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 * *
다프네 빌러스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아가씨였다.
파티나 무도회보다 책을 읽는 것을 더 좋아하는 그녀는 자연스레 장미 정원에 푹 빠져 버리고 말았다.
다프네는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과 작은 모임을 만들고 매일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썼다. 한마디로 덕질을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약혼자인 톰 록웰은 달라진 다프네의 모습에 불만을 느꼈다. 그는 다프네가 요즘 자신에게 소홀해졌다며 투덜거렸다.
다프네는 그의 불평을 무시했다. 정확히는 덕질에 바빠서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그러자 톰은 한밤중에 창문을 따고 다프네의 방으로 침입하려 들었다.
"예? 범죄잖아요?"
"집에 틀어박힌 다프네가 걱정돼서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려 한 거라고 우기더구나.“
”와, 개소리를 대놓고 하네요?"
다행히 다프네는 책을 읽느라 늦게까지 깨어 있었고, 톰이 창문으로 기어 들어오든 모습을 발견했다. 놀란 그녀는 톰의 얼굴을 책 모서리로 찍어 버렸다.
균형을 잃은 톰은 2층에서 굴러 떨어져 팔이 부러졌다.
나는 안타까움에 한숨을 쉬었다.
‘팔이 아니라 다른 게 부러져야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자 록웰 가문은 다프네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톰에게 소홀했던 것과 톰의 팔을 부러뜨린 일에 대해 용서를 빌라는 것이다.
당연히 빌러스 가문은 펄쩍 뛰었다. 톰이 다프네의 방에 침입하려 한 것이 잘못이기에 오히려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특히 다프네의 엄마는 파혼을 주장 하고 있었다.
양쪽의 입장이 다르고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아서 결국 중재인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라리사 모어는 어떤 협상안을 내놨나요?"
"둘 다 잘못했으니 서로에게 사과하라고. 그리고 둘을 빨리 결혼시키면 문제가 없어질 거라고 했다더군.“
왕은 평소보다 무뚝뚝하게 말했다. 라리사의 협상안 이 못마땅한듯했다.
"음, 대놓고 남자 편을 들어 줬네요. 그런데 왜 록웰 가문에서 싫다고 거부한 거죠?"
"톰이라는 놈이 당장 유부남이 되고 싶지 않다고, 몇 년은 더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했다더구나.”
”······허?"
알고 보니 톰은 소문난 난봉꾼이었다.
그는 매일 극장에 드나들며 배우들에게 치근거렸고, 선인 배우가 들어올 때마다 제 정부가 되라고 강요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남들처럼 술집에 드나들지 않고 고오급 문화를 즐기는 교양인이라며 뽐내고 다녔다.
‘미친놈인가?'
다프네는 약혼자의 그런 점을 싫어해서 몇 번이고 점잖게 타일렀다. 하지만 톰은 약혼녀가 자기를 구속 하려 한다며 귀찮아했다.
“그래 놓고 약혼녀가 다른 곳에 관심을 쏟으니까 난리를 친 거네요?"
나는 마음대로 놀 거지만 너는 나 하나만 바라보라니. 징그러워서 소름이 돋았다. 나쁜 남자가 멋있는 건 역시 소설 속의 이야기였다.
"만약 다프네가 자고 있었고 톰이 창문으로 침입하는 데 성공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는 뻔하다.“
왕이 끔찍하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도 둘이 약혼 관계라는 이유로 별일도 아닌 듯이 이야기가 돌더구나. 솔직히 짐은 톰의 머리를 쪼개 버리고 싶다만…….”
“폐하.”
피오나의 만류에 흠흠 헛기침을 한 왕이 말을 이었다.
"왕명으로 둘을 파혼을 시키고 싶다만, 그랬다간 짐이 빌러스 가문만 싸고돈다는 말을 듣게 될 거다. 다프네의 평판 역시 안 좋아질 테고.”
분명 잘못을 저지른 것은 톰인데, 사람들은 다프네가 과잉 대응을 했다고 생각했다.
약혼자를 혼자 내버려 둔 것도 , 최근 사교 행사에 참석하지 않은 것도 다프네의 잘못이기에 톰이 그런 짓을 해도 정당하다는 것이다.
"톰은 계속 다프네에게 불성실했잖아요?"
