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나는 편지를 본 순간 깨달았다.
드디어 왔구나. 호르몬 팡팡 나오는 사춘기가.
“아니, 브란이 자식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멀쩡한 지 누나를 죽여? 너무 어이가 없어서 표정 관리가 안 되었다.
"세스, 너무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애들에겐 다 이런 시기가 있거든요.“
”……이런 시기?"
"네,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정선 나간망아지 같은 상태죠.“
조용히 지나가길 빌었는데 브란은 그걸 좀 세게 겪는 모양이었다. 부모님은 죽고 누나인 나와는 뚝 떨어진 상태니, 중2병이 아니라 중2암이 와도 이해는 된다.
“아마 시험 따위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애꿎은 매형이나 잡아 족치자는 야심을 품은 것 같은데,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하필 세스가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해야 나를 만나게 해 준다고 도발한 참이었다. 공부하다 눈이 돌아서 이런 편지를 보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당신 말은, 이 편지 내용이 거짓이라고?"
"물론 브란은 아주 진지하게 썼을걸요. 그렇다고 진심으로 받아들이지는 말아요. 그냥 애가 크는 중이라고 생각하고 이해해 줘요.“
아주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이라는 뜻을 전하자 세스가 애매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이번 기회에 동생을 보면 좋지 않아?"
"공작 부인으로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제가 학업 스트레스로 썩어 가는 동생을 만나서 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음.”
뭐라고 해도 기만이다. 나도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지만 그걸 이해해 달라고 하기엔 브란이 너무 어렸다.
“지금 가서 소란을 피우는 것보다 학기 끝나고 방학 때 데려와서 족치는 게 나올 것 같아요.”
괜히 먹이를 줬다간 학기 내내 ‘크흐흐, 이 세상은 썩었어!’라는 편지를 받게 될 수도 있다. 안 그래도 바쁜 세스가 내 동생의 사춘기에 시달리게 할 수는 없었다.
"세스, 여기 좀 앉아 봐요.”
나는 세스를 끌어다 내 옆에 앉혔다. 피로 때문인지 청순한 얼굴이 약간 수척해져 있었다.
“제 동생 때문에 이렇게 무리한 거예요?"
“아니. 좀 신경 쓰이는 문제가 있었어.”
“그게 아까 말한 제 사명과 관련 있어요?"
갑자기 입을 꾹 다무는 세스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히죽거리는 나를 본 세스가 한숨을 쉬었다.
“이비, 난 심각해.”
“하지만 세스를 보고 있으니까 너무 좋은걸요?"
뻔뻔한 내 대답에 당황하던 세스가 몸을 숙였다. 이마에 닿는 입술에 얼떨떨한 표정을 짓자 성긋 웃은 그가 속삭였다.
“조금만 진지하게 들어 줘.”
나는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응, 우리 세스하고 싶은 거 다해.
“대지신께서 당신에게 사명이 있다는 신탁을 내리신 뒤로 계속 고민했어.”
세스는 신탁을 들었을 때에 내 머리 뒤로 검은색의 둥근 빛이 생겼다는 것, 그리고 내가 세스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 거기에 불안감을 느끼고 브란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것까지 말해 주었다.
그런데 브란이 내가 몇 번이나 죽었냐는 답장으로 세스를 혼란에 빠트린 모양이다.
‘그냥 다 우연인 것 같은데?'
내 머리 뒤에 생긴 빛은 그냥 대지산의 서비스일 가능성이 높았다. 세계수도 무지개와 비둘기 세트를 보냈었는데, 아무효과도 없는 장식이었거든.
또 그때의 나는 지하실에 있을 때의 기억이 떠올라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세스를 못 알아보는 게 아니라 아예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정령수가 부활할 때도, 대마법사 아이오나와 싸울 때도, 내가 너무 늦어서 당신을 지키지 못했어.”
브란의 편지로 충격을 받은 세스는 내가 빈사 상태가 된 것이 아니라 죽었다가 다시 부활한 게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다.
"음, 아무리 생각해도 죽은 건 아닌 것 같은데요?"
“그래?"
정령수 때는 늑대 형제들의 도움을 받았고, 아이오나 때는 코코가 나를 구해 주러 왔다.
