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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185화 (185/240)

185화

“사도께선 저기 계십니다.”

루시아는 대지신의 발자국 옆으로 성녀를 안내했다.

기적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구름처럼 모여든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었다.

몇몇은 발자국 안으로 몸을 던지기까지 해서 신관들이 땀을 뻘뻘 홀리며 울타리를 세우는 중이었다.

“아아, 신이시여!"

"부디 저희를 용서하소서.”

미친 듯이 열광하는 사람들을 본 루시아가 시든 오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대지신의 발자국을 복원하는 일을 끝까지 반대했다. 신의 흔적을 인간의 손으로 만들다니, 신성 모독이나 다름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보다시피 폭발적이었다.

사람들은 신관들이 복원한 발자국 앞에 엎드려 울부짖었다. 그동안의 나태함을 반성하고, 온 마음을 다해 대지신을 따르는 신도가 되겠다고 맹세했다.

약간의 신성 모독으로 아주 많은 열혈 신자들을 생산한 것이다.

그 모습에 루시아는 더욱 심란해지고 말았다.

“성녀님, 사도께선 대체 무슨 생각이실까요?"

“어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증거만 필요로 한단다. 사도께선 그것을 알고 계셨던 거지.”

”……그냥 돈벌이로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요?"

“저런 믿음이 부족하구나.”

루시아는 몰래 입을 삐쭉거렸다.

‘성녀님은 아무것도 모르시면서.'

그녀가 봤을 때 이블린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청년들을 밀실에 가둬 놓고 희롱하지 않나, 눈이 돌아갈 정도로 야한 책을 찍어 내질 않나, 마법사와 그리핀을 부려 사람들을 현혹하질 않나.

‘대체 왜 이런 사람이 사도지?' 싶을 정도로 세속적 이면서 좀 미친 것 같은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대지신께선 그녀만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고 말씀하셨지.’

이블린이 일으킨 기적을 눈앞에서 목격한 루시아는 자신의 믿음을 시험당하는 기분이었다.

“사도께서 안 보이시는구나.”

“앗, 저쪽 그늘막에 계세요.”

성녀의 말에 정신을 차린 루시아는 서둘러 그녀를 이끌었다. 이내 작은 새처럼 명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형제님, 이 벽돌 좀 보세요. 이게 바로 대지신께서 살포시 밟고 가신 사도궁의 가루를 정성껏 컬러서 성스러운 불꽃으로 구워 낸 겁니다.”

어디서 구했는지 평신관의 사제복을 걸친 이블린이 중년의 상인을 구슬리고 있었다.

그녀는 작은 망치로 손에 든 하얀 벽돌을 두드렸다. 깡깡 하고 유리를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자자, 이 청아한 소리를 좀 들어 보세요. 여기에 형제님 이름과 생년월일을 쓰고, 꼭 이루고 싶은 소원을 적는 거예요."

이블린이 벽돌을 콕콕 짚으며 설명했다. 이미 그녀에게 반쯤 홀린 상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 후에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두 가지 선택지가 있어요. 첫 번째는 이 벽돌을 집에 가져가셔서 집안의 성물로 삼는 거족. 두 번째는 새롭게 지어지는 사도궁의 재료로 쓰는 겁니다.“

"예? 사도궁의 재료로요?"

"네, 매일매일 일찍 일어나서 기도 올리기 귀찮잖아요. 그런데 형제님의 이름이 새겨진 이 벽돌이 사도궁의 일부가 된다면 성녀님이 기도를 올리실 때 이 벽돌을 통해서 하늘로 슝 올라가겠죠? 그럼 형제님의 소원도 어떻게 된다? 자동으로 전달이 되겠죠?"

상인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블린이 더욱 갸륵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형제님, 이게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에요. 앞으로 사도궁이 있는 한 형제님의 이름이 영원히 남아 있는 거예요. 순례자들이 와서 사도궁의 벽을 쓰다듬을 때 형제님 이름이 박혀 있으면 얼마나 대단해 보이겠어요. 안 그래요?"

잠시 갈등하던 상인이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 숨을 쉬었다.

“어휴, 알겠습니다. 300장만 예약해 주십시오.”

“정말? 300장으로 만족하실 수 있어요? 마지막 기회인데 진짜후회 안하시죠?"

”······500장 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럼 500장 계약서 작성 도와드리겠습니다."

자본주의 미소를 지은 이블린이 계약서를 꺼냈다. 그녀의 안내에 따라 순식간에 계약서를 작성한 상인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저, 그리고 몇 장은 집에 기념품으로 가져가고 싶습니다.“

"500장 계약하셨으니 기념품 벽돌 몇 장 챙겨 드릴게요. 코크야!"

그러자 그늘막 뒤에서 새하얀 곰이 나타났다.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거대한 곰을 본 상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가 기겁하건 말건 곰은 얼음을 움직여 벽돌에 상인의 이름과 생년월일, 그리고 소원을 새겨 넣었다.

멋진 무늬까지 새겨진 벽돌과 곰을 번갈아 보던 상인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기념품 벽돌 100장을 더 예약하고 싶은데요.”

”가격은 좀 더 나가지만, 대지신께서 사도궁을 짓밟는 모습이 새겨진 벽돌이 있는데 어떠세요?"

“그럼 그걸로 200장 부탁드립니다.”