"남자가 불성실한 것은 당연하고, 사교 행사엔 꼬박 꼬박 참석했으니 무죄라는 거지.“
결국 다프네는 자신을 걱정하는 약혼자를 창문에서 밀쳐 버린 못된 여자가 되었다.
그것이 사무치게 억울했던 그녀는 지푸라기라도 잡듯이 나한테 구원을 요청한 것이다.
“그런데 왜 엘마이어 공작 부인이 아니라 레이디 로즈를 중재자로 지정한 거죠?"
“너와 빌러스 가문은 아무 관계도 없잖으냐. 소개를 받으려고 해도 중간에 끼울 사람도 없고.”
그래서 다프네는 왕에게 레이디 로즈를 중재자로 원한다는 청원을 올린 것이다. 노빠구로 보이는 그녀의 행동은 사실 벼랑 끝에 몰렸다는 의미였다.
“이블린, 짐온 네가 이번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어렵다면 거절해도 된다. 라리사 모어도 실패한 일이니, 어떤 불이익도 없을 거다.”
"음, 우선 톰을 보고 견적을 뽑아 봐야겠지만 그렇게 어려울 것 같진 않은데요?"
내 대답에 왕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렵지 않다고?"
"네, 사흘 안에 파혼시키고 협상을 마무리 짓겠습니다."
“사흘?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데?"
“아뇨, 꼭 그러고 싶습니다!"
사흘 뒤엔 가출한 남편이 돌아올 예정이라 그전에 해결하고 싶었다.
"좋다, 짐은 이번에도 너를 믿으마."
"예, 폐하!"
나는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 였다. 빨리 해결해야 하니 이번엔 전통적으로 가 볼 생각이었다.
* * *
"레이디 로즈?"
라리사는 미간을 찡그렸다. 자신이 실패한 이후 누가 중재자가 될지 궁금했는데, 처음 듣는 이름이 나온 것이다.
“다프네 빌러스가 자선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라며 특별히 중재인으로 청했다고 합니다.”
얼굴에 흉터가 있는 시녀가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담담하게 고했다. 라리사가 피식 웃었다.
“우스꽝스러운 이름이네. 어디 촌구석에서 레이디 행세를 하던 여자인가 보지?"
내심 마음을 졸이던 그녀는 안심했다. 촌구석에서 온 여자가 이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리 없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중재에도 실패하면 자신이 내놓은 협상안 그대로 마무리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 록웰 가문을 새로운 후원자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고작 이런 일로 벌벌 떨게 되다니.'
경마 대회의 실패가 너무 치명적이었다.
라리사는 미치광이 풀 때문에 그리핀들이 미쳐 날뛰면 이블린의 위상도 추락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 사람들이 새로운 경마장으로 몰릴 테고, 자신 또한 사교계의 승리자가 될 거라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 달리 그리핀 런은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라리사와 호손 백작은 시류도 읽지 못하는 멍청이가 되어 버렸다. 라리사가 유행시키려던 패션도 시대에 따라가지 못하는 촌스러운 것으로 낙인찍혔다.
엄청난 손해를 입은 호손 백작은 라리사와의 관계를 끊어 버렸다. 결국 라리사는 새로운 후원자를 구하기 위해 록웰 가문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설 수밖에 없었다.
‘추잡한 놈, 내가 시킨 대로 했으면 벌써 문제가 해결됐을 텐데.’
라리사는 능글거리는 톰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주제도 모르고 제게 추파를 던지던 꼴이란.
레이디 로즈가 누구든, 무슨 수를 쓰든, 그놈을 만족 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그럼 결국 자선의 성공으로 일이 마무리될 터.
‘록웰 가문을 등에 업으면 사교계에 다시 진출할 수 있어. 승부는 그때부터지.’
이블린은 지금껏 정면 대결을 피해 왔다. 분명 사교계의 수 싸움에 자신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아무린 피해 봤자 소용없을 거야.'
지금까지는 그저 방심해서 당했을 뿐이었다. 정면으로 싸우면 백이면 백 자신이 이길 수 있었다.
“그날이 기대되네. 대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말이야."
라리사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 * *
"저놈 아냐? 저 뺀질거리는 놈.”
빨강 머리 카밀라가 내 옆에 찰싹 붙어서 속삭였다. 귀가 간지러웠던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아닌 것 같습니다. 머리 색도 다르고 하완이 좀 더 길어야 해요.”
