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 * *
“유 캔 댄스~! 유 캔 자이브~!"
"까악, 꼴 보기 싫어!"
빨강 머리 카밀라가 승리의 댄스를 추는 이블린을 보며 질색했다. 그러자 이블린이 그녀의 옆에 달라붙었다.
"카밀라, 이게 금이란다. G.O.L.D~!"
“아악, 저리 갓!"
장난을 치는 그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다이애나가 문득 떠오른 것처럼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정말 놀랐어요. 예상보다 몇 배는 많은 수익이 나와서요.”
“자존심 때문이지, 뭐. 출신 지역으로 긁으면 아무리 질 것 같아도 절대 물러설 수가 없거든.”
카밀라가 생글생글 웃고 있는 이블린을 쿡쿡 찌르며 투덜거렸다.
“그걸 알면서도 이런 덫을 놓다니, 악마 같다니까.”
“아이고~ 칭찬 감사합니다!"
"흥, 뻔뻔하긴!"
입을 삐쭉이는 카밀라였지만, 사실 그녀도 그리핀 런에 제 결혼 자금까지 끌어와서 투자했다. 지금 심술을 부리는 것도 일이 잘 풀린 것에 대한 안도감 때문이었다.
“다들 방심하지 말아요. 이제부터가 진짜니까. 그리핀으로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으니 다들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요.”
부대 비용을 계산하던 마리아가 눈을 번뜩였다. 카밀라를 괴롭히던 이블린이 실실 웃었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승리를 즐기는 게 좋지 않을까요.”
"당신이 내 몫까지 즐기고 있잖아요.”
코웃음을 친 마리아가 다시 서류에 코를 박았다. 하지만 부듯한 표정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그것을 본 카밀라가 입을 삐쭉였다.
“우우, 마리아는 좋겠다. 나도 개최자 하고 싶었는데.”
이블린은 마리아를 그 리핀 런의 공동 개최자로 삼았다. 프림로즈의 후계자가 된 마리아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해서였다.
그리핀 런이 망할 거라며 악담을 퍼붓던 프림로즈의 가신들도 만루 홈런이 터지자 제 입을 열심히 꿰매는 중이었다.
일반 투자자인 카밀라와 달리, 공동 개최자인 마리아의 이득은 어마어마했다. 부러워하는 카밀라를 본 이블린이 물었다.
“그럼 다음 프로젝트에선 카밀라가 공동 개최자 할래요? 괜찮은 아이템이 하나 있는데."
"예? 다음이요?!"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던 핀이 벌떡 일어났다. 현장 지휘와 진행으로 하루 종일 뛰어다녔던 그는 눈 밑이 판다처럼 시커메져 있었다.
“여기서 또 뭔가를 하시겠다고요?!"
"어어, 그게······ 물의 신전 쪽에서 대리 판매 말고 직접 사업을 맡고 싶다고 해서요. 괜찮은 걸 하나 짜 봤어요.”
이블린과 손을 잡은 마탑이 승승장구하는 것을 본 물의 신전이 슬그머니 옆구리를 찌른 것이다.
마리아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욕심도 많네요. 누구 덕분에 지금 위치까지 기어 올라왔다고 생각하는 거지?"
아스트리아의 사람들은 대부분 대지신의 신도였다. 물의 신전은 상인들이나 찾는 소수 종교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블린이 끼어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블린은 채소를 먹는 문화를 귀족들에게 유행시키며 물의 신전에게 새로운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물의 신전은 그녀의 소개로 온실이 없는 귀족들에게 선전에서 키운 채소를 배달하며 산자를 늘려 나갔다. 비록 채소 공장 취급을 받긴 해도 부유한 신자들의 비율이 확 늘어난 것이다.
이블린은 거기에 더해 자선이 데뷔 때 사용한 장신구를 물의 신전에서 판매하는 특권을 줬다.
물의 신전은 마나로 내부를 세공한 보석에 신성력을 주입한 다음, 기부금을 받고 판매하는 것으로 많은 이득을 챙겼다. 하지만 마탑이 이블린의 뒤를 쫓아다니며 돈을 쓸어 담는 것을 보자 더 욕심이 생긴 모양이다.
"마탑은 조명으로도 쓰고, 영상 녹음으로도 쓰고, 화면으로도 쓰고. 만능 일꾼이지만, 물의 신전은 아니잖아?"