내가 계속 부활하는 좀비라면 힘들게 저승의 가시밭길을 걷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국, 우연이 재차 겹쳤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그런데 저한테 어떤 사명이 있어서 죽어도 다시 부활한다면 오히려 좋은 거 아니에요?"
“사명을 마친 사도는 더 이상 지상에 머무르지 않으니까.”
철 지난 배추흰나비처럼 죽나 보군. 내가 사도가 아니라서 정말다행이다.
“그리고 당신이 나를 잊을까봐 두려웠어. 기억을 잃은 당신은 나를 좋아하지 않을 데니까.”
“왜요?"
세스의 푸른 눈동자가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이비, 내가 배에서 당신을 구출한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그래도 당선이 날 좋아해 줬을까?"
"네? 당연하잖아요.“
단호한 내 대답에 세스의 눈이 흔들렸다. 아니, 저 얼굴에 저 몸매를 가지고 왜 이렇게 자신감이 없지?
아무래도 아버님께 불꽃 효도를 한 번 더 하고 와야 할 것 같았다.
“전 죽었다가 부활해도, 기억을 전부 다 잃어도, 다시 세스를 좋아할걸요?”
“그걸 어떻게 확신해?"
불신이 가독 담긴 물음에 나는 실없이 웃었다.
“세스, 저 세스를 좋아하지 않으려고 진짜 진짜 노력 한 거 알아요?”
”뭐?”
“세스는 신분도 엄청 높고, 어마어마한 부자고, 능력 있고, 저보다 어른스럽잖아요. 그런 사람을 좋아하면 저만 상처받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매일 밤 황금색 강아지 그림을 꺼내 보면서 내 주제를 되새겼고, 세스가 내게 인간적인 호의를 건넬 때마 다 머리를 비우고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진짜 노력했는데, 그래도 소용없더라고요. 정선을 차려 보니까 당신이라는 사람이 제 안에 차곡차곡 스며 들어와 있어서 이거 정말 큰일 났구나 했거든요.“
쌍방 통행이었으니 망정이지, 나 혼자 눈물 질질 짜면서 드라마 하나 찍을 뻔했다.
“그런데 기억을 잃은 저는 아무런 경계도 노력도 안 할 데니 다시 세스에게 퐁당 빠지겠죠, 뭐.”
"······."
다음 순간 나는 아주 진귀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 손으로 가리긴 했지만, 세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던 것이다. 언제나 귀 끝만 빨개지던 남자가 홍당무처럼 변한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니 당황하던 세스가 내 어깨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당신은 정말…….”
“네? 너무 좋아요? 귀여워요? 아니면 예뻐요?"
뻔뻔하게 듣고 싶은 말을 늘어놓자 세스가 웃었다.
“나를 취하게 만들어.”
뭐, 뭐지? 이 애매한 칭찬은? 독하다는 건가?
당황해서 눈을 굴리는 순간 고개를 든 세스가 부드럽게 입을 맞춰 왔다. 입술이 닿는 순간 심장이 터질 뻔했다. 세스가 느끼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나를 토네이도처럼 휩쓸고 지나갔다.
다음 순간, 나는 긴 의자에서 눈을 떴다. 까무룩 기절한 나를 세스가 여기 눕혀 둔 모양이었다.
“미안, 감정 조절을 못 했어.”
세스가 죄책감 어린 얼굴로 사과했다. 여전히 알딸딸했던 나는 눈을 깜빡였다.
“어, 세스 그거 같아요.”
“그거?"
”······산삼주?"
귀하고 독한 술 이름을 말하고 싶은데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기억이 잘 안 난다.
“아니다, 당근인가?"
”응?"
내가 취해서 제정신이 아닌 것을 알아챈 세스가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단번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히히 웃었다.
“대지신께서 저한데 시킬 일이 있는데, 안 할 것 같으니까 세스를 코앞에서 이렇게 흔들잖아요. ‘먹고 싶지? 그럼 일해라!’하고요. 그러니까 당근.”
“그래서 내가 당근이야?"
“응.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는 아직 모르지만, 끝내면 당근을 준다고 약속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졸음이 몰려와서 작게 하품을 하자 세스가 내 어깨를 토닥거렸다.
"피곤하면 자도 돼. 방까지 데려다줄게.”
"으응······."
