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189화 (189/240)

189화

* * *

따뜻한 것이 도르르 굴러와 몸에 부딪쳤다.

눈을 뜬 세스는 제 옆에 찰싹 붙어 있는 이블린을 발견했다.

자는 동안 부스스해진 머리가 분홍색 민들레처럼 일어나 있었다. 그게 귀여워서 작게 웃은 세스는 그녀의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주었다.

"우응······."

간지러운지 몸을 뒤척인 이블린이 배시시 웃었다. 그녀가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궁금했다.

넋을 놓고 이블린을 바라보던 세스는 제 시선이 그녀를 깨울까 봐 눈을 감았다. 밤새도록 잠들지 못한 눈이 뻑뻑하게 아려 왔다. 성국에서 돌아왔을 때부터 시작된 불면증이었다.

불면증은 그의 오랜 친구였다.

형과 동생이 화재로 축은 후로 세스는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겨우 눈을 붙여도 악몽에 시달리다 퍼뜩 잠에서 깨곤 했다.

하지만 이블린과 한방을 쓰게 된 뒤로는 짧게나마 푹 잠들 수 있게 되었다. 그 평온이 깨어진 것은 성국에서부터였다.

그때, 성녀가 이블린에게 사명에 대해서 말해준 그 순간부터.

"혹시 사명을 잊으신 것은 아닐까요. 한 번쯤은 사도님의 처음으로 돌아가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겁니다.“

성녀가 그렇게 말했을 때, 세스는 섬뜩함을 느꼈다. 이블린의 몸에서 이질적인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녀의 머리 뒤에 둥근 빛이 떠올랐다. 성화속에 그려지는 금빛의 광채가 아닌, 어둡고 혼탁한 빛의 헤일로였다.

“이비!"

세스는 반사적으로 이블린을 껴안았다.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었다. 지금 그녀를 붙잡지 않으면 영원히 놓쳐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이블린이 그를 바라봤다. 언제나 반짝이던 붉은 눈동자가 무표정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무런 감정도 없이, 하찮은 돌멩이를 바라보는 것 같은 시선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비.”

다시 한번 그녀의 이름을 부른 순간, 불길한 빛은 사라지고 무표정하던 눈에 감정이 떠올랐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소와 같아진 이블린의 모습에 세스는 안도와 불안을 동시에 느꼈다. 자꾸만 품을 벗어나려던 그녀가 잠든 후에야 겨우 곤두선 신경을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세스.”

하지만 자신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성녀의 시선과 마주치자 다시 심장이 꾹 죄어들었다.

“모든 것은 신의 뜻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세스는 이를 악물고 현실을 부정했다. 그 모습에 성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분은 분명 사도입니다. 비록자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잊었지만, 그것조차 사명을 위해서인지도 모릅니다.”

사도. 신이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지상으로 내려 보낸 존재.

이블린은 자신이 사도가 아니라고 했고, 세스는 그녀의 말을 믿었다. 아니 , 고녀의 말이 맞기를 바랐다.

하지만 축은 정령수를 되살리고, 신을 불러내는 기적은 사도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신도 알고 있지요? 카스티야의 왕은 인간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순리를 거슬러 온 괴물이에요. 그를 심판하기 위해 사도께서 오신 거라면…….”

잠시 머뭇거리던 성녀가 덧붙였다.

"당신의 옆에 있는 것 또한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인지도 모릅니다."

순간, 얼음덩이를 삼킨 것처럼 가슴이 시큰거렸다.

세스는 이블린을 힘껏 움켜잡지 않기 위해 모든 인내력을 다 써야했다.

“저는 제 아내를 믿습니다.“

“세스.”

성녀는 그가 신의 뜻에 휘둘려 희생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걸 알면서도 세스는 고개를 저었다.

"두 번 다시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어린애처럼 고집을 부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스는 이블린을 믿었다. 그녀를 믿지 않는 자신에겐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래요. 당신만큼 사도님을 가까이서 지켜봐 온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

"끝까지 용기를 잃지 마세요. 당신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자신을 위해 눈물을 홀리던 성녀를 떠올린 세스는 한숨을 삼켰다. 사실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블린이 어떤 존재든, 어떤 목적으로 제 옆에 있든 상관없었다. 무엇을 원하든 다 내줄 수 있으니까.

