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188화 (188/240)

188화

* * *

- 와장창!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접시들이 뒤집혔다.

파티 음식을 선보이러 왔던 요리사는 무릎을 꿇고 벌벌 떨었다. 얼굴에 온갖 음식 찌꺼기가 달라붙었지만 닦아 내지도 못했다.

“그 비싼 재료로 이따위 쓰레기를 만들어?"

라리사 모어는 차가운 목소리로 상대를 압박했다.

그저 정성껏 음식을 만들었을 뿐인 요리사는 필사적으로 용서를 빌었다.

“죄, 죄송합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이번엔 꼭 만족하실 만한 요리를 만들겠습니다!"

"그래? 그럼 오른손을 잘라. 그걸로 용서해 줄게."

”······예?"

“오늘의 재료는 특별히 바닷물에 넣어서 실어 온 최고급 해산물이야. 그걸 망쳐 놓고서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을 생각이었어?"

하얗게 질린 요리사는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라리사가 눈을 가늘게 뜨고 구의 절망을 즐기던 그때였다.

"이제 그만하시지요. 어차피 참석자가 없어서 파티를 취소하려고 했지 않습니까.”

점잖게 끼어든 이는 중앙 귀족인 호손 백작이었다.

원래 그는 프림로즈 후작의 오른팔이었는데, 후작이 쓰러진 뒤엔 리처드 프림로즈를 후계자로 밀었다.

하지만 마리아 프림로즈가 후계자가 되면서 백작 또한 권력을 잃고 쫓겨나게 되었다.

지금 그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라리사 모어와 손을 잡은 상태였다. 하지만 계속되는 그녀의 패악에 점차 질려 가고 있었다.

경멸 어린 그의 시선에 라리사가 날카롭게 반응했다.

“내가 뭘 하든 끼어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엉뚱한 곳에 화풀이할 시간에 대책을 세우십시오.”

호손 백작은 요리사를 강제로 밖으로 내보냈다. 갖고 놀던 장난감이 사라지자 라리사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노려봤다.

“무슨 대책?"

“우리의 예상보다 이블린 엘바이어의 영향력이 강합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아무것도 안 됩니다.”

사교계의 명사들이 전부 그 여자 때문에 라리사 모 어의 초대에 응하지 않을 정도였다. 사실 호손 백작은 이렇게 일방적으로 라리사가 밀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데뷔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풋내기가 사교계를 이렇게 휘어잡다니. 정말 놀랍군.'

하지만 라리사 모어는 이블린의 영향력을 인정하려들지 않았다.

“내가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면 그따위 계집은 아무 것도 아니야.”

“지금 그럴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블린 엘마이어는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이블린은 사교계의 전통을 따르는 대신 완전히 새로운 판을 깔아버렸다.

파격적인 데뷔 이후, 그녀는 자산을 찾는 사람들의 초대에 시아버지인 케인 엘마이어를 대신 보냈다.

당연히 초대한 사람들은 난색을 표했고, 케인 엘마이어는 훌쩍훌쩍 울면서 돌아왔다.

그것을 알게 된 케인의 친구들이 철저하게 응징을 가하자, 사교계는 케인의 대리 참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케인은 곧 사교계의 무법자로 변신했다. 자산이 깽판을 쳐도 막을 사람이 없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사방을 헤집고 다녔다.

성격 더럽고 신분까지 깡패인 그를 막기 위해 사람들은 연배가 비슷한 부모 세대를 호출했다. 뒷방에서

썩어 가던 이들은 다시 앞으로 나설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케인을 빌미로 삼아 모임의 주도권을 차지해 버렸다. 덕분에 사교계의 연령대가 확 올라갔다.

이때, 기다렸다는 듯이 이블린이 나섰다. 그녀는 독서 모임이라는 명목으로 청년들에겐 방탈출 같은 모험을, 여자들에겐 비밀스러운 자유를 주었다.

