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 * *
카스티야 왕의 충성스러운 신하, 비토리오 후작은 왕이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입궁했다.
반역자들은 곧바로 제압당했지만, 왕이 어떤 상태인 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비토리오가 이렇게 서두르는 것도 왕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필 이런 흉흉한 때에…….'
얼마 전 신성 왕국에서 돌아온 배엔 끔찍한 것이 실려 있었다.
살아 있는 시체.
죽지도 살지도 못한 그것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비명을 질러 댔다.
시체를 배에 실어 온 선원들은 왕이 대지신의 저주를 받았다고 떠들었다. 선원들을 죽여 입을 다물게 했지만, 소문은 이미 들불처럼 번진 후였다.
사람들은 계속되는 가뭄과 병충해 역시 왕이 대지신 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떠들고 있었다.
‘이러다 반란이 일어날지도 모르겠군.'
비토리오는 깊은 불안감을 느꼈다.
7년 전쟁의 패배로 인해 카스티야는 내리막을 걷는 중이었다. 왕은 어리고 몸이 약해서 국정을 잘 돌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런 왕이라고 해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지금 왕이 죽으면 왕위를 차지하려는 대귀족들 사이에서 내전이 터질 테니.'
왕의 침실에 도착한 비토리오는 떨리는 마음으로 알현을 청했다. 잠시 후, 침실의 문이 열렸다.
“후작, 그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의자에 기대 뭔가를 들여다보던 왕이 그를 맞이했다. 다행히 상처 하나 없는 모습이었다. 혈색이 도는 뺨은 전보다 건강해 보이기까지 했다. 안심한 비토리오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폐하, 역도들을 막지 못한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게 어디 후작의 잘못인가."
너그럽게 대꾸한 왕이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킨 비토리오는 왕이 내미는 것을 받았다.
"어때 보이나?"
그것은 어떤 여자의 초상화였다. 그녀는 높게 틀어 올린 분홍색 미리 위에 작은 티아라를 쓰고 있었다.
커다란 눈과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 장난스러운 표정이 귀족다운 위엄이나 우아함보다는 싱그러운 활기를 느끼게 했다.
”폐하께서 마음에 두신 분입니까?"
소년인 왕의 또래는 아니지만 제법 어려 보이는 여자였다. 왕의 정부가 되기엔 모자람이 없었다.
“이블린 엘마이어 공작 부인 아스트리아 왕이 보물처럼 아끼는 여자지.”
"예?!“
놀란 비토리오는 초상화를 집어 던질 뻔했다.
적국인 아스트리아, 그것도 숙적인 은사자의 아내라니. 왕의 취향이 참 고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작, 그녀는 참으로 대단한 여자야. 신과 정령의 사랑을 받으며 수많은 신수들을 거느리고 있지. 내가 오랫동안 공들여 온 계획도 모두 그녀에게 가로막혔고.”
"······.“
“아무리 생각해도 은사자 따위에겐 아까워. 그래서 나는 그녀를 손에 넣을 생각이야."
비토리오는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몰라 눈을 내리깔았다. 이런 시기에 여자 타령이나 하는 왕을 보자 어쩔 수 없는 실망감이 들었다.
"후작, 내가 엘마이어 공작 부인을 만날 수 있게 도와주겠나?"
”폐하······."
비토리오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기대감을 가득 담고 자산을 바라보는 왕의 눈을 보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든 하겠습니다.”
“그래?”
소년답게 씩 웃은 왕이 한 손을 내밀었다. 무슨 뜻인지 몰라 머뭇거리던 비토리오는 이내 조심스럽게 왕의 손을 받들었다.
바로그때였다.
“컥!"
번개와 같은 충격이 비토리오를 꿰뚫었다. 갑자기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라는 사람을 구성하는 모든 것 들이 액체가 되어 흘러내리는 느낌이었다.
”으…… 으어어어……!"
꺽꺽거리며 경련하는 그를 차갑게 바라보던 왕이 눈을 감았다.
잠시 후, 혈색이 사라진 왕의 몸이 옆으로 픽 쓰러졌다. 힘없이 널브러진 몸이 꼭 매미가 벗어 던진 허물처럼 보였다.
"후!"
