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187화 (187/240)

187화

* * *

독서 모임 당일 다프네는 낯선 가게 앞에 마차를 세웠다.

남성복 전문점, 헌츠맨,

이블린이 모임 장소로 정한 곳이었다.

‘왜 하필 남성복 전문점이야?'

잠시 망설이던 다프네는 호위 기사와 하녀를 물리고 혼자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하얀 턱수염이 멋진 재단사가 그녀를 맞이했다. 잠시 쭈뼛거리던 다프네는 티켓에 적힌 암호를 말했다.

“정장을 맞추기 전에 치수를 재고 싶어.”

"죄송하지만, 오늘은 2번 피팅룸만 비어 있습니다.”

약속된 대답이 돌아오자 다프네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마치 모험 소설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처음인데 2번 피팅룸을 쓸 수는 없지. 기다리는 동안 3번 피팅룸을 구경하겠어.”

그러자 열쇠를 꺼낸 재단사가 3번 피팅룸의 문을 열어주었다.

"안에서 문을 잠근 다음, 제일 왼쪽에 있는 고리를 당겨 주십시오."

홀린 듯이 피팅룸 안으로 들어간 다프네는 구둣주걱이 걸려 있는 왼쪽 고리를 당겼다. 그러자 감춰져 있던 문이 스르륵 열리며 고풍스러운 방이 나타났다.

다프네는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수많은 가면들이 진열된 공간을 지나자 따뜻한 목소리가 그녀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아가씨.”

황갈색 머리를 늘어뜨린 낯선 여자였다. 이쯤에서 이블린이 나올 줄 알았던 다프네는 실망과 호기심을 동시에 느꼈다.

"당신은 누구지?"

"저는 아가씨의 변신을 위한 도우미입니다.”

"변신?"

“정원에 들어가기 위해선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야 하거든요. 자, 여기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세요."

여자는 수많은 가면 앞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변신이라더니, 결국 가면 무도회나 다룰 바 없잖아?’

실망한 다프네는 아무 가면이나 가리켰다.

하지만 여자가 가면을 씌워 주는 순간 머리카락은 보라색, 눈은 갈색으로 변했다. 턱 선과 피부색까지 달라져서 원래와는 전혀 다른 인상이 되었다.

“마음에 드세요?"

놀란 다프네는 저도 모르게 제 얼굴을 더듬었다. 그런데 가면이 손에 만져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마법이었다.

“다, 다른 가면도 써 볼 수 있어?"

“그럼요. 얼마든지요.”

다프네는 수십 개의 가면을 바꿔 쓰며 변선을 즐겼다.

고민 끝에 분홍색 머리로 변하는 가면을 고르자 여자가 묘하게 웃었다.

“이제 옷을 갈아입어야겠군요.”

여자가 건네준 것은 평민이나 입을 법한 원피스였다. 하지만 움직이기 편했고, 변신한 모습과도 잘 어울렸다.

"준비가 끝났으니 정원의 문을 열어 드리겠습니다. 안에서는 가명을 쓰셔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원래 신분을 밝혀선 안 됩니다.”

여자는 규칙을 어기면 두 번 다시 여기에 올수 없다고 당부한 후에야 안쪽에 있는 문을 열었다.

“그럼 좋은 시간 되세요.”

안으로 들어서자 장미 향기가 혹 풍겨 왔다. 어느새 다프네는 색색의 장미가 활짝 피어 있는 정원에 와 있었다.

고개를 들자 구름이 떠다니는 하늘처럼 꾸며진 천장이 보였다. 잔디인 줄 알았던 바닥도 다시 보니 정교한 카펫이었다.

‘진짜 정원에 온 느낌이네.’

화분에 심은 장미들이 미로 같은 길을 만들었다. 장미의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간 다프네는 깜짝 놀랐다.

수십 명의 분홍 머리 여자들이 의자에 기대거나 누워서 책을 보고 있었다. 귀족답지 않은 방만한 자세였다.

‘아니, 품위도 없이 저런 흉한 자세로······.’

경악하던 다프네는 곧 깨달았다. 이곳은 남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곳이었다.

‘아무도 나를 모르니까.'