나는 제대로 된 대답도 못 하고 곧바로 잠들었다.
* * *
세스는 잠든 이블린의 뺨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안개처럼 흐트러진 분홍색 머리카락과 거기 둘러싸인 얼굴이, 그를 붙잡고 있는 손이, 눈에 담기는 모든 것들이 숨이 막힐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나도 그래, 이비.”
기억을 잃는다고 해도,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그녀를 좋아하게 될 것이다.
겉옷을 벗어 이블린을 감싼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 올렸다. 작게 뒤척이던 이블린이 다시 잠들었다.
이블린을 안고 집무실로 돌아온 세스가 허공을 향해 속삭였다.
“모리스, 아카데미로 가야겠다. 지금 당장 준비하도록.”
그의 직감은 이블린의 동생인 브랜든 그란을 만나 그가 아는 사실을 들어 봐야 한다고 속삭였다.
‘당신이 알면 회를 내겠지.'
하지만 이블린을 위험하게 할 조그마한 가능성도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세스는 다시 조심스럽게 이블 린을 안고 걸음을 옮겼다.
* * *
빛의 창의 주인, 말라크는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부러진 창의 반쪽이 담겨 있었다.
‘무대 한가운데에서 춤을 추기만 하면 창을 준다고 해서 거짓말일 줄 알았는데…….'
춤을 췄다고 진짜 신기를 던져 주다니. 이블린의 엄청난 배포에 정신이 다 얼얼해질 지경이었다.
물론 무대에 오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몸과 마음이 가루가 될 정도로 갈리고 또 갈렸다. 수치심과
자존심 따위는 흔적도 남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껏 말라크가 걸어온 길을 생각하면 그 정도의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말라크는 조심스럽게 창의 반쪽에 손을 갖다 댔다. 하지만 창에선 아무런 반용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럴 거라고 예상했지만 절로 실망하는 마음이 들었다.
“나머지 반쪽은 다른 주인을 선택할 수도 있잖아요? 쌍둥이 중 첫째가 당선을 좋아한다고 해서, 둘째도 그럴 거라고 믿는 이유가 궁금해서요.”
“그건······."
"둘을 합친다고 해도 마찬가지예요. 온전해진 빛의 창이 당신을 선택할 거라고 어떻게 확신해요?“
결국, 이블린의 말이 옳았던 것이다. 그는 허탈한 마음으로 손을 뗐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온전해진 빛의 창을 공국에 갖다 바치고 쫓겨나는 것밖에 없나?'
안 그래도 공국은 수인족 혼혈인 말라크가 신기의 선택을 받았다는 사실을 못 마땅해했다. 온전해진 창을 손에 넣으면 말라크를 쫓아내고 그럴싸한 주인을 세우려 할 것이다.
그렇다고 빛의 창을 들고 달아나면 죽을 때까지 공국의 추격에 쫓길 것이다. 공국의 미움을 사면서까지 그를 보호해 줄 사람은 없을 테니까.
‘아니, 한 사람 있기는 하지. '
공국의 기둥뿌리를 뽑아다가 자기 사업을 세워 버린 무시무시한 여자가. 고녀라면 공국이 악을 써도 눈도 깜빡하지 않고 무시할 것 같았다.
"차라리 여기 눌러앉을까?"
-우우웅!
탄식하듯 중얼거린 순간, 빛의 창이 진동했다. 상자 속의 창은 물론 그가 갖고 있는 창까지.
"뭐, 뭐야!"
놀란 말라크가 뒤로 물러섰다. 순간 그의 등에서 빠져나온 신기가 자신의 반쪽을 향해 날아갔다.
허공으로 떠오른 두 조각들이 순식간에 하나로 합쳐졌다. 그리고 온전해진 빛의 창이 말라크 앞으로 다가 왔다. 마치 어서 자신을 잡으라는 것처럼.
꿈에서도 그리던 순간이었지만, 말라크는 기뻐하지 못했다. 그는 떨리는 눈으로 빛의 창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 설마······ 이블린 엘마이어의 옆에 붙어 있으려고 나를 선택한 거야?"
둥실둥실 허공에 떠다니던 창이 부끄러운 것처럼 몸을 비비 꼬았다. 믿었던 신기가 자신을 이용하려 드는 상황에 말라크는 짙은 배신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