부모 세대에 치이던 이들은 재빨리 이블린이 제공하는 공간으로 도망쳐 버렸다.

사교계가 세대와 성별로 갈라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남지들을· 사로잡고 여자들을 추종자로 만들려던 라리사의 계획은 처음부터 삐걱거릴 수밖에 없었다.

부모 세대가 주름잡는 모임에서 왕좌를 차지하기엔 라리사가 너무 어렸다. 그렇다고 이블린이 주도하는 모임에 끼어들 수도 없었다.

라리사가 할 수 있는 건 모두가 감탄할 정도로 화려한 파티를 여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허영심 많은 귀족들을 자극하기 위해 강에 거대한 배를 띄우고 초호화 파티를 열려고 했다. 그녀로선 회심의 한수였다.

하지만 이것조차 실패하고 말았다. 이블린의 미움을 살까 두려워한 여지들이 참석을 거부했고, 그것을 들 온 남자들도 오지 않겠다고 말을 바꿔 버린 탓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제 뭘 해야 할지도 모를 정도입니다. 모든 것이 너무 많이 변해 버렸어요.”

호손 백작은 처음으로 유행에 따라가지 못하는 박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만큼 이블린의 추진력은 굉장했고, 사교계는 허둥지둥 그녀의 뒤를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반대편에 서 있는 이들은 대책조차 세우지 못했다. 다음에 무엇이 튀어나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징징거리지 마. 나한테 필요한 건 단 한 번의 기회뿐이니까.”

라리사 모어는 자신을 완벽하게 내세울 기회만 있다면 이블린의 명성을 빼앗아 오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고 자신했다.

“사교계는 보수적이야. 지금은 이블린에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지만, 그녀의 약점이 드러나면 곧바로 돌변할 테지.”

라리사는 사람들의 음습한 습성을 잘 알고 있었다. 빛을 쫓아가다가도 그 빛을 바닥으로 끌어내리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이었다.

“그 기회를 어떻게 만들 겁니까?"

“그리핀 런.”

라리사가 비웃듯이 행사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리핀은 사나운 맹수지. 그런 맹수로 경기를 하면 당연히 사고가 일어나지 않겠어? 예를 들어, 경기를 보러 온 관람객들이 그리핀에게 잡아먹힌다든가.”

“······.”

호손 백작은 마른침을 삼켰다. 라리사의 말은 산 사람을 맹수에게 던져 주자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이블린 엘마이어는 그리핀을 이미 완벽하게 길들였잖습니까?"

"완벽한 건 없어. 완벽하지 않게 만들면 되니까.”

춤을 추듯이 걸음을 옮긴 라리사가 보석함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그 안에서 불길할 정도로 새빨간 마른 풀이 나왔다.

“미치광이 풀이라고 하더군. 그리핀을 광폭화시킬 때 쓰는 약이야.”

그리핀은 섬세한 생물이었다. 인간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도, 이유 없이 인간을 습격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장에선 반드시 적을 물어뜯고 죽여야 하기에 그리핀을 광폭하게 만들었다. 그럴 때 쓰는 것이 바로 이 미치광이 풀이었다.

”로엔 공국에서 보내 준 거야. 이걸 태운 연기에 반나절 이상 노출되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물어뜯으려고 들 거라더군.”

이블린에게 그리핀을 빼앗긴 공국은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라리사의 손을 빌려서라도 이블린에게 복수하길 원했다.

“확실히 그런 방법이라면…….”

잔인하지만 이블린을 확실하게 추락시킬 수 있다. 호손 백작은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어떻게 사용할 생각입니까?"

“이미 손을 썼어.”

라리사는 경기장을 관리하는 이들 중 한 명에게 거금을 준 뒤 풀을 틈틈이 태우라고 지시했다. 경기가 열리는 당일에는 이것이 그리핀들을 미쳐 날뛰게 만들 것이다.

