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이름을 부르는 순간 라리사가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절로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엾은 모습이었다.
“아, 아버지. 절 좀 도와주세요.”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인 라리사가 케인의 소매를 붙잡았다. 커다란 갈색 눈동자가 호소하듯 그를 바라봤다.
케인은 라리사의 이런 모습에 약했다. 그녀가 이렇게 애원하며 붙잡으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아버지, 제발 그자와 파혼하게 해주세요. 그자가 저를 죽이려고 했어요. 왕자님이 구해 주지 않으셨다면 이렇게 아버지를 보러 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아버지, 항구를 열어 주세요. 제가 수도로 돌아가려면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해요. 저 이러다 정말 죽을 것 같아요. 이런 구석진 영지에서 계속 살고 싶지 않아요.”
때로는 반역죄가 될 법한 위험한 요구도 있었지만, 차마 거부할 수가 없었다.
라리사는 불쌍하고 가여운 아이였으니까.
가끔씩 보이는 독한 모습도 제 것을 빼앗긴 것에 대한 분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녀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고 싶었다.
‘하지만······.'
진실을 알게 되어서일까. 울먹이는 아이의 얼굴을 봐도 마음이 담담했다. 어쩌면 그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뒤여서인지도 모른다.
“얘야, 이 아비는 너를 도와줄· 수가 없다.”
케인은 지금 프리지어 궁에 빌붙어서 살고 있는 처지였다. 뒤따르던 가신들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돌아갈 저택마저 이블린에게 넘어간 뒤였다. 누구를 돕기는커녕 그가 도와 달라고 손을 벌려야 할 상황이었다.
"······아버지?"
라리사가 몹시 당황한 듯이 눈을 깜빡였다. 그가 거절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것 같았다.
“너도 소문을 들어 알지 않니. 내겐 이제 시종 하나, 인장 반지 하나 남지 않았다. 완전히 빈털터리 신세야.”
케인은 담담하게 사실을 고하며 라리사의 반응을 살폈다. 사실 그는 라리사를 어떻게 대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그녀가 자신을 속인 자들과 한패인지, 그와 같은 피해자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리사의 대답을 듣고 결론을 내릴 생각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아비로 생각하는지, 아니면 단순히 이용해야 할 상대로 여기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도 충분히 들어주실 수 있는 일이에요.”
애교 섞인 대답 속에 그에 대한 걱정은 한 톨도 없었다. 하다못해 지금 어떻게 지내시냐는 물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예상은 했지만 입이 썼다.
“무슨 일이기에?”
“사교계에서 은퇴해 주세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케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라리사는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여기서 이러실수록 제가 힘들어져요. 아시잖아요. 지금 상황이 정상이 아니라는 걸요.”
"······."
“모두가 뒤에서 아버지를 욕해요. 나이 많은 사람이 주책없이 끼면 안 되는 자리도 구분하지 못한다고요. 저는 그럴 때마다 가슴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어요.”
라리사는 그를 정말 걱정해서 말하는 것처럼 눈시울을 붉혔다. 그럴수록 케인의 마음은 싸늘하게 식어 갔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내가 주책이라고?"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전 지금 제가 설 자리가 없다고 말씀드리고 있는 거예요.”
하지만 그 말과 달리 라리사의 눈은 그렇다고 말하고 있었다. 방해꾼을 바라보는 냉담함마저 느껴졌다.
참고 있던 숨을 토한 케인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구나. 그 부탁은 들어줄 수 없다."
“아버지!"
돌아서려는 그를 다급히 붙잡은 라리사가 목소리를 높였다.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요. 은퇴가 싫으시면 그냥 몇 달 정도 아프다고 집에 누워 계세요. 그럼 제가 사교계에서 자리 잡을 수 있어요. 그 간단한 것도 못 들어주세요?"
원망 섞인 그녀의 눈빛에 케인은 허허 웃었다.
“나는 지금까지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뭐든 해 줬다. 이제 충분히 할 만큼 한 것 같구나."