그리고 비토리오가 눈을 떴다. 제 손을 쥐었다 폈다 해 본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역시 성인의 몸이 움직이기 편하군.”
이리저리 움직이던 그가 책상 위의 종을 흔들었다. 그러자 무표정한 얼굴의 시종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이 몸뚱이는 계속 숨겨 두고 관리해라. 다음에도 써 야할지 모르니까.”
비토리오가 쓰러진 왕을 가리켰다. 그에게 지배당하는 시종들은 아무 말 없이 왕의 몸을 들고 사라졌다.
새로운 몸에 적용할 때까지 계속 움직이던 비토리오는 마침내 제자리에 멈췄다. 하지만 그의 얼굴엔 미미 한불만이 섞여 있었다.
“흡수한 에너지가 적어서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군.”
새로운 몸으로 갈아타는 것에도, 상대를 지배하는 것에도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다.
원래 그는 시종이나 귀족들에게서 조금씩 에너지를 흡수했다. 몇 십 년 동안 차곡차곡 에너지를 모아서 다음 몸으로 옮겨 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급하게 에너지를 모아야 했다. 아스트리아까지 이동할 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귀족들에게 왕을 습격하려 했다는 누명을 씌우고 그들의 생명을 빨아먹었다.
거의 백에 가까운 숫자를 잡아먹었지만 아직 몸을 지배할 에너지가 부족했다. 그래도 아스트리아까지 가는 동안은 그럭저럭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곧 만나게 되겠군. 이블린."
이블린의 초상화를 쓰다듬은 그가 침실을 나섰다.
* * *
그것이 카스티야 왕의 몸을 벗어 던진 것은 이블린 때문이었다.
아스트리아와 나바르에 펼쳐 둔 계획이 실패하고, 아이오나가 죽고, 대신관과 페르난, 그리고 공들여 키운 독인들까지 모두 잃었다.
그 모든 일에 이블린 엘마이어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안 그것은 전율했다. 그리고 그녀가 대지신을 소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는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
‘갖고 싶다.'
막강한 힘을 가진 이블린의 몸을 가지고 싶었다. 신을 불러들이고 신수를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제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사도라면 내가 차지할 수 없겠지.'
그렇게 결코 가질 수 없는 몸을 상상하며 탐욕을 불태우고 있을 때였다.
이블린 엘마이어가 자신은 사도가 아니라고 부정했다는 소식 이 들려왔다. 대지의 신전에서 그녀를 대지신의 사도라고 떠받들자 아니라고 대응한 것이다.
‘사도가 아니라고? 어떻게 아닐 수가 있지?'
그것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사도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자신이 모시는 신을 부정하는 행위와 다름없으니까.
‘정말로 아니라는 건가?'
그것은 필사적으로 이블린에 대한 정보를 긁어모았다. 그리고 그녀가 천공신의 신녀이자, 정령수의 구원자이며, 불의 무녀와 물의 신전과도 관계가 깊다는 사 실을 알게 되었다.
모든 선의 사랑을 받지만 어느 신에게도 속하지 않는 존재. 그게 바로 이블린이었다.
그리고 그녀가신의 것이 아니라면 그것에게도 기회가 있었다. 이블린의 몸을 빼앗을 기회가.
‘이블린 당신은 꼭 나를 위해 준비된 선물 같군.’
그것은 왕의 몸을 버리고 이날』린의 몸으로 옮겨 가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카스티야의 힘으로는 아스트리아를 흡수할 수 없어."
그러니 차라리 아스트리아의 왕이 된 후에 카스티야를 흡수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블린의 몸을 차지한다면 그 모든 과정이 손쉬워졌다. 그녀와 은사자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아스트리아의 왕이 될 테니까.
‘이블린 엘마이어의 능력을 흡수한 다음 은사자의 아이를 낳아서 그 몸으로 옮겨 가면 돼.'
그럼 그것은 아스트리아와 카스티야를 지배하는 황제가 될 것이다. 이렇게 쉬운 방법을 두고 지금까지 빙빙 돌아왔다니.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하긴, 은사자가 아내를 들일 줄은 몰랐으니까.”
세스 엘마이어는 끈질기고 귀찮은 적이었다.
그 몸을 빼앗아 아스트리아의 왕좌를 차지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놈의 영혼은 대지신의 소유였다. 그것의 힘으로는 놈의 몸을 빼앗을 수가 없었다.
