식하게 목소리만 높이지 말고.”
“뭐? 몰상식?!"
”쯧, 교양 머리 없이.”
혀를 찬 빌러스 부인이 핵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눈치를 보던 다프네도 쪼르르 엄마의 뒤를 따라가 버렸다.
얼굴이 시뻘게진 록웰 부인은 부들부들 떨었다.
그때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다프네의 오빠인 나일이 화가 난 얼굴로 들이닥친 것이다.
"당신이 무슨 염치로 여길 왔습니까?"
항상 신사적이던 나일이 눈을 부라리자 록웰 부인은 저도 모르게 주춤 물러났다. 하지만 이내 그런 자신을 깨닫고 날카롭게 소리쳤다.
"증거가 없어도 내 아들 때린 게 너희들 짓인 거 다 알아! 내가 이대로 넘어갈 줄 알았다면…….“
“하, 진짜!"
나일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는 무서운 표정으로 록웰 부인을 노려봤다.
"록웰 부인, 내가 후회하는 게 뭔지 압니까? 지금껏 당신 아들을 가만히 내버려 둔 겁니다.”
”······뭐?"
"다프네가 얼마나 속상해하는지 알면서! 그 잘난 가문의 체면 때문에! 입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는 사실이 수치스럽고 후회스럽습니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소리친 나일이 록웰 부인의 얼굴을 삿대질하며 말을 이었다.
“톰에게 똑똑히 전하십시오. 내 눈에 띄지 말라고. 나를 만나는 날이 곧 놈이 죽는 날이 될 거라고.”
"감히 그런 말을!"
무례하다고 화를 내기도 전에 할 말을 마친 나일이 쌩하니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결국, 록웰 부인은 아무 런 성과도 없이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증거를 잡아야 해.'
이대로는 너무 분해서 넘어갈 수가 없었다. 록웰 부인은 급히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뭐? 싫어! 여기서 더 맞으면 진짜 죽는다고!"
내일 다시 극장에 가서 여자들과 노는 척하라는 록웰 부인의 말에 톰은 질색했다. 록웰 부인은 그런 아들을 열심히 달랬다.
“기사들이 지켜 줄 텐데 무슨 걱정이니. 그 못된 것 들은 너한테 손가락 하나 못 댈 거란다.”
“아, 몰라. 그냥 파혼하면 안 돼?"
“지금 파혼하면 네가 잘못한 게 되잖아. 엄마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거기서 가만히 있으면 돼, 응?"
”에이 씨, 다프네 그 계집애 때문에 이게 뭐야."
“다프네 개는 시집만 오면 끝이야. 다시는 반항을 못하게 엄마가 단단히 길을 들일 거야."
한참을 어르고 달랜 뒤에야 겨우 톰이 그렇게 하겠다고 동의했다.
* * *
다음 날, 록웰 부인은 가문의 모든 기사들을 불러 모아 극장 주변에 대기시켰다.
그녀 자신은 모든 일이 끝난 뒤에 등장할 생각으로 근처의 가게에서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십자매를 붙잡았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가서 어떻게 되고 있는지 알아보렴.”
초조하게 기다리던 록웰 부인은 혹시나 해서 자신의 시녀를 보냈다.
잠시 후. 새파랗게 질린 시녀가 돌아왔다.
"마님, 큰일 났습니다!"
시녀의 말을 듣고 밖으로 뛰쳐나간 록웰 부인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극장 주변에 대기시킨 기시들이 전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그들을 보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토, 톰은?! 우리 아들은 어디 있지?'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극장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톰을 발견했다. 낯익은 분홍 머리 여자가 몽둥이를 들고 이들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망나니 춤을 추고 있었다.
‘뭐, 뭐지?'
현란한 춤사위에 넋을 잃었던 록웰 부인은 짝짝 소리에 정선을 차렸다. 분홍 머리 여자에게 한눈을 파는 사이에 아들이 다른 여자들에게 뺨을 맞고 있었다.
"야! 고개 똑바로 안 들어?"
“이틀 연속으로 바람을 피운 놈이 뭘 잘했다고 울지?"
“아주 발정 났죠? 완전히 짐승 새끼죠?"
짜악, 짜악 소리가 경쾌하게 터질 때마다 아들의 머리가 이리저리 휘청거렸다. 록웰 부인이 눈을 부릅떴다.
"토 톰……!"
저도 모르게 소리친 순간, 여자들이 홱 고개를 돌렸다. 날카로운 눈빛이 몸을 찌르는 것 같았다. 록웰 부인은 저도 모르게 주춤했다.
"야, 들켰다. 튀자!"
망나니 춤을 추던 분홍 머리 여자가 휘두르던 몽둥이를 내리고 말했다. 그러자 여지들은 뒤도 안 돌아보고 우르르 도망치기 시작했다.
뜻밖의 상황에 록웰 부인은 황망하게 서서 눈을 깜빡거렸다. 그때 톰이 앞으로 픽 쓰러졌다.
"톰! 괜찮니?"
“어, 어허어영! 어엉! 내가 싫다고! 싫다고 했잖아! 안 한다고! 엉어어엉!"
얼굴이 찐빵처럼 퉁퉁 부어오른 톰이 통곡했다. 록웰 부인은 쩔쩔매며 아들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십자매를 붙잡진 못했지만 성과는 있었다. 그들의 수괴인 분홍 머리 여자의 정체를 알아낸 것이다.
"예? 엘마이어 공작 부인이요?"