"저를 이렇게 만든 건 아버지잖아요!"
라리사의 얼굴에 독기가 서렸다. 멈칫한 케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다. 나는 형편없는 남편이고 아버지였지. 너에게도 결코 좋은 아비는 아니었다.”
형편없는 아버지는 아주 순화된 말이었다. 이블린은 대놓고 케인을 가정 폭력범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결코 그를 세스와 함께 두지 않았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한자리에 있으면 안 된다면서. 당연히 그는 가족 행사에도 참석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가족이 될 수 없는' 선이 그어진 뒤에야 케인은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 가고 있었다.
“그걸 알면 저한테 더 잘해 주셔야 하잖아요!"
“아니, 내 그런 점이 너를 더 망쳤기에 더 이상은 돕지 않을 거다.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아버지!"
악귀처럼 일그러진 라리사의 얼굴을 바라보던 케인이 진지하게 말했다.
“얘야, 지금까지의 정을 봐서 충고하마. 이블린, 그 애와 싸우지 말거라. 너는 절대 내 며느리를 못 이긴다."
”······뭐라고?!"
“지금 갖고 있는 것이라도 잃고 싶지 않다면 어서 도망쳐라.”
진심을 담은 충고를 건넨 케인이 돌아섰다.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를 부르던 라리사가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결코 돌아보지 않았다.
"큰 주인님, 어서 마차에 타십시오.”
어느새 온 공작가의 마차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케인은 시종의 정중한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 올랐다. 문을 닫기 전에 시종이 빙긋 웃으며 속삭였다.
"잘 선택하셨습니다.“
"······."
순간 케인은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여기서 틀린 답을 골랐다면, 이블린의 추종자들에 의해 산 채로 야산에 파묻혔을 것 같다고.
* * *
‘그리핀 런’을 성공적으로 마친 나는 오랜만에 여유로워졌다. 그리고 남아도는 시간을 내조 대왕님께 야무지게 쓸 생각이었다.
하지만 우리 대왕님이 너무 바빴다. 어느 정도냐면 새벽에 운동하고 아침밥을 먹은 다음에는 밤늦게까지 집무실에 붙어 있을 정도였다.
”으아아! 고3도 이렇게까지 열심히 안 하겠다!"
사실 모든 귀족들이 세스처럼 열심히 일하진 않았다.
대부분은 관리인에게 영지를 맡겨 놓고 팽팽 놀았다. 1년에 한 번씩 올라오는 영지의 장부조차 부하에게 대신 검토시키는 것이 보통이었다.
즉 귀족 이즈 놈팡이인 것이다.
죽창을 소환하고 싶은 이 대나무밭 속에서 오직 세스만 소처럼 일하고 있었다.
"안 되겠어, 뭔가 하지 않으면!"
세스가 돌아오길 기다리던 나는 결국 벌떡 일어났다. 이러다가 귀한 남편 얼굴도 몇 번 못 보고 휴가가 끝나버릴 것 같았다.
‘먹이로 방해꾼들을 유인한다!'
나는 회살 맞은 토끼처럼 주방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주방장을 들들 볶아 가며 음식으로 바구니 두 개를 꽉 채운 다음 세스의 집무실로 쳐들어갔다.
"여러분!"
벌컥 문을 열고 사자후를 지르자 서류 사이에서 발효되던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자신 있게 바구니 하나를 내밀며 소리쳤다.
“간식 드시고 하시죠!"
“우워어어!"
좀비처럼 벌떡벌떡 일어선 사람들이 순식간에 바구니를 받아서 사라졌다. 홀로 남은 세스가 황망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이비?"
"많이 바빠요? 세스 몫도 있는데?"
나는 남은 바구니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이거 같이 쪼아 먹자는 권유에 자리에서 일어선 세스가 웃었다.
“바쁘다고 하면 그걸로 날 때릴 것 같군.”