‘나를 잊어버리지만 말아 줘.'

세스는 조심스럽게 이블린을 끌어안았다. 잠에 취한 그녀가 웅얼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나를 계속 좋아해 줘. 당신을 위해 뭐든 할 테니까.’

이제는 익숙해진 고통을 삼킨 그는 이블린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입술을 눌렀다.

* * *

재개장한 그레이트 닉스 경마장 앞은 마차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아름답게 치장한 라리사 모어는 연회장의 입구에 서서 화사한 미소로 손님들을 맞이했다.

사교계의 명시들은· 언제 그녀의 초대를 외면했냐는 듯이 시침을 둑 떼고 인사를 건넸다.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백작 부인. 전보다 더 아름다워지셨군요.”

“다시 뵙게 되어 기쁘군요.”

라리사 또한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받았다. 그녀는 끝없이 몰려드는 인파에 몹시 흡족해하고 있었다. 자신의 옷차림을 힐끗거리는 여자들의 시선이 더없이 감미롭게 느껴졌다.

라리사는 부풀린 소매에 수많은 황금색 리본을 달아 화려한 느낌을 더했다. 이마에는 보석 장식을 두르고, 귀 옆에는 아름다운 새의 깃털을 늘어뜨렸다.

드레스 또한 화려한 비단을 사용했다. 엉덩이 버팀 대를 넣고 오버스커트를 커튼처럼 걷어 올리자 발목이 유혹하듯 살짝 드러나 남자들의 시선을 끌었다.

과거 그녀가 사교계에 유행시킨 아이템들을 더 세련되게 손을 본 것이었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떨어질 줄을 모르는 것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경마가 시작되기 전에 먼저 구경부터 하시겠어요?"

우아하게 몸을 돌린 라리사가 연회장 안으로 사람들 올 이끌었다. 귀빈들이 담소를 나누며 경마를 관람할 수 있게 만든 곳으로, 경마장보다는 파티 홀에 더 가까워 보였다.

“세상에!"

연회장 안으로 들어선 사람들이 감탄을 토했다.

아치형의 천장은 물론, 벽과 바닥까지 온통 하얬다. 사방을 꾸미는 꽃까지 흰색이었고, 경마를 관람할 수 있도록 트인 벽에까지 하얀 커튼이 나부끼고 있었다.

이 병적일 정도로 하얀 무대는 라리사의 화려한 드레스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팔랑거리는 가벼운 드레스를 입은 여지들은· 이곳에서 병자처럼 창백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그런 옷을 입고 온 귀부인들이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흥, 이제 지금 유행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깨달았겠지.’

속으로 비웃음을 흘린 라리사는 먼저 연회장에 들어 온 사람들과 다시 인사를 나누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독 이상함을 느꼈다. 연회장 안에 있는 사람들의 수가 이상할 정도로 적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라리사가 안내한 사람들만 생각해도 이것보다 배로 더 많은 사람들이 있어야 하건만…….

‘뭐지?'

처음 겪는 일에 당황한 라리사가 손에 든 부채에 힘을 주었다.

그때, 그녀의 뒤쪽에서 왁자지껄한 소란이 일어났다.

입구로 우르르 몰려 들어온 것은 한 떼의 아가씨들 이었다. 그녀들은 호스트인 라리사를 찾아와 인시를 하기는 커녕 자기들끼리 떠들기에 바빴다.

예의 없는 태도에 발끈했던 라리사는 처음 보는 옷을 입은 그녀들을 보고 멈칫했다.

‘뭐야, 저건?'

얼핏 보기엔 승마용 투피스 같았다. 하지만 재킷을 개조한 상의가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길게 내려와 있었고, 아래에 입은 것은 딱 달라붙는 바지와 부츠였다.

‘기사도 아닌데 바지를 입었어?'

경악하는 라리사와 달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별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 제일 먼저 지적하고 나서야 할 귀부인들마저 부채를 빠르게 흔들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니까 더 예쁘지 않아요?"

"저도 입고 오고 싶었는데, 아직 용기가 안 나서요.”

