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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186화 (186/240)

186화

순간 지하실의 싸늘한 냉기와 역겨운 곰팡이 냄새가 떠올랐다.

갈라진 벽과 거슬거슬 녹이 슨 창살, 접시에 말라붙은 음식 찌꺼기, 좁은 창문으로 겨우 엿보던 창백한 달.

“이비.”

멍하게 있던 나는 내 몸을 감싸는 팔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세스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얼른 미소를 지었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피곤하면 나한테 좀 더 기대.”

“어, 괜찮은데…….”

하지만 세스는 나를 꽉 끌어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머뭇거리던 나는 좀 더 편하게 그의 품에 기댔다.

‘따뜻해.'

그의 품에서 전해지는 온기에 삐걱거리던 정신이 제 자리로 돌아왔다. 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쓰담쓰담도 해 달라고 하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분위기가 아니네.’

나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루시아와 걱정스러워하는 성녀를 확인했다. 그들이 보기에도 내 상태가 썩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갑자기 딴생각을 해서 죄송합니다. 성녀님의 조언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아니, 방금사도님의 머리 뒤에…….”

"쉿!“

무어라 말하려는 루시아를 황급히 가로막은 성녀가 웃었다.

“괜한 이야기로 심기를 어지럽혀 드린 것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신탁을 받으면 곧바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려던 나는 아직 한 가지 문제가 남았음을 깨달았다.

"참, 여기에 부리 내린 정령수의 관리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필요하다면 정령수를 대지수로 개종시키셔도 괜찮습니다."

"안 그래도 이미 신도들에게 대지선의 강림을 부른 신성한 나무로 추앙받고 있더군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앞으로 선전에서 신목으로 보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그래도 성녀의 약속을 받으니 마음이 놓였다. 나는 루시아에게 눈을 돌렸다.

“그럼 루시아 남 어서 준비하고 나오세요. 오시면 바로 출발할 테니까요.”

“네? 곧바로 가신다고요?"

“네, 저 내일 약속이 있어서요. 아시죠?”

“주, 준비하고 오겠습니다.”

루시아가 몸을 휘청거리며 떠났다. 그녀가 걱정되었는지 복실이와 코코가 부부 울며 뒤를 따라갔다. 나는 세스와 성녀를 힐끗 봤다. 떠나기 전에 둘이서 만 이야기를 나눌 시간을 줘야겠지.

“저도 다른 애들에게 출발한다고 알리러 갈게요.”

“이비. 같이 가."

“아뇨, 저 혼자 갔다 올 수 있어요. 세스는 성녀님과 이야기 좀 하고 있어요.”

“이야기는 다음에 해도 괜찮아.”

단호한 거절에 나도 모르게 성녀 쪽을 봤다. 하지만 성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세스에게 동조했다.

“그래요, 지금은 두 분이 함께 있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미심쩍은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조금 전에 제 머리 뒤에 뭔가가 있었나요?"

“아니.”

"루시아가 뭔가를 잘못 본 모양입니다.”

둘 다 거짓말에 능숙하군. 나는 나중에 루시아를 추궁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안 갈 테니까 어서 이야기들 나누세요.”

“그것도 나중에. 당신은 지금 쉬어야 해.”

세스가 나를 안아 올리며 말했다. 엉겁결에 그의 목에 매달리게 된 나는 내가 무척 지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시라도 눈을 좀 붙여.”

나는 세스의 속삭임에 따라 눈을 감았다. 금방 의식이 가물가물해졌다. 어두컴컴한 꿈속에서 내 동생 브란의 목소리가 들렸다.

"만약 누나가 우리 셋이서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한다면 괜찮지만 기억나지 않는다면 빨리 나한테 돌아와야 해.“

분명 브란의 친구인 제이 리드에게서 전해들은 말이었는데, 꿈에선 브란이 나한테 직접 이야기하고 있었다.

“알겠지? 빨리 나한테 돌아와야 해.”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언제나 보고 싶었던 동생인데, 지금은 만나러 가고 싶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브란을 만나면 나를 감싸고 있는 이 온기를 잃어버릴 것 같은 막연한 불안감이 들었다.