빌러스 가문의 셋째 딸이 어떻다고 평가할 사람도 없었다. 목을 옥죄고 있던 끈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갑자기 대범해진 다프네는 중앙에 놓인 테이블로 향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책과 함께 작은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 장미 정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 준비된 책을 마음껏 읽으세요.

- 준비된 음식을 마음껏 드세요.

-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마세요.

- 대화는 비밀의 방 안에서만!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간단한음식과 곳곳에 숨겨진 방들이 보였다. 다프네는 우선 테이블 위의 책부터 살폈다.

〈장미에 맺힌 이슬〉, 〈그 많던 장미는 누가 다 먹었나〉, 〈밤에만 피는 꽃〉, 〈안 돼요, 왕자님〉 같은 낯선 제목들이 눈에 띄었다.

‘오늘 모임 주제는 장미 정원의 비밀이었는데?'

〈장미 정원의 비밀〉은 오랫동안 사랑받은 낭만 소설 이었다. 하지만 낭만 소설은 멍청한 여지들이나 보는 거라고 비웃음을 당했기에, 다들 숨어서 몰래 읽었다.

그래서 이블린이 이 책을 모임 주제로 정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평판 때문에 포기하고 다른 책들을 갖다 둔 걸까?'

궁금했지만 물어볼 곳이 없었다. 다들 눈이 빠져라 책을 읽고 있어서 방해하기도 좀 그랬다.

잠시 망설이던 다프네는 장미에 맺힌 이슬이라는 책을 집어 든 다음 빈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조용한독서 모임은 처음이야.'

지식을 뽐내며 떠들지도 않고, 트집을 잡아 비꼬지도 않고, 상대의 비위를 맞출 필요도 없었다.

참으로 건전한 곳이라고 생각하며 책을 펼친 다프네는 3분도 지나지 않아 심장 마비에 걸릴 뻔했다.

"허억!"

순결하고 낭만적인 ‘장미 정원의 비말’ 속 주인공들이 더없이 파렴치한 짓을 하고 있었다. 보는 사람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였다.

어쩔 줄 몰라 하던 다프네가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아무도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이, 이런 내용을 읽어선 안 돼. 나는 정숙하고 품위 있는 귀족으로서…….'

그러나 당장 이 악마의 책을 불살라야 한다는 이성의 속삭임과 달리, 그녀의 손가락은 살금살금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결국 마지막 장까지 다 읽어 버린 다프네는 털썩 의자에 기댔다. 머릿속이 하얗게 불탄 기분이었다.

‘내가 대체 뭘 본 거지?'

완벽하게 새로운 세상이었다. 갑자기 많은 것을 알게 된 그녀는 멍하게 눈을 깜빡였다.

-달그락

그때, 그녀의 앞에 얼음이 듬뿍 들어간 주스가 나타났다. 근처에서 책을 읽던 여자가 다프네 앞에 잔을 내려놓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움찔거리던 다프네는 잔을 집어 들었다. 다른 장소였다면 잔에 뭔가를 탔는지,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 담긴 것은 순수한 호의였다.

다프네는 여자를 향해 고개를 숙인 뒤에 주스를 마셨다. 평소처럼 소리 없이 입만 적시는 것이 아니라 벌컥벌컥 들이켰다. 머릿속을 물들이던 충격이 시원함을 타고 쑥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또 다른 여자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녀는 다프네에게 자신이 쓴 메모를 내밀었다.

[처음 오셨어요?]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는 〈왕자님의 50가지 그림자〉라는 책과 두 번째 메모를 내밀었다.

[최고의 책, 추천합니다.]

다프네가 책을 받아 들자 여자는 조용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어서 근처를 서성이던 몇 명이 다가와 자신이 추천하는 책과 메모를 내밀었다.

[여주가 귀엽고 왕자님이 맛있어요.]

[봄날의 피폐물을 좋아하세요?]

다프네는 갑자기 코끝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낯선 사람들에게서 진한 우정의 향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묵묵히 감사를 표한 다음, 〈왕자님의 50가지 그림자〉부터 읽기 시작했다. 지금껏 몰랐던 또 다른 세계가 그녀의 눈앞에 펼쳐졌다. 몇 시간이 마치 설탕이 녹아내리듯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 지금은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또 만나요~♪

신세계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다프네는 요란한 음악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사방에서 안타까움을 담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한 글자라도 더 읽으려는 것처럼 책을 부여잡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이 달콤한 시간이 끝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 헤어지는 마음이야 아쉽겠지만~♬ 웃으면서 헤어 져요~♪

책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선 사람들이 중앙으로 향했다. 다프네도 홀린 것처럼 그들의 뒤를 따랐다.