“내가 직접 그 광경을 보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죄송합니다. 그런 계획이 있으신 줄도 모르고.”

호손 백작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를 노려본 라리사가 피식 웃었다.

"죄송하다면 이제 나를 위로 올릴 도움을 줘야겠어.”

“예?”

“그리핀 런에 맞춰 맞불을 놓을 생각이야. 호손 가문의 경마장을 좀 빌리고 싶은데?"

"경마 대회를 열 생각이시군요.”

호손 백작은 그녀가 원하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

선왕의 외가인 하틀랜드 공작 가문이 축소된 이후,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경마장은 호손 가문으로 넘어왔다.

라리사는 거기서 왕실 경마 대회에 버금가는 행사를 열어 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지출이 상당히 크겠군요."

“그 한 번으로 사교계를 휘어잡을 수 있다면 비싼 값은 아니지.”

경마 대회는 사교계에서 패션쇼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규칙이 빡빡한 무도회와 달리 새로운 의상 과 액세서리를 선보일 기회였기 때문이다.

라리사는 새로운 경마 대회를 열어 자신의 모습을 뽐내고 새로운 유행을 선도할 생각이었다.

‘허영심 가득한 여자들에게 지금의 드레스는 너무 밋밋해.'

지금의 사교계엔 이블린을 흉내 낸 가볍고 팔랑거리는 드레스가 주류였다.

라리사는 보석과 리본이 잔뜩 달린 화려한 드레스를 다시 부활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녀는 기존과 비슷하지만, 오버스커트를 커튼처럼 걷어 올려 발목이 살짝 드러나는 파격적인 디자인을 보여 줄 생각이었다.

"알겠습니다. 투자를 할 때는 확실하게 해야겠죠.”

호손 백작은 무거운 짐을 떠맡기로 했다. 라리사 모어가 그를 향해 눈웃음을 쳤다.

"결코 실망시키지는 않을 거야.”

* * *

”에잇! 에칫!"

중간 점검을 위해 경기장에 들어선 이블린은 재채기를 하기 시작했다. 세스가 걱정스럽게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아?"

“괘, 에칫!"

재채기를 하느라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에게 세스는 손수건을 건넸다. 손수건에 얼굴을 파묻은 이블린이 겨우 재채기를 멈췄다.

“……우우, 죄송해요.”

재채기 때문에 눈물이 글썽글썽한 그녀를 보고 세스가 속상한 표정을 지었다.

“감기 인가? 박사를 부를까?"

“감기는 아닌 것 같아요. 여기 오니까 난리인 걸 보면 알레르기인 것 같은데.”

"알레르기?"

이곳에선 아직 알레르기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전문가가 아닌 이블린은 애매하게 설명했다.

"음, 동물 털이나 꽃가루 때문에 재채기가 나는 거?"

그러자 옆에 있던 그리핀들이 흠칫 놀랐다. 세스가 물끄러미 그들의 털을 쳐다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일단 밖으로 나가자 점검은 나중에 내가 대신 할게.”

”······미안해요.”

“미안하긴, 신경 쓰지 마.”

시무룩해진 이블린이 세스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사라진 뒤 그리핀들에겐 비상이 걸렸다. 잘못하면 소중한 털과 보금자리를 잃을 위기였다.

-구르르륵! 구르륵!

-끼르르르륵!

격렬한 의논 끝에 그리핀들은 매일 목욕을 해서 털을 관리하자는 대책을 세웠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복실이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친구들이 집에서 쫓겨날 위기라고 착각한 복실이는 정령수의 이파리를 잔뜩 뜯어다가 목욕물에 넣어 주었다.

미치광이 풀의 기운은 정령수의 잎을 띄운 목욕물에 깨끗하게 씻겨 나갔다. 이블린의 재채기 증상도 사라 져서 모두가 만족했다. 가엾은 정령수만 대머리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핀 런의 오프닝 날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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