* * *

“드, 드디어 도착했다!"

전 성기사인 헥터는 아스트리아의 수도를 보고 감격 에 떨었다. 시도 때도 없이 덤벼드는 암살자들을 물리치며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고생했던가.

눈물을 훔치는 그와 달리 성기사단장 레오디나스는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간을 너무 끌었군. 좀 더 서둘러야겠어.”

“······.”

그게 누구 때문이냐고 한 소리 하려던 헥터는 꾹 참았다. 선벌에서 겨우 벗어났지만 레오디나스의 얼굴은 여전히 파리했다. 다 죽어 가는 사람에게 질책을 하는 것도 좀 우스웠다.

“앞으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아스트리아 왕을 알현할 거다. 그래도 동맹국이니 지원군 요청을 거부하진 않겠지.”

“결국, 그렇게 되는군요.”

헥터는 긴 한숨을 쉬었다. 대신관이 반란을 일으켜 성녀를 친 상황에서 이제 해결 방법은 내전뿐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사라졌던 신성력이 돌아왔지만, 상대도 신성력을 쓸 수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내전 은 아주 지 루하고 끔찍한 싸움이 될 것이다.

“어쩔 수 없군요. 앞장서시죠.”

“넌 천공신의 선녀에게 의탁하려던 게 아니었나?"

“이런 상황에서 나 몰라라 하는 것도 우습지 않습니까. 신성 왕국의 일이 해결된 뒤에도 살아 있다면, 그 때는 신녀님을 모시며 살고 싶습니다.”

처음엔 뒤도 안 돌아보고 갈아탈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한평생을 바쳐 온 나라였다. 그런 곳이 망하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고맙다. 여기까지 데려와 준 것도, 함께 싸우겠다고 해 준 것도.”

”의외군요. 고맙다는 말을 할 줄 모르는 분인 줄 알았는데.”

이죽대는 헥터를 잠시 쏘아본 레오디나스가 말을 재촉했다.

그들은 신성 왕국의 기사 신분으로 입성 절차를 밟았다. 신분증을 확인한 병사가 활짝 웃었다.

“신성 왕국에서 오셨군요. 최근에 큰일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여러분도 고생을 많이 하신 것 같네요.”

”······예.”

“어서 들어가십시오. 아 참, 며칠 뒤에 재미있는 경기가 열립니다. 일정만 괜찮으시다면 기분 전환 삼아 들러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병사는 꼭 가보라며 전단지 한 장을 내밀었다. 무심코 그것을 받아 든 헥터는 의아해졌다.

“그리핀 런?”

‘그리핀 런’이라는 커다란 제목 아래에 그리핀의 옆모습이 단순한 그림자로 표현되어 있었다.

그 밑에는 ‘당선의 그리핀에 투표하세요!’라는 표어와 함께 경기 일정이 보기 쉽게 인쇄된 재였다.

“아스트리아에도 그리핀이 있습니까?"

“아, 로엔 공국에서 건너온 그리핀들입니다. 장애물 경주를 하는데, 경마보다 더 볼거리가 많다고 하니 꼭 구경하십시오.”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레오디나스가 이를 악물었다. 헥터의 손에서 전단지를 낚아챈 그는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당황한 헥터가 빠르게 그의 뒤를 쫓았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동맹이라더니 결국 이렇게 나오는군. 공국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그리핀을 훔쳐 자신들 것처럼 부리다니!"

핵터는 갑자기 급발진 하는 레오디나스를 멍하게 쳐다보다가 물었다.

“그렇다고 해도 다른 선택지가 없지 않습니까?”

”……맞아. 어쩔 수 없지.”

씁쓸한 얼굴로 구겨진 전단지를 바라보던 레오디나스가 표정을 바로잡았다.

“어떻게 해서든 성녀님을 되찾는 것이 우선이다. 다음 문제는 그때 가서 생각하면 돼.”

그는 비장한 얼굴로 왕궁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한숨을 쉰 헥터가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왕에게서 신성 왕국이 정상화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 뒤였다.

* * *

"클라멘스 백작 부인!"

라리사 모어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우아하게 몸을 돌렸다.

