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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183화 (183/240)

183화

* * *

대지신의 정밀한 타격으로 적들이 있던 곳은 완전히 쑥대밭이 되었다. 모든 것을 으깨서 가루로 만든 거대한 주먹은 그제야 만족한 것처럼 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이야, 마늘도 저렇게 정성껏 다지지 는 않을 것 같은 데…….'

나는 감탄하며 정령수 뒤에서 기어 나왔다. 죽은 것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던 루시아가 고개를 들었다.

“이, 이블린 님?"

“아직 끝이 아니니까 어서 일어나요.”

발길질과 주먹질로 풀리기엔 대지신의 분노가 너무 컸다. 적들이 모두 사라졌다고 해도 한번 올라갔던 혈압이 쑥 내려갈 리는 없었다.

-키이이이잉!

그 증거처럼 공기가 계속 찢어지며 내 달팽이관을 괴롭히는 중이었다.

뻥 뚫린 하늘의 구멍으로부터 대지신의 불타는 시선이 느껴졌다. 이 모자란 놈들을 어떻게 조질까 고민하는 것 같았다.

"루시아 님. 이제는 제가 도와~ 수가 없어요. 당신 이해야 해요."

"우, 우윽.“

루시아가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갓 태어난 사슴처럼 계속 주저앉았다.

신앙심이 깊은 만큼 신의 분노가 더 무섭고 크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것이 가여우면서도 한숨이 나왔다.

그러게 왜 신을 빡치게 만들어서는…….

“이비.”

그때, 대지신의 분노 속에서 모두를 지켜 낸 남자가 너덜너덜해진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내가 뭘 하면 돼?"

“······.”

순간 나는 세스를 끝까지 버리지 않은 대지신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예쁜 자식이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남들을 지키려고 애쓰고, 다른 놈들이 나뒹굴 때 제일 먼저 정신 차려서 뭔가를 하려곡 하고.

‘이러는데 어떻게 안 예뻐하냐고!'

그만큼 세스가 짠해서 안타깝고, 팔자 좋게 드러누워 있는 깐깐징어와 그의 무리들이 미워졌다.

‘그냥 다 뒤지게 내버려 둘까.’

잠깐 악마의 유혹을 느꼈지만 여기까지 와서 모든 것을 망칠수는 없었다.

"노래를 불러야 돼요. 아니면 춤을 춰도 좋고요.”

분노에 불타는 엄마의 공격을 막으려면 울든지, 싹 싹 빌든지, 아니면 재롱을 떨어야 했다. 자식이 눈물 젖은 애교를 부리면 마음이 조금은 풀리기 마련이니까

"노래?"

뜻밖의 말이었는지 세스가 주춤했다. 그는 다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다들 정신을 놓고 드러누워 있거나 충격으로 토하는 중이었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 ‘지금부터 대지신님을 위해 샤방샤방을 부르겠습니다~!' 하고 춤을 출 용자는 없어 보였다.

“제가 대신할 수는 없어요. 지금 필요한 건 다 함께 부르는 노래거든요.”

바로 떼창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옛말에 여럿이 입을 모으면 쇠도 녹인다고 했다. 대지신의 얼어붙은 마음을 살살 녹일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원래는 루시아 님에게 부탁할 생각이었는데.”

몸도 못 가누고 휘청거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도저히 노래를 부를 상황이 아니었다. 내가 한숨을 쉬고 시무룩해하자 세스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내가 부를게.”

“우와, 정말? 진짜? 불러 줄 수 있어요?"

“너무 기대하는 것 같은데?"

”헤헤, 세스가 한 번도 안 불러 줬잖아요.”

슬며시 달라붙자 세스가 못 이기는 척하며 나를 안아 주었다.

나는 머뭇거리는 그를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한참을 망설이던 세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성가였다.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이 상처 입은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왔다. 비록 맑고 투명하진 않았으나, 그것이 담고 있는 뜻은 가슴 아프게 전해졌다.

자비하신 분이여, 저를 불쌍하게 여기소서. 저를 내 치지 마시옵고 죄를 용서하소서.

다른 이 들을 지키다가 상처투성이가 된 남자가 또다시 모두를 위해서 용서를 빌고 있었다.

나는 괜히 울컥하는 것을 느끼며 세스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하늘 높은 곳에서 아래를 쏘아보던 분노 어린 시선이 조금씩 누그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자 정신을 잃고 나뒹굴던 자들이 하나둘 깨어나기 시작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그들은 울고 불며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모두가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멍하니 보던 나는 세스에게서 벗어나 고개를 푹 숙였다.

“이비?"

”……미안해요. 세스한테 저들의 잘못을 대선 빌라고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처음엔 세스를 버린 사람들에게 ‘세스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남음.’ 이라는 빛을 지우고 싶었다.

하지만 내 욕심 때문에 자기가 하지도 않은 일로 빌고 있는 세스를 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껏 제 잘못도 아닌 일로 고통받았던 사람에게 내가 너무 무심했다.

어깨가 처진 나를 보고 작게 웃은 세스가 속삭였다.

“이비, 나는 저들을 위해 빈 게 아니야. 당신을 만날 때까지 살아남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한 거야.”

”······네?"

“여기 와서 다시 한 번 깨달았어. 내 가족은 저들이 아니라 당신과 내 옆에 있는 이들이라는 것을.”

세스는 마지막 남은 미련을 모조리 털어 버린 것처럼 후련한 얼굴이었다. 갑작스러운 커밍아웃에 당황한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괜찮아요?"