카밀라의 날카로운 지적에 옆에서 열심히 만화 원고를 그리 던 앤이 생각했다.
‘마탑이 그런 곳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마탑의 마스터들을 왕이 직접 환대하던 때가 분명 있었던 것 같은데, 여기선 그냥 일 잘하는 누렁소 취급이었다.
이블린이 머쓱하게 뺨을 긁적였다.
“하지만 다음 프로젝트는 물의 신전만 할 수 있는 거라서요. 어떤 거냐면 …….”
“아악! 말하지 마! 말하지 말아요! 이야기를 들으면 또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단 말입니다!”
발작하던 핀이 의자에 픽 쓰러졌다. 너부러진 그를 꾹꾹 눌러 본 테오가 눈을 껌뻑이며 이블린을 쳐다봤다.
“핀 죽었어?"
“아냐, 일 시키면 살아나.”
"응.”
잔인한 그들의 대화에 핀이 몸을 퍼덕거렸다. 하지만 다시 일어날 엄두가 안 나는지 도로 축 늘어졌다.
“저도 여기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요. 무엇보다 현장에서 일을 맡을 책임자가 없어요.”
다이애나가 조심스럽게 반대 의견을 꺼냈다.
이블린의 사업은 하나같이 독특해서 읽고 쓰고 계산이 가능한 책임자가 필요했다. 하지만 이 시대에 그 정도로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의 수는 아주 적었다.
“인재가 없긴요. 우리 가까이에 읽고 쓰고 계산이 가능한 사람들이 있잖아요?"
이블린은 루시아가 열심히 쓰고 있는 19금 원고를 가리켰다. 카밀라가 눈을 깜빡였다.
“어, 설마 여자들을 데려다가 쓰려고?"
"네, 읽고 쓰고 계산하고. 다 되잖아요?"
카밀라는 이블린의 말을 반박하려고 했다.
여지들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든가, 아무것도 몰라서 시킬 수가 없다든가. 하지만 카밀라 자신이 이블린을 돕고 있는 이상 꺼낼 수 없는 말이었다.
“일하는 여자에 대한 허들은 높아요. 가문이 몰락하지 않는 이상 여자들은 일하지 않는 게 상식이니까요.”
마리아의 차분한 반박에 이블린이 씩 웃었다.
”에이, 남의 밑에서 돈 벌 때만 그렇죠. 직접 크게 사업을 하면 아무래도 반응이 다룰걸요.”
“마리아, 설득해도 소용없어. 이블린은 개인 사업을 자기 시녀들에게 맡기는 여자야.”
실제로 이블린은 선대에게 넘겨받은 가게와 사업의 책임자로 자신의 시녀들을 앉혔다. 고등 교육을 받은 인재를 방구석에서 썩힐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우리 애들이 얼마나 일을 잘하는데요?"
“개들한테는 빨리 결혼하라는 말이 욕이라더라."
원래 시녀는 몇 년 동안 귀부인에게 봉사한 다음 빨리 시집을 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사업체를 굴리게 된 이블린의 시녀들은 결혼 하라는 말만 들으면 질색했다. 결혼과 동시에 지금 손에 쥔 권력을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당선 시녀들과 우리는 특이한 케이스예요. 보통 여자들에게 사업을 하자고 하면 겁부터 먹는다고요.”
마리아의 지적에 이블린이 깍지를 낀 양손을 턱밑에 받치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우선 단순한 판매 사업부터 시작해서 허들을 낮추죠.”
“단순 판매 사업? 어떤 거?"
“오빠나 남동생을 렌탈해 달라고 하는 겁니다.”
“······?"
"창공 기사단에도 인원이 좀 더 필요하니까요. 어디서 빌려 오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요. 사업 이름은 렌탈 나이트가 어떨까요?"
잠시 경련하듯 몸을 퍼덕거리던 핀이 이내 조용해졌다. 혼란스럽게 눈을 굴리던 다이애나가 물었다.
“오빠와 남동생과 직접 계약하는 게 아니라요?"
”에이, 공작 부인인 제가 외간 남자들이랑 어떻게 직접 계약을 해요?“
“맨날 하잖…… 읍읍!"
“이번만큼만 아닌 척하려고요.”
카밀라의 입을 막은 이블린이 상냥하게 말을 이었다.