“어휴, 부인 정도면 시도해 봐도 괜찮죠.”

“사실 저도 하나 맞췄어요.”

사방에서 소곤거리는 소리에 라리사의 얼굴이 굳어 졌다. 마치 어딘가에서 저런 옷이 유행한다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라리사가 알기로는 어떤 파티와 무도회에서도 저런 파격적인 의상을 선보인 사람은 없었다.

‘또야?’

라리사는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여자들이 그녀가 모르는 사이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유행을 주고받는 느낌이 들었다.

"백작 부인, 처음 뵙겠습니다.”

그녀가 소외감을 곱씹는 사이, 우르르 몰려온 아가씨들이 그제야 인사를 건넸다. 소개 없이 초면에 말을 걸면 안 된다는 예의 따윈 어디론가 팔아먹은 것 같은 태도였다.

게다가 라리사가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그들은 제멋대로 떠들기 시작했다.

“정말 아름다운 경마장이네요. 그레이트 닉스에 대한 말만 들었는데 이렇게 재개장될 줄은 몰랐어요.”

“저도요. 어머니나 이모의 추억을 공유하는 느낌?"

까르르 웃는 그녀들의 눈에서 적의가 느껴졌다. 라리사는 그들이 일부러 무례하게 군다는 것을 깨달았다.

‘올해 갓 데뷔한 풋내기들이 뭘 믿고 이렇게 건방지게 굴지?'

괘씸하기보단 가소로웠다. 라리사는 한껏 비웃음을 띤 채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군요. 다시 줄길 수 없을지도 모르니 마음껏 누리셨으면 좋겠어요.”

“아, 괜찮아요. 저희가 바빠서 이만 가 봐야 되거든요.”

“맞아요, 지금 가야 좋은 좌석을 얻죠.”

“그럼 기회가 되면 다음에 뵙겠습니다.”

아가씨들이 우르르 입구로 몰려 나갔다.

어처구니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던 라리사는 문득 사람들이 뒷문으로 하나둘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

‘감히!'

본래, 같은 날에 무도회가 둘 이상 열리면 관심 없는 곳에는 얼굴만 비췄다가 다음으로 중요한 무도회에 참석한다.

라리사는 지금 자신이 얼굴도장만 찍고 버려지는 무도회 주인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노로 이를 악문 그녀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핀들에게 실컷 물어뜯기고 나면 정산을 차리겠지.’

* * *

“우와아아!”

‘그리핀 런!’의 경기장 안으로 들어선 사람들은 탁 트인 시야에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이블린은 왕실 경마장을 개조해 야구장 같은 구도로 관람석을 만들어 놓았다. 주섬주섬 자리를 찾아 앉은 사람들은 아래가 훤히 보이는 것에 신기해했다.

오픈 시간이 되자 경기장 전체에 우렁찬 음악이 울려 퍼졌다.

“신사숙녀 여러분, 오늘 ‘그리핀 런!' 오프닝 행사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사회자의 인사말과동시에 거대한 하얀 동체가 경기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핀들의 대장인 우유가 매처럼 빠르게 경기장을 가로지르며 시범 경기를 선보였다.

거대한 그리핀이 허공에 매달린 수많은 장애물들을 건너뛰고 날아오르는 묘기를 뽐냈다. 그 등에 매달린 금발의 기수 또한 노련한 솜씨를 선보였다.

금발의 기수가 입고 있는 하얀 승마용 코트가 꽃잎처럼 펄럭이며 아름다운 잔상을 남겼다. 가장 앞줄에 앉은 아가씨들이 반짝이는 응원봉을 흔들며 열광했다.

"까아악! 마리아 님!"

그리핀이 마지막 지점을 통과한 순간, 경기장의 사방에 매달려 있던 공이 터지며 꽃잎이 휘날렸다.

동시에 중앙 경기장의 바닥이 갈라지며 천천히 무대가 올라왔다. 무대 위에선 그리핀들과 창공 기사단이 대열을 갖추고 있었다.

무대가 멈추고 흥운 음악이 흘러나오자 그들은 무서울 정도로 각이 맞는 칼군무를 추기 시작했다. 현란한 그들의 동작에 관람객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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