주머니가 탈탈 털린 상인은 뿌듯한 얼굴로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벽돌을 품에 안고 나갔다. 그러자 다음 상인이 헐레벌떡 의자에 앉았다.

“사제님, 기둥 예약도 받아 주신다는 소리를 듣고 왔습니다."

"네 네, 어디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성녀가 지켜보는 동안 이블린은 수백 장의 벽돌과 기둥을 뚝딱 팔아치웠다. 그제야 성녀의 존재를 알아 챈 이블린이 머쓱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성녀님 오셨어요?"

“바쁘신데 제가 방해한 것은 아닌지요.”

“아뇨, 기다리는 동안 심심해서 잠깐 소일거리로 하고 있었어요. 이쪽으로 좀 오실래요?"

소일거리라기엔 너무 본격적이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이블린은 조금 떨어진 강가로 그들을 안내했다. 사도궁에서 퍼낸 흙들이 강가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물 다루는 흑룡이 열심히 흙을 휘저어 반죽을 만들고, 그리핀들이 반죽에 꾹꾹이를 하는 중이었다.

아낌없이 주는 정령수의 잎과 수액을 잔뜩 넣어 완성된 반죽을 성검 주크가 일정한 간격으로 자르고, 성화 성냥이 순식간에 구워 냈다.

완성된 벽돌은 까미가 이리저리 돌려가며 검사한 후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공장이나 다름없는 모습에 놀란 루시아가 입을 떡 벌렸다.

“이쪽에 있는 벽돌은 예약이 끝났어요. 나머지도 제가 틀을 잡아 뒀으니 파는 것에 문제가 없을 거예요. 그리고 공작님이 필요한 물자와 사람들을 모으러 가셨는데 , 그걸로 급한 불은 끌 수 있을 겁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뭘요. 수수료와 인건비 다 받고 하는 건데요.”

이블린이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딱 잘랐다. 도와주는 걸 인정하기 싫어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대지신께서 보시기에도 건물들이 쑥쑥 올라오는 모습이 더 보기 좋지 않겠어요? 기부받아서 어느 세월에 다시 세울지 모르겠더라고요.”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고 꼭 갚겠습니다.”

성녀가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이블린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온화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던 성녀가 입을 열었다.

“사도님, 염치없다는 것은 알지만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저의 후계자인 루시아를 맡기고 싶습니다. 저보다는 사도님의 옆에서 더 배울 것이 많을 듯합니다.”

“…·예?!"

생각지도 못한 말에 놀란 루시아가 퍼드덕거렸다. 반면 이블린은 이미 짐작했던 것처럼 씨익 웃었다.

“잘됐네요. 저도 마침 루시아 님의 도움이 필요했거든요. 공작님께 여쭤보고 대답을 드릴게요.”

“서, 성녀님?"

루시아가 흔들리는 눈으로 성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성녀는 조용히 미소 지을 뿐이었다. 루시아의 신앙에 크나큰 위기가 찾아오고 있었다.

* * *

-사명을완수하면 원하는 것을 얻게 되리라.

기다리고 기다려서 겨우 들은 신탁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드님 옷고름 푸는 법 좀 가르쳐 달라고 했더니, 이게 무슨 동태전 옆구리 터지는 소리야?

“대지신께서 다른 말씀은 없으셨나요?"

다급하게 묻자 성녀가 미안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가들은 것은 그것뿐입니다.“

"진짜요?"

내 표정이 점점 울상으로 변하자 성녀가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제가 기도를 올려서 신탁을 다시 받아 보겠습니다."

“우와, 받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백 일 정도면 충분할 겁니다."

에라이, 신탁 기다리다가 화병 걸리겠네. 내 얼굴이 팍 일그러지는 것을 본 세스가 물었다.

“중요한 일이야?"

“……네, 그래도 어쩔 수 없죠.”

백일 동안 쑥과 마늘을 먹으며 얌전히 기다릴 수밖에.

“제물을 바치면 좀 더 빠르게 신탁을 받을 수 있어.”

“제물이요?"

“당신 대신 내가 바쳐도 돼.”

나는 제 팔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세스에게 놀라서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아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바치는 사람에게 소중할수록 가치가 있으니까. 손가락 하나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절대 안 돼요! 절대!"

너무 과격해서 무서운 세스를 말리고 나자 이번엔 복실이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녀석은 바들바들 떨면서 소중한 머리털을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코코도 자신의 날개를 말없이 그 위에 올려놓았다.

“세스, 애들이 이상한 걸 배웠잖아요!”

잘못된 교육을 바로잡고 나니 진이 쭉 빠졌다. 나는 백 일 뒤에 다시 신탁을 받겠다는 예약을 걸어 놓았다.

성녀는 조금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제 짧은 소견으로는, 사도께서 받으신 사명을 해결 하면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신탁이 아닐까 합니다.”

“그게······."

나는 깊은 한숨을 쉬며 고백했다.

“죄송합니다. 전 사도가 아니에요. 그때 솔직하게 말하면 저승에서 나가지 못하게 될까 봐 오해하시는 걸 알면서도 가만히 있었어요.”

"예?"

성녀가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바라봤다. 화를 낼 줄 알았던 그녀는 이내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혹시 사명을 잊으신 것은 아닐까요. 한 번쯤은 사도님의 처음으로 돌아가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겁니다.“

······내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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