천사처럼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에 남자들이 감탄사를 냈다. 그들은 눈을 반짝이며 라리사의 주변에 모여 들었다.

“오늘 시 모임은 정말로 좋았습니다. 부인의 시를 들으며 꿈결처럼 아름다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초대장을 받았을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사교계의 천사가 귀환했다는 소식에 모두가 기뻐했습니다.“

순간 라리사 모어의 눈가가 경직됐다. 그녀는 언제나 ‘왕국 최고의 미인’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사교계의 천사’라는 호칭은 막 데뷔했을 때나 들었던 풋내 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노련하게 표정을 관리한 그녀가 담담하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오랜만의 모임이라 부족한 부분은 없었는지 모르겠네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오히려 선선했습니다.”

"요즘은 독서회라면서 이상한 게임을 하고 몰려다녀, 귀족다운 모임이 사라지고 있지 않습니까.”

남자들은 열심히 칭찬했지만, 그건 이블린이 만들어 낸 유행을 꺾지 못한데다가 시대에 뒤떨어진 고루한

느낌을 받았다는 뜻이었다. 라리사 모어의 입가가 살짝 떨렸다.

”……그렇군요.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지만 이만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적당히 대화를 끊은 라리사 모어는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순간, 천사처럼 아름다운 얼굴 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어떻게 된 거지?”

홱 돌아선 라리사 모어가 분노 어린 시선으로 마법사를 쏘아봤다. 움찔한 마법사는 깊게 고개를 숙였다.

"차에 넣은 약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곧 부인의 순종적인 노예가 될 것입니다.“

“그런 잔챙이들이 노예가 되면 뭐 해!"

라리사가 있는 대로 짜증을 내자 마법사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주요 인사들이 부인의 초대에 응하지 않는 것이 제 잘못은 아니지 않습니까?"

“닥쳐!"

라리사 모어는 잘근잘근 손톱을 씹었다. 계획이 자꾸만 어긋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귀환했다는 소문을 은밀하게 홀렸다.

가십을 좋아하는 사교계 사람들은 분명 이블린과의 싸움을 기대하고 잔뜩 모여들 것이다. 그때 모두에게 마법사의 약을 먹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아무런 반용이 없었다.

남자들은 방탈출이라는 이상한 게임을 한다고 끼리끼리 몰려다니기에 바빴고, 여지들은 통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반쯤 떠보려는 의도로 모임을 열었지만, 라리사가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잔챙이 중의 잔챙이뿐이었다. 중요한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다.

피가 날 정도로 손톱을 물어뜯던 그녀는 문득 의아함을 느꼈다.

‘남자들은 그렇다고 쳐도, 여자들은 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거지? 한번 알아봐야겠어.'

* * *

§ 모시는 말씀 §

다가오는 금요일, 당신을 엘마이어 공작 부인의 도서 모임에 초대합니다.

‧ 초대 자격

- ‘장미 정원의 비말’을 사랑하시는 분

‧ 주의 사항

- 자신의 참여 사실을 주변에 알리지 말 것

- 모임 중에 자신의 정체를 발설하지 말 것

- 대화는 비밀의 방 안에서만 할 것

*경고*

주의 사항을 어기실 경우 모임에서 퇴출당하실 수 있습니다

엘마이어 공작 부인과 함께 장미 정원의 주인이 되어 주세요!

√ GUEST NA1v1E :

口 기쁘게 참석하겠습니다.

口 참석할 수 없습니다.

※ 본 모임에서는 아동 및 청소년의 참여를 금지하고 있으니 유의하여 주십시오.

빌러스 가문의 셋째 딸, 다프네는 괴문서 같은 초대장을 받아 들고 눈을 깜박였다.

모두가 초대받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는 이블린의 독서 모임에 드디어 초대받은 것이다.

‘당연히 참석해야지!'

초대장에 이름을 쓰고 ‘기쁘게 참석하겠습니다.’에 체크하는 다프네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드디어 나도 모임에 갈 수 있어!'

얼마 뒤, 모두가 참석하고 싶어 하면서 모두가 참석 한 것을 비밀 로 한다는 이상한 모임의 티켓이 다프네의 손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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