“세스, 전 미남 애호가예요. 그리고 미남은 꽃으로도 때리면 안 된다고 천부인권에 적혀 있습니다.”
“……당신이 말하면 꼭 진심 같아."
당연히 진심이다. 나는 슬금슬금 세스에게 접근했다.
“요즘 저 때문에 바쁜 거예요?"
사실 마리아의 이야기를 듣고 줄곧 신경 쓰였다. 세스가 전보다 더 바빠 보이는 게 혹시 나 때문인가 하고.
“당신 때문에?"
하지만 의아해하는 세스를 보니 잘못 짚은 것 같았다. 머쓱해진 나는 서둘러 변명했다.
"요즘 제가 사업을 많이 벌였잖아요. 그걸 지키느라 인원이 많이 빈 것 같아서요. 백탑주랑 그레이들도 안 보이고.”
하루에 세 번 정령수에 대고 절하는 애들이 갑자기 안 보이면 싫어도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그쪽에게 보안을 맡기긴 했지만, 내가 바쁜 건 다른 이유 때문이야.”
내 손에서 바구니를 받아 든 세스가 나를 안쪽의 작은 방으로 이끌었다. 나는 의아하게 물었다.
"무슨 이유인데요?"
"잠깐 휴가를 내고 싶어서.”
소처럼 일하던 사람이 갑자기 휴가를 내겠다니 이상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를 보고 쓴웃음을 지온 세스가 물었다.
“이비, 동생과 만나고 싶지 않아?"
"네? 브란을요?"
”싫어?"
“아뇨, 싫은 건 아닌데……."
사실은 싫었다. 브란을 만난다는 생각만 해도 이상하게 거부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형제애를 소중하게 여기는 세스가 알면 실망 할 것 같아서 솔직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아카데미 학기 도중이고, 외출도 자유롭지 않잖아요. 그리고 제 동생인 게 들키면 위험할 수도 있고요.”
변명하는 나를 이끌어 의자에 앉힌 세스가 말했다.
“제이 리드가 ‘브랜든이 누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보고했어. 당신에게 할 말이 있으니, 꼭 와 달라는군.”
그 말은 곧 아카데미로 찾아와 달라는 거였다.
“나를 거기 데려갈 생각이에요?"
세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지금껏 뼈 빠지게 일한 이유도, 나를 데리고 브란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인 듯했다. 나는 그가 왜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는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별일 아닐 거예요. 그냥 제가 무사한지 보겠다는 단순한 이유일 수도 있어요.”
"당신의 사명에 대한 중요한 이야기일치도 몰라.”
사명이라는 말에 갑자기 말문이 턱 막혔다. 머뭇거리는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세스가 진지하게 말했다.
“당신을 걱정시킬 것 같아서 말하지 못했지만, 그동안 계속 불안했어. 당신의 사명이 뭔지 확인해 둬야 한다고 생각해.”
"설마 제가 사도라는 성녀님의 말을 믿는 거예요?"
"당신은 사도야.”
어디 하나빠질 것 없는 내 남자가사이비 같은 말을 하다니. 당황스러워서 입을 뻐끔거리는 내 손을 꼭 잡은 세스가 다시 강조했다.
“이비, 당신은 사도야.”
“······백번 양보해서 제가 사도라고 처요. 하지만 브란이 제 사명에 대해 알 이유가 없잖아요.”
내 반박에 뭔가를 망설이던 세스가 일어났다. 그는 책상 위에 있던 함에서 얇은 편지 하나를 꺼냈다.
“당신에게 이걸 보여 줘야 할지 수백 번도 더 고민했어. 브랜든에게 당신의 상황을 알리고 만나러 와 달라고 요청했을 때 받은 편지야.”
나는 머뭇거리며 편지를 받았다. 세스의 얼굴을 한 번 본 다음 편지를 펼치자 짧게 두 줄이 적혀 있었다.
[당신 옆에서 누나가 몇 번 죽었죠? 누나가 끝까지 거부한다면 당신 혼자 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