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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181화 (181/240)

181화

"당장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공격하겠다!“

우리를 포위한 사람들은 제대로 된 병사라고 할 수 없었다. 무기는 조잡한 나무창이 전부였고, 몸에 걸친 방어구도 통일되지 않고 제각각이었다.

그런데도 두려움 하나 없이 무기를 치켜들고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보통 거대 뱀과 날고양이와 곰을 보면 기겁해서 도망가는데 말이다.

“멈추세요! 나는 차기 성녀인 루시아입니다!"

그때, 루시아가 앞으로 나서며 목에 걸고 있던 성표를 내밀었다. 황금색의 성표를 확인한 사람들이 기겁하며 무릎을 꿇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죄송합니다! 부디 용서를!"

우르르 무릎 꿇는 사람들이 마치 도미노처럼 보였다. 안도한 루시아가 웃는 얼굴로 그들을 달랬다.

“갑자기 나타나 여러분을 놀라게 했군요. 이제 걱정 하지 마세요. 내가 여러분과 함께하겠습니다.”

그 말에 무릎을 꿇고 있던 사람들이 번쩍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여 주자 그들 중 하나가 벌떡 일어서서 소리쳤다.

"차기 성녀께서 우리에게 돌아오셨다!"

”와! 차기 성녀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우와아! 루시아 님!"

지치고 날이 서 있던 얼굴에 희망이 번졌다. 하지만 환호하는 것도 잠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비켜라! 다들 어서 비켜!"

초라한 옷을 입은 사람들과 달리, 말을 타고은빛 갑옷으로 무장한 이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채찍을 휘둘러 사람들을 물러서게 한 후에 루시아의 바로 앞에서 말을 멈췄다. 가장 선두에 있던 남자가입을 열었다.

"루시아 님, 대체 왜 벌써 돌아오신 겁니까? 성녀님의 분부를 잊으셨습니까?"

굉장히 깐깐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당장 아무 기숙사의 사감으로 밀어 넣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마리노 사제님, 전 성녀님을 구하기 위해…….”

“아직도 그런 어린애 같은 소리를 하시는군요!"

루시아가 움찔하며 말을 멈추자 깐깐징어는 더욱 그녀를 윽박질렀다.

“대지신께서는 성전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불의 심판이 임하리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녀님께서는 모두를 살리기 위해 기꺼이 자산을 회생하신 겁니다.”

"······."

“그 거룩한 뜻을 이런 식으로 저버리실 겁니까? 당장 돌아가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십시오!”

고개를 숙인 루시아가 부들부들 어깨를 떨었다.

오직 성녀를 살리기 위해 다른 나라까지 달려와서, 또래인 내게 고개를 숙여 가며 빌고, 내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했던 그 모든 순간이 단순한 어린애의 투정으로 매도당했다.

하지만 루시아는 울지 않았다. 다시 고개를 치켜들고 강경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대지신의 신탁에 따라 성녀님을 구하고 모두에게 승리를 가져다줄 분을 모셔 온 겁니다. 당선의 뜻이 대지신의 위에 있지 않다면 내 말을 따르세요!"

”……승리? 저들이 말입니까?"

깐깐징어가 나를 보고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파문당한 성기사에 아무 능력도 없어 보이는 여자가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준다고요?"

“네 이놈! 감히 어디서 우리 마님께 그런 망발을 하느냐! 이런 괘씸한 놈 같으니!"

느닷없는 호통에 깜짝 놀란 나는 뒤를 돌아봤다. 까미의 수레를 끌고 온 사람들이 노발대발하며 깐깐징어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내가 전에도 너 같은 놈을 많이 봤다! 하지만 전부 우리 마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개처럼 빌었다.”

“맞다. 맞다!"

“나중에 후회할 짓 하지 말고 어서 잘못했다고 빌어!"

분명 내 편을 들어 주는데 어쩐지 아닌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이없는 표정을 지은 깐깐징어가 코웃음을 쳤다.

"흥, 그 주인에 그 하인이군. 상대할 가치도 없겠어."

그 모습에 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자비로운 대지신께서 왜 성전을 명령하셨을까요? 혹시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뭐?"

"왜 성전에서 이기지 못하면 죄다 태워 버린다고 하셨을까요? 평소에는 그러시지 않으셨잖아요?"