"여자들은 다들 가문을 위해 결혼하는데 직접적인 이득을 돌려받을 기회는 드물잖아요. 이번 기회에 쓸모없는 남동생과 오빠도 좀 팔아 보면 다들 좋아할 거예요.“
"남동생과 오빠를 팔아 본 다음에는 못 팔게 없겠네요. 안 그래요?“
픽 옷은 마리아가 이블린의 새까만 속셈을 지적했다. 이블린은 당연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우와, 진짜 악마 같다. 그런데 감히 그런 계약을 할 사람이 있을까?"
”훗, 제가 누굽니까? 이블린입니다, 이블린.“
이블린은 콧대를 세우고 잘난 척을 했다. 재수 없기 보단 그냥 귀여웠지만, 어쨌든 맞는 말이었다.
손대는 일마다 대박을 터트리는 이블린이 딸과 손을 잡겠다는데, 거기에 반대할 부모는 없었다. 아들의 목을 짤짤 흔들어서라도 겹]약을 시킬 것이다.
“그래도 돈은 여자들에게 줄 거지?"
"당연하죠. 그것이 렌탈이니까.”
이블린이 고개를 끄덕하며 답했다. 탁자를 두드리며 잠시 계산을 해 본 마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성공해도 당장 쓸 수 있는 인원은 없다는 걸 알고 있죠? 당분간 사업을 새끼 치는 건 그만둬요.”
”……네.“
“그리고 우리 쪽도 이렇게 난리가 났는데, 공작 전하가 뭐라고 안 해요?"
마리아의 물음에 이블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그 남자는 티도 안 내는 건가. 한숨을 쉰 마리아가 설명을 덧붙였다.
“지금껏 당신이 손댄 일 중에 실패한 게 있어요? 없잖아요. 그럼 질투든 탐욕이든 분명 당신 사업에 손을 뻗는 사람이 있었을 거란 말이에요.”
" 네? 전혀 없었는데요?"
“그게 누구 덕분이겠어요?"
대기업의 갑질이 심판받는 사회에서 살았던 이블린은 누군가의 가슴에 칼을 꽂아서라도 이득을 뺏으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래서 마리아가 지적하기 전까지는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냥 공작 부인이라 그런 거 아냐?"
“이블린을 직접적으로 치진 못해도 아래에서 갉아먹을 수는 있으니까. 손대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
이블린은 동종업자의 이득을 빼앗는 것보다는 손을 잡고 다 함께 이득을 보는 쪽을 선호했다. 전생에서 배운 상생에 따른 것이지만, 사실 그만큼 뜯어먹을 부위가 늘어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이블린의 사업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 은 달려드는 승냥이들의 모가지를 모조리 꺾어 버린 공작덕분이었다.
“하지만 당선이 계속 금광을 발굴하고 다니면 공작 전하의 힘으로도 다 커버가 안 될 게 분명하다고요.”
“……미안해요, 저 먼저 가 볼게요!"
제 남편이 내조 대왕이라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이블린이 제대로 인사도 하지 않고 호다닥 뛰쳐나갔다.
카밀라가 입을 삐죽거렸다.
“이블린은 좋겠다."
"······."
마리아는 아무 말 없이 서류를 넘겼다. 하지만 속으로는 프림로즈에 들어앉힐 정숙하고 내조 잘하는 남자가 없는지 고민 중이었다.
"저기, 여러분.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친구들이 이야기하는 동안 조용히 자수를 놓던 벨라가 손을 들었다. 수줍음이 많아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그녀가 말을 꺼내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됐다.
“우리가 이블린을 돕는 목적이요. 사업이 아니라 라리사모어라는 사람을 막기 위한 거 아니었나요?"
”……어, 그러게?"
뒤늦게 깨달음을 얻은 카밀라가 중얼거렸다.
* * *
그리핀 런의 대성공으로 케인 엘마이어의 콧대는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아졌다.
오늘도 모두의 환영을 받으며 파티장을 휘젓고 다닌 그는 새벽이 되어서야 거들먹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공작가의 마차를 기다리는 그의 앞을 가로막는 사람이 있었다.
“아버지.”
깊게 눌러쓴 두건을 살짝 벗자 천사처럼 아름답고 가련한 얼굴이 드러났다. 케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라리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