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우리를 이끄신 분이여!"
“구원자시여!”
다른 사람들도 재빨리 그의 행동을 따라 했다. 나는 보신각종을 울리는 까치처럼 이마를 박는 사람들을 보고 하하 웃었다.
“여러분, 개수작 부리지 말고 어서 일어나세요.”
내가 아무리 시간과 돈이 남아돌아도 세스를 괴롭힌 놈들에게 퍼 줄 것은 없다.
”······예?"
“사도시여?"
기대했던 반용이 아닌지 고개를 든 사람들이 내 눈치를 살폈다. 깐깐징어가 비장하게 소리쳤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감히 신의 사도를 몰라 뵙고 의심했던 저의 죄입니다. 부디 용서를!”
“아, 그건 상관없어요. 오히려 무시해 줘서 고마웠어요. 덕분에 아주 편하게 대지신을 모실 수 있었답니다."
이건 진짜 솔직한 마음이었다. 방해하지 않고 내버려 둬 줘서 고마웠으니까.
하지만 내 말을 들은 깐깐징어의 얼굴은 마치 탈색 된 것처럼 하얗게 변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어리석음에 눈이 어두워…….”
"무엇보다 전 부탁을 받고 여기 온 거니까요. 감사를 하려면 루시아 님께 대신 하세요.”
은혜를 휘리릭 토스해 버리자 성녀를 돌보고 있던 루시아가 놀라서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여러분,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않나요?"
나는 여전히 사태 파악을 못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상냥하게 알려 주었다.
“대지신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셨나요? 아니면 용서 한다는 듯이라도 보여 주셨나요?"
내 기억엔 용서의 용자도 나오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 그럼 저희는 용서받지 못한 겁니까?"
"누가 여러분의 뺨을 수십 차례 때린 다음에 노래 한 곡 불러 주면 용서하실 건가요?"
“그건······.”
눈물 좀 짜내고 노래 한 곡 불렀다고 모든 것을 용서 받은 것처럼 구는 모습에 좀 어이가 없었다. 애초에 용서도 세스가 빌어 준 건 말이다.
하긴, 뭐 하늘의 구명도 닫혀서 좀 잘못했다고 주먹으로 맞을 리도 없으니 안심한 거겠지. 나는 하얗게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루시아 님, 이들을 데리고 사도궁이 있던 곳에 가 보세요. 그럼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게 되실 겁니다."
"예,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신입처럼 군기가 바짝 든 루시아가 벌떡 일어섰다. 깐깐징어는 내 옆에 남으려고 버렸지만, 루시아가 뭐라고 속삭이자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따라나섰다.
나는 그들이 언덕을 내려가 다른 사람들과 합류하는 것을 지켜봤다. 호기심을 느낀 복실이가 자기도 가고 싶다고 뿌뿌 울었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긴 가면 안 돼.”
-꾸?
"복실이가 싫어하는 징그러운 게 아주 많을 거거든."
-뿍!
징그러운 것을 질색하는 복실이가 세스 쪽으로 도망을 쳤다. 반면 겁먹은 표정으로 변한 코코가 작게 울었다. 나는 녀석의 깃털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코코도 알고 있구나.”
대지신은 대지를 관장하는 산.
그리고 지하 깊은 곳에 있는 저승을 지키는 신.
최근 저승강 올레길을 걸었던 나는 아주 뼈저리게 느꼈다. 대지신에게 밉보인 자는 감히 저승에 발을 들일 수 없다는 것을.
‘가자마자 입구 컷 당하겠지.’
몸이 찌그러져서 쥐포가 되어도 죽을 수가 없다. 끔찍한 고통을 끝내 줄 유일한 축복이 사라졌으니까.
나는 아무것도 안 했으면서 용서받았다고 착각하는 무임 승차자에게 차디찬 현실을 보여 주고 싶었다.
사도궁의 잔해 속에 파묻혀 있는 쥐포들의 비명 소리를 들으면 ‘아, 내가 이렇게 살다가는 죽지도 못하고 엿 되겠구나!'라는 작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세스, 제가 너무 못된 거 같아요?"
루시아 대신 성녀를 들보던 세스가 고개를 저었다.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 자들이라서. 그들에게도 좋은 약이 되겠지”
내가 아무리 못된 짓을 해도 나쁘다고 하지 않을 그였다. 나는 헤헤 웃으며 세스의 옆구리에 달라붙었다.
“세스는 항상 내 편이죠?"
"······응.“
담담하게 대꾸한 세스였지만, 나는 그가 수줍어서 어쩔 줄 몰라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증거처럼 허공에서 멈춘 손이 갈 길을 잃고 헤매는 중이었다.
으으, 남편이 너무 귀여워서 마구 쭈쭈해 버리고 싶다. 근데 안 되잖아?
“성녀님은 좀 어떠세요?"
"좀 야위신 것 같지만 상태는 나쁘지 않아. 깨어나시면 더 자세히 알 수 있겠지."
나는 여전히 정선을 차리지 못하는 성녀를 힐끔거렸다. 내가 예쁜 짓을 많이 했으니까, 대지신도 답을 주셨을 것이다. 높은 확률로 성녀가 그것을 전해 줄 테고.
‘ 어머님! 퀘스트 보상 좀 주세요!'
제 간절한 외침이 들리시나요. 저한데 아드님을 해 칠 권리를 좀 주십시오. 저 얼굴, 저 몸매를 옆에 두고 제가 왜 도를 닦아야 합니까, 어머님!
”……이비, 이제 도시락을 먹으러 갈까?"
내가 너무 이글거리는 눈으로 쳐다봤는지 움찔한 세스가 물었다. 나는 흑심을 숨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성녀는 수경에 비치는 사람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삐딱한 자세로 옥좌에 앉아 있던 아스트리아 왕이 입을 열었다.