“그분이 왜 아드님을 때리고 다닙니까? 무슨 관계가 있어서요?"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록웰 부인은 답답해서 미쳐 버릴 것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의 반용을 이해했다. 자신도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믿지 않았을 테니까.
"다프네가 공작 부인과 무슨 관계냐고요? 아무 관계도 없다는 걸 당신이 더 잘 알지 않습니까?"
빌러스 부인은 뭘 잘못 먹었냐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공작 부인이 다프네의 뒷배였으면, 톰이 지금까지 이렇게 까불 수나 있었겠어요?"
심지어 듣기 싫은 소리까지 덧붙였다. 록웰 부인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런데 그날, 엘마이어 공작가에서 공식적인 발표를 했다. 이블린이 직접 입을 연 것이다.
[다프네 양은 내 영혼의 자매이며, 나는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하든 지지한다. 다프네 양이 앞으로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도록 계속 지켜볼 것.]
표면적으로는 다프네와 톰의 다툼에 대해 자선의 의견을 밝힌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톰은 앞으로도 자신을 감시하며 두들겨 패겠다는 뜻이라는 걸 알았다. 그는 록웰 부인 앞에서 마구 토하면서 다프네와 파혼시켜 달라고 난동을 부렸다.
그때, 마치 때를 맞춘 것처럼 두 번째 중재자인 ‘레이디 로즈’의 협상안이 도착했다.
-톰 록웰은 다프네 빌러스의 방에 침입하려 한 잘못을 인정하고 그녀와 파혼할 것.
-다프네 빌러스는 톰 록웰의 치료비를 지급할 것.
얼마 전이라면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을 내용이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록웰 부인은 톰의 잘못 올 인정하되, 대외적으로는 밝히지 않는 조건으로 협상에 동의했다.
"뭐, 깽값 정도는 저희가 대신 물 수 있죠.“
빌러스 부인도 흔쾌히 협상안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빌러스 저택에 모여 합의문에 서명하기로 했다. 중재인인 ‘레이디 로즈'는 급한 일이 있다며 나타나지 않았고, 대신 자신의 자리에 장미 한 송이만 올려 놓았다.
치욕감에 부들부들 떨며 합의문에 서명한 록웰 부인은 빌러스 부인을 노려보며 말했다.
“우리 이들은 다행히 파혼하게 되었지만 그쪽이 참 걱정이네요. 이번 일을 보고 어떤 남자가 다프네 양과 결혼하려고 하겠어요?"
그녀의 악담에 피식 웃은 빌러스 부인이 합의문에 서명하며 답했다.
“우리 다프네가 엘마이어 공작 부인의 의자매라는 소문이 나서요. 자기 아들을 한 번만 만나 달라는 편지 가산더미처럼 쌓였답니다."
"······."
록웰 부인은 파르르 입술을 떨었다. 그녀는 더 이상 뭐라고 말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갔다.
빌러스 부인은 만족한 얼굴로 딸을 바라봤다.
“다프네, 레이디 로즈께 감사하다는 편지를 보내렴. 그리고 우리 빌러스 가문은 앞으로 목숨을 걸고 레이디 로즈께 충성하겠다고 전해 드려라.”
"네, 제가 꼭 전할게요."
다프네의 눈이 이블린에 대한 존경심으로 반짝거렸다.
이블린에게 도움을 청하자마자 모든 일이 순식간에 해결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다프네는 즉시 이블린에 대한 감사를 듬뿍 담아 길고 긴 편지를 썼다.
그리고 얼마 뒤, 이블린이 손수 쓴 답장이 돌아왔다.
[다프네 양, 제 협상안이 당신의 마음에 들었다니 정말 기쁘네요.
당신을 영혼의 자매로 생각한다는 말은 진심이었어요. 저는 빌러스의 충성심보다 당신의 우정을 원한답니다.
다프네 양만 괜찮다면 우리는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말인데, 계가 이번에 작은 렌탈 사업을 하나 구상하고 있어요. 거기에 다프네 양의 도움을 청하고 싶어요. 혹시 집에 남아도는 오빠가 하나 있다면 공작 가문에 대여해 주지 않겠어요?]
그렇게 해서 다프네의 오빠인 나일 빌러스는 ‘렌탈 나이트 1호'가 되어 공작가로 팔려 가게 되었다.
* * *
“왔네요? 만나서 반갑다는 말은 못 하겠지만."
세스 엘마이어는 면회실로 들어온 브란을 바라봤다. 처음 봤을 때는 마냥 어린에 같았는데, 이재 제법 소년티가 났다.
‘자세히 보니 얼굴이 닮았군.'
머리와 눈색이 달라 잘 느끼지 못했는데, 이렇게 보니 이블린과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한층 너그러워진 세스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군. 두 번이나 면회를 거절해서 강제로 끌어내야 하나 고민했거든."
“주변 정리를 좀 하느라고요.”
브란은 하나도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는 소년 특유의 치기 어린 얼굴로 세스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이야기를 끝내고 나서도 살아 있을지 별 자신이 없었거든요.”
"무슨 뜻이지?"
“그쪽한데 살해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문득동생이 사춘기라고 주장하던 이블린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말은 나한테 살해당할 만한 이야기를 할 거라는 소리인가?"
“어쩌면요.”
퉁명스러운 대답에 웃음이 나왔다. 입을 삐쭉이는 브란의 모습이 묘하게 이블린과 닮았기 때문이었다.
"죽이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마음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겠나?“
"죽이지 않는다고요?"
브란은 과연 그럴 수 있겠냐는 얼굴로 웃었다.
“내가 악마 소환자라고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