무대처럼 마련된 곳에 일곱 명의 여자가 서 있었다. 가면을 쓰지 않은 맨얼굴에 다프네는 깜짝 놀랐다. 가운데 있던 이블린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

‘"여러분, 즐거운 시간 되셨나요?"

“네에!”

“아뇨!"

사방에서 모여 든 분홍 머리 여자들이 소리쳤다.

"레이디 로즈, 좀 더 있으면 안 될까요?"

“모임 시간이 너무 짧아요. 밤까지 있고 싶어요!"

“전 늦게 와서 대화도 못 했는데 너무 아쉬워요.”

이블린은 칭얼거리는 그녀들을 상냥한 얼굴로 달랬다.

"여러분, 모임이 길어질수록 알리바이를 만들기 힘들어져요. 우리의 모임은 어디까지나 비밀이니까요.”

여자들은 시무룩하게 입을 다물었다. 이블린이 격려하듯 말을 이었다.

“대신 기쁜 소식이 있어요. 다음 모임에선 레이디 카라와 세인트 릴리가 신간을 선보일 거랍니다.”

"까아아악!”

여자들이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다. 그녀들의 환호에 앤과 루시아가 머쓱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비명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리던 이블린이 끝을 선언했다.

“자, 그럼 헤어질 시간이에요. 다음에 또 만나요.”

“다음에 만나요!"

여자들은 아쉬워하며 발길을 돌렸다. 다프네 역시 허전한 마음으로 몸을 돌리려 했다. 그때, 그녀에게 주스를 건넸던 여자가 손을 붙잡았다.

“내일도 올 거죠?”

"네? 내일도 모임이 열려요?"

“모임은 아니지만 정원에는 들어올 수 있거든요. 보통 다음 모임을 기다리며 오늘 읽은 책 이야기를 해요. 자기가 직접 쓴 것들을 갖고 오기도 하고요.”

이 멋진 공간에 매일 올 수 있다는 사실에 다프네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꼭 올게요.”

“기다릴게요. 전 라일라예요.”

"저, 저는 피오나예요!"

급히 가명을 대자 라일라가 웃으며 손을 놓아주었다. 다프네는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으로 왔던 문을 통해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갔다.

“모임은 즐거우셨나요?”

그녀를 변신시켰던 여자가 물었다. 다프네는 아쉬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면을 벗겨 준 여자가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다음에 오실 땐 제가 없을 거예요. 대신 이걸 끼면 지금과 똑같은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어요. 장미 정원에서만 사용이 가능하니 주의하세요.”

상자를 열자 장미 문양이 박힌 반지가 들어 있었다.

다프네는 몇 번이나 고맙다고 인사를 한 다음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집에 도착하자 이미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글로리아나 백화점'의 상자를 들고 마차에서 내린 빌러스 부인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다프네, 이제 오니? 평소보다 좀 늦었구나.”

“아, 그게…… 새 친구들이랑 이야기하다가 시간을 잊어버렸어요."

“그래?"

빌러스 부인은 별 의심 없이 넘어갔다.

"참, 클라멘스 백작 부인이 너한테 초대장을 보냈더구나. 제법 호화로운 파티인 것 같던데······ 참석할 거니?"

“아, 아뇨! 전 당분간 파티는 쉬려고요!"

다프네는 펄쩍 뛰었다. 이블린의 적인 라리사 모어의 파티에 갔다간 모임에서 영원히 퇴출당할지도 모른다.

“가끔은 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다행히 빌러스 부인은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안심한 다프네는 서둘러 방으로 도망쳤다. 그래서 그녀는 엄마의 목에서 반짝이는 장미 문양 목걸이를 보지 못 했다.

“마님, 오늘 쇼핑은 어떠셨습니까?"

"최고였어. 아주 귀여운 여자애를 발견했는데, 처음 온 건지 바들바들 떨고 있지 뭐야. 내가 직접 주스를 따라 줄 정도였다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