-짐은 끝까지 반대했소. 우리 애가 가겠다고 우겨서 어쩔 수 없이 허락한 거요.
“힘든 결정이셨다는 걸 이해합니다.”
성녀는 진심으로 감사를 느꼈다. 그녀가 왕이었다면 결코 허락하지 않을 일이었기 때문이다.
정령수의 가지 하나로 신을 불러낼 수 있는 존재.
그야말로 신성의 화신이자 살아 있는 보물.
이블린이 선성 왕국에서 태어났다면 단 한 걸음도 밖으로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겹겹이 감추어 보호해야 할 정도로 귀한, 유일무이한 존재였으니까.
왕은그동안고이 숨겨 온 비밀이 탄로 난 것에 떨떠름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동맹국인 산성 왕국이 죽음의 팡이 되면 아스트리아의 손해니까. 이 또한 국익을 위한 길이라 생각하고 감수할 수밖에.
“모든 것이 제 어리석음 탓입니다.”
성녀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자산을 희생해 백성을 더 많이 살리는 길을 택했다. 그것이 무능한 지도자인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죽음에서 거부당하고 울부짖는 적들을 보자 자신의 결정 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블린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신성 왕국 전체가 저런 꼴이 되었을 것이다.
“사도께서 도외주시지 않았다면, 왕국은 저승으로 가지 못하는 자들이 고통으로 미쳐 날뛰는 재앙의 땅이 되었겠지요.”
그런 끔찍한 운명에서 왕국을 건져 준 이블린에게는 아무리 감시를· 해도 모자랐다.
-그래도 우리 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거요. 신성 왕국에선 감사 인사조차 받고 싶지 않은 것 같더군.
”……예, 그러신 것 같았습니다.“
생글생글 웃고 있지만 이블린이 그들을 싫어한다는 것은 아주 명백하게 보였다. 덕분에 마리노 사제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이 가슴앓이를 하고 있었다.
대지신을 강림시킬 정도로 신성한 사도가 눈을 홀기며 미워하는데 아무렇지도 않을 사람은 없었다. 정작 이블린은 그것조차 가식이라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정말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을 생각은 아니겠지?
"허락하신다면 사도께 가장 필요한 것을 채워 드리고자 합니다."
성녀는 자선이 준비한 대가를 조심스럽게 입에 담았다. 진지하게 이야기를 듣던 왕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나쁘진 않소. 다만 신성 왕국에서 우리 애한데 손을 뻗을 가능성이 있다는 게 좀 마음에 걸리는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기적을 목격한 자들은 감히 사도의 분노를 사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뭐, 좋소. 우리 애가 그쪽에 휘둘릴 것 같진 않으니 이번 한 번만큼은 속아 주지.
왕이 씩 웃었다. 성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감사를 표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평화 회담에서 하도록 합시다.
"예, 알겠습니다."
이야기가 끝나자 왕의 모습을 비추던 수경이 평범한 물그릇으로 돌아왔다. 성녀는 한숨을 쉬며 의자에 기댔다.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성녀님, 루시아입니다."
"들어오렴.“
전보다 얼굴이 핼쑥해진 루시아가 천막 문을 걷고 안으로 들어왔다. 사도궁이 가루처럼 부스러진 지금, 고위 신관들은 물론 성녀까지 천막을 치고 생활하는 중이었다.
“그래, 사도께서 지시하선 일은 다 해결했고?”
”······예.“
성녀의 물음에 루시아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이블린이 그녀에게 내린 지시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사도궁이 있던 자리를 뒤져서 적들을 모두 수거하는 것이었다.
루시아는 끔찍한 비명을 질러 대는 적들을 자루에 주워 담으며 몇 번이나 토해야 했다. 중간에 모든 일의 원흉인 대신관을 발견했지만 불쌍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이블린은 자루에 ‘대지신을 빡치게 한 자의 최후'라는 쪽지를 붙여서 카스티야로 돌려보냈다.
적들은 자선들이 타고 왔던 배에 실려서 카스티야로 돌아갔다. 이걸로 전쟁이 터질 수도 있었지만 아무도 반대하지 못했다.
전쟁의 끝은 죽음이나, 대지신의 분노를 사면 죽음조차 빼앗길 테니까.
둘째는 사도궁이 있던 자리의 흙을 퍼내서 엄청난 크기의 발자국 모양을 만드는 것이었다.
“대지신께서 마지막에 발 도장을 찍어 주셨으면 좋았을 테지만 어쩔 수 없죠. 직접 복원을 하는 수밖에.”
극비로 진행해야 한다는 말에 고위 신관들이 모두 삽을 잡고 흙을 퍼냈다. 신성력을 바닥까지 쥐어짜 가며 밤새도록 흙을 날라서 크고 아름다운 발자국 모양을 만들었다.
“좋네요. 이걸로 앞으로 천 년 동안은 우려먹을 수 있겠어요.”
완성된 발자국을 본 이블린은 무척 만족한 표정으로 몇 가지 제안을 했다.
그중 하나는 대지신이 사도궁을 발로 깔아뭉개는 장면을 모형으로 제작해서 순례자들에게 팔자는 것이었다.
대놓고 벌어지는 신성 모독에 혼란스러웠던 루시아는 이익 분배 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블린을 두고 도망쳐버렸다.
하지만 루시아의 이야기를 들은 성녀는 그저 재미있다는 것처럼 웃기만 했다.
“그래, 사도께선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지?"
“그게, 그레 신자들에게 벽돌을 팔고 계십니다.”
루시아가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일러바쳤다.
고개를 갸웃한 성녀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서 천막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