‘쓸모없는 놈 따윈 빨리 좀 죽어 줬음 좋으련만.'
놈은 끈질기게 버티며 발악했다. 하지만 귀찮은 방해물에 불과하던 놈이 아내를 들이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너와 네 자식이 나를 아스트리아의 왕좌로 이끌겠군.’
씨익 웃은 그것은 아스트리아로 향하는 걸음을 서둘렀다. 이블린의 몸으로 옮겨 갈 에너지를 얻기 위해 보이는 모든 인간들을 잡아먹으면서.
* * *
남편이 가출했다. 복실이와 코코를 데리고.
사흘 정도 걸릴 거야. 아이들이 엄마에게도 동생이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기에 데려가기로 했어.
복실이는 엄마의 동생도 코코처럼 까마귀라고 생각 하는 것 같아. 외삼촌을 만났을 때의 반응이 좀 궁금해.
귀여운 조카들을 보면 학업에 시달리는 동생의 기분도 좀 나아지지 않을까? 어떻게 생각해?
깨어날 때까지 옆에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한 세스가
나는 세스가 남긴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며 배신감을 불태웠다. 자식 키워 봤자 소용없다더니, 어떻게 나만 내버려 두고 셋이서 가출할 수가 있지?
"김세스, 이 거짓말쟁이.”
믿을 수 없는 것이 남자의 마음이라더니. 내 감언이 설을 듣고도 몰래 나가 버려?
돌아오기만 해 봐라. 가출 청소년 김복실, 김코코와 함께 혼쭐을 내 줄 테다.
물론 이래 봤자 돌아온 셋을 보면 헤벌쭉할 나를 알기에 마음속으로만 속삭였다.
“어휴, 진짜. 쳇 다 자기가 예쁜 건 알아 가지고.”
투덜거리며 할 수 없이 혼자만의 휴가를 가지려고 하는데, 바쁘지 않으면 입궁 좀 하라는 왕의 전갈이 도착했다. 마침 한가로웠던 나는 옷을 갈아입고 곧바로 궁으로 이동했다. 왕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용건을 말했다.
"레이디 로즈에게 중재 요청이 들어왔다."
"예?"
레이디 로즈는 내 가명인데? 중재 요청은 또 뭐지?
다행히 왕은 나를 괴롭히지 않고 곧장 설명을 덧붙였다.
"원래 가문끼리 갈등이 생겼는데 해결 방법이 없을 때. 사교계의 명사를 중재인으로 정하고 협상을 부탁 하게 된다. 그런데 너를 중재인으로 지정한 사람이 있다."
"네? 누가요?"
내 물음에 시녀장인 피오나가 대산 답해 주었다.
“빌러스 가문의 다프네 양입니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나를 레이디 로즈라고 부른다면 분명 장미 정원의 회원일 것이다.
"폐하께선 제가 요청을 받아들이길 바라시나요?"
"완벽하게 협상을 마무리해 줬으면 좋겠구나.”
무슨 일인지도 모르는데 왕의 기대가 몹시 높았다. 내가 부담스러워한다고 생각했는지, 피오나가 격려의 말을 덧붙였다.
“협상에 실패해도 불이익은 없을 겁니다. 이미 처음 지정된 중재인이 실패한 뒤니까요.”
“제 이전에도 중재인이 있었어요?"
"상대 가문 쪽에서 라리사 모어를 중재인으로 지정 했습니다. 하지만 라리사 모어가 내놓은 협상안은 양쪽 모두를 만족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빌러스 가문의 차례가 된 거죠.”
라리사가 대체 뭐라고 했기에 양쪽에서 다 싫다고 한 건지 좀 궁금했다.
왕이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이블린 너는 지금 사교계를 주름잡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공식적인 명성은 아직 손에 넣지 못했다.”
딱히 명성을 노렸던 것이 아니기에 할 말이 없었다. 공식적인 자리에는 아버님을 대신 내보내고 있고.
“하지만 네가 이번 중재에 성공한다면 라리사를 완전히 밀어내고 사교계의 명사로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왕의 눈빛에 뺨을 긁적인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그런데 다프네 양이 무슨 일로 중재를 요청하는지 여쭤봐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