드레스를 입고 여장한 핀이 침착하게 답했다. 솔직히 벌칙 게임 같을 줄 알았는데, 그렇게 끔찍해 보이진 않았다.
“아, 저 사람인 것 같아요!"
그때 다이애나가 극장에서 빠져나오는 한 남자를 가리켰다. 나는 서둘러 초상화를 확인했다. 초상화가 좀 더 미화되긴 했지만 톰이 맞는 것 같았다.
"저놈 저거, 팔 부러졌다더니 잘도 돌아다니네.“
여자까지 끼고 친구들과 시시덕거리는 모습을 보니, 다쳤다는 것도 거짓말이었던 모양이다.
“자, 갑시다!"
우리는 서둘러 잠복하고 있던 곳에서 뛰쳐나갔다. 아홉이나 되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 앞을 가로막자 톰이 당황해서 주춤거렸다.
“뭐, 뭐야?"
나는 놈의 옆구리에 끼여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를 힐끗 쳐다봤다. 아직 어린 얼굴에 짙은 화장을 한 것으로 봐서 극장의 선인 배우인 것 같았다.
"톰 록웰! 감히 내 동생을 두고 바람을 피워?!"
내가 짜랑짜랑 소리를 지르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멈춰 서서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 톰의 얼굴이 붉어졌다.
"당신은 누군데 나한테 소리를 지르는 겁니까?"
“나는 다프네의 첫째!I 언니다! 그리고 이 애들은 둘째, 셋째, 넷째,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 여덟째, 아홉 째 언니다!"
나는 순서대로 마리아, 카밀라, 다이애나, 앤, 벨라. 루시아, 여장한 핀과 테오를 가리켰다.
갑자기 등장한 아홉 언니들을 본 톰의 눈동자가 풍랑을 맞은 양 거세게 흔들렸다. 특히 지나치게 건장한 소녀, 테오를 보고 겁을 먹은 것 같았다.
옛날, 부여에는 십자매라는 아름다운 풍습이 있었는데. 여자 열 명이서 의자매를 맺고 바람피우는 남편을 서로서로 조지는 친목회였다.
나는 역사와 전통을 계승하는 대사를 던졌다.
“다프네를 배신해서 우리 십자매를 화나게 하다니, 각오는 되어 있겠지?"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앞으로 나선 테오가 우득우득 손마디를 꺾었다. 새파랗게 질린 톰은 비루한 목숨이라도 건지겠다고 발버둥을 쳤다.
“자, 잠깐! 다프네에겐 오빠만 있고 언니는 없는 것으로 압니다!"
“우리는 의자매다! 비 록 같은 넒에 태어나진 않지만 같은 날에 축자고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맹세를 했다!"
“아니, 그게 무슨…….”
톰이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 카밀라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언니, 현장을 잡았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해? 당장 저 새끼를 쳐!"
“대지의 심판!"
다짜고짜 앞으로 튀어 나간 루시아가 빨랫방망이를 휘둘렀다. 불시에 옆구리를 맞은 톰이 악 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밟아!”
우리는 후다닥 뛰어나가서 톰을 밟기 시작했다. 사람이 워낙 많다 보니 톰은 저항도 못 하고 그대로 밟혔다.
“까악!”
“이, 이러지 마십시오!"
눈치 빠른 여자는 그대로 달아났고, 톰의 친구들이 허우적허우적 말리려고 들었다. 나는 스윽 고개를 돌려 그런 그들을 쳐다봤다.
“그럼 너희가 대신 밟힐래?”
"······."
그들은 조용히 사라졌다. 나는 자진모리장단으로 톰을 밟으며 조상의 얼을 계승하는 기쁨을 느꼈다.
"더 때리면 죽어.“
테오의 경고에 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발을 멈췄다. 그리고 트럭에 깔린 꼴뚜기처럼 늘어져 있는 톰에게 경고를 날렸다.
“앞으로 조신하게 살면 여기서 끝내겠다. 하지만 또 다시 바람을 피우면 너를 찾을 것이다. 찾아서 죽일 것이다."
우리는 유유히 현장을 벗어났다. 아무도 우리를 붙잡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톰의 앞으로 ‘행실 똑바로 하고 살아.'라는 쪽지를 넣은 꽃다발을 보냈다.
톰이 며칠 만에 파혼을 할지 참 기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