“뭐가?”

“저는 세스가…….”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결국 지금껏 묻지 못했단 말을 토해 냈다.

"복수가 끝나면 떠날 거라고 생각했어요.”

새파란 눈이 나를 마주 봤다. 당황하거나 흔들림이 없는 그의 시선에 나는 내 말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언제나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잖아요. 다음 공작이 누가 되든 상관없도록.”

내가 2년 계약직이 아니면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언제나 내가 퇴직한 뒤를 생각해야 했다. 그래서 처음엔 개인 시녀도 받지 않고 모두와 거리를 두려고 애썼다.

거리 두기를 포기한 다음에는 내가 아끼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주고, 내가 사라져도 물경력이 되지 않도록 했다.

그러다가 문득 세스가 나와 비슷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프리지어 궁의 사람들은 세스를 아끼고 사랑했다. 시녀장인 리드 부인만 해도 그를 키운 사람으로서의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세스는 그들과 깊은 관계를 맺는 대신에 실적과 경력을 주었다.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공작 자리에 올라도 그 들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말이다.

"처음엔 신전으로 돌아가려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세스는 신전에 미련이 없는 듯했고 오히려 신전을 적대하는 분위기였다.

“나중에는 모든 것을 내던지고 떠날 생각인가 보다 생각하게 됐어요.”

그런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세스가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면 내가 보쌈해서 데려갈 생각이었다. 나는 능력 있는 여자니까.

"맞아.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 그러려고 했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끝을 맞이할 생각이었지.”

"······.“

“그럼 나를 믿어 줄 테니까. 내가 형을 해치지 않고, 동생을 죽이지 않고, 이 자리를 탐내지 않았다는 것을 모두가 알아줄 거라고 생각했어. 어린애 같지?"

세스는 자신이 쌓아 올린 모든 것을 포기해서라도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 싶었던 거다. 누군가는 어리석다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그런 세스를 이해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생각이 없어.”

"······왜요?"

"처음부터 나를 믿어 주는 사람이 생겼으니까.”

세스가 조심스럽게 내 뺨을 어루만졌다.

“내 진심을 모두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내가 말하면 그대로 믿어 주는 사람이, 내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울고 싶지 않은데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런 내 이마에 살짝 키스한 세스가 어깨 위에서 눈치를 보고 있는 복실이와 코코를 살짝 간질였다.

“그리고 이젠 내게도 책임질 가족이 생겼으니, 어른이 되어야지."

그는 하늘을 날아다니며 하트를 그리는 고양이들과 〈대지신님은 사랑입니다♡〉라는 천을 다시 펼쳐 들고 있는 까미와 흑룡, 그리고 대지신이 노려보거나 말거나 그루밍에 여념이 없는 코크 곰과 발치에서 꼬물꼬물 돌아다니는 주크와 성냥을 바라봤다.

“사실 내가 공작이 아니면 앞으로 더 늘어날 가족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도 조금은 있었어.”

“죄, 죄송합니다! 더 이상 늘리지 않도록 정말 조심 하겠습니다!”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삐질삐질 땀을 홀리는 나를 보고 세스가 웃었다.

“아니, 앞으로 얼마든지 가족을 늘려도 돼. 수가 늘어날수록 당신이 어디 도망가지 못할 테니까 더 안심이 되거든.”

아앗 갑자기 선녀와 나무꾼이 생각났다. 무작정 가족을 늘리는 쪽이 나니까 내가 나무꾼인가?

그때, 우르릉 콰르릉 하늘이 울렸다. 귀가 멀어 버릴 것 같은 소리에 노래를 부르던 사람들이 아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하지만 이미 한번 비슷한 소리를 들은 나는 그것이 대지신의 웃음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 이야기를 엿듣고 계셨던 것은 아니겠지? 아들의 사생활을 지켜 주세요.’

힐끔거리며 하늘을 보자 갑자기 황금색 빛무리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화려하게 꼬물거리던 그것은 이내 사람의 형체로 변했다.

대지신의 현신인가 싶어서 움찔한 나는 그것이 적들 에게 인질로 잡혀 있던 성녀 마르타라는 것을 깨달았다. 얼른 손을 내밀자 세스가 나를 도와 성녀를 받아 들었다.

대지신이 밟기 전에 미리 빼돌렸는지 어디 구겨진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안전한 딜리버리 서비스 감사합니다.

“아악! 성녀님!"

눈물을 홀리며 노래를 부리던 루시아가 울며불며 달려왔다. 무거운데 잘됐다 싶었던 나는 얼른 그녀에게 성녀를 떠넘겼다.

-오직 너만이 나를 보고 있었노라.

그리고 온 하늘에 우르릉 광광 하는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귀를 틀어막았다.

아무래도 성녀가 대신 신탁을 전하는 것은 대지신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그런 것 같았다.

-앞으로도 기대하겠다.

······예? 뭘요?

그때 정령수가 파직파직 신호 불량을 일으켰다. 대 지신의 강림을 떠받치던 성물들이 더 이상 버티지 못 하고 파업을 선언한 것 같았다.

하늘에 펼쳐진 그물이 하냐둘 끊어지더니 중앙으로 휘리릭 말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시선이 느껴지던 하늘의 문도 천천히 아물었다. 구멍을 뚫은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엄청나게 다행이었다.

“아아, 사도시여!”

그리고 깐깐징어가 퍽 소리를 내며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방금 엄청 아플 것 같은 소리가 나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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