“감히 신자도 아닌 자가······."

"아, 생각해 본 적이 없구나? 그냥 영혼 없이 시킨 대로해야지 했구나?"

내 말에 깐깐징어가 마치 못에 찔린 것처럼 부들거렸다. 그러자 루시아가 불안한 얼굴로 내 소매를 잡았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 모르면 말고요.”

내가 한걸음 물러서자 깐깐징어가 완전히 빡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적의 숫자가 얼마인지나 알고 있소?"

"아뇨?“

"신성력을 무한하게 쓸 수 있는 신관만 수백이고, 병사는 수천 명이 넘소. 여기에 카스티야에서 건너온 정체불명의 괴물들이 우글거리오.”

“괴물이요?”

“스치기만 해도 중독되어 피를 토하게 만드는 불사의 괴물들이지. 해결 방법은 신성력뿐이지만 우리는 현재 신성력을 쓸 수가 없소.”

음, 듣기만 해도 답이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겠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깐깐징어가 한층 더 목소리를 높여서 물었다.

"당신이 신관들과 병사들, 그리고 괴물들을 물리칠 수 있소?"

“전혀요. 자신 없는데요?"

나는 유리나 다름없이 허약한 몸이라서 전투에는 영 소질이 없다. 내 당당한 대답에 잠시 멈칫한 깐깐징어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럼 여긴 대체 왜 온 거요?"

“가족 여행이요. 애들이 할머니가 보고 싶다고 해서 할머니 집으로 온 건데요?"

예상 못 한 대답이었던 모양인지 깐깐징어의 눈이 흔들렸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는 우리의 힘만으로 성전을 치를 것이오. 그래야만 우리의 신앙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오. 외부인의 도움은 필요 없소. 알아듣겠소?"

"네, 열심히 하세요."

내가 어깨를 으쓱하자 왠지 모르게 씩씩거리던 깐깐징어가 말머리를 돌렸다.

"성도들이여! 나를 따르라!"

하지만 사람들은 선뜻 그를 따르지 않았다. 이쪽에 차기 성녀인 루시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깐깐징어가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이교도와 이국의 짐승들에게 자신의 믿음을 맡길 생각인가?"

그제야 머뭇거리던 사람들이 그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십 명은 계속 남아 자리를 지켰다. 깐깐징어가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대들은 대체 무엇을 하나!"

‘루시아 님은 차기 성녀이십니다. 이분을 지키는 것 또한 저희의 사명입니다.”

“쯧, 병력 하나가 아쉬울 때거늘.”

못마땅한 얼굴로 루시아를 돌아본 깐깐징어가 말을 재촉했다. 곧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사라졌다.

“휴, 이제야 갔네요.”

북적거리던 사람들이 사라지자 나지막한 언덕의 풍경이 보였다.

언덕 위에서 보이는 성벽 넘어 성녀가 인질로 잡혀 있다는 사도궁이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빛기둥이 궁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면 다행히 성녀는 아직 무사한 것 같았다.

"당신에게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 주고 싶었는데.”

이곳을 목적지로 설정했던 세스가 안타깝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무성한 갈대가 흔들리고 있었을 언덕은 사람들의 발길에 짓밟혀 엉망이 되어 있었다.

”에이, 어쩔 수 없죠. 빨리 해결하고 풍경 좋은 곳에서 도시락이나 먹읍시다.”

-꾸꾸!

내 말에 복실이가 찬성이라는 것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그때, 루시아가 울먹이며 내게 물었다.

“이블린 님, 저를 속이신 건가요?"

"네? 제가요?"

“서, 성녀님을 구해 주신다고 해 놓고…….”

“네, 구해야죠. 지금부터 구할 건데요?"

루시아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나는 이마를 긁적거렸다.

“아까 그 아저씨는 저보고 선관이며 병사며 괴물을 물리칠 수 있냐고 물었잖아요. 하지만 그거랑 성녀님을 구하는 건 별개잖아요?"

"······예?"

루시아는 더욱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보다 못한 세스가 나를 다독였다.

“이비,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해 줘.”

“아, 처음부터요? 어디서부터 해야 하지?"

고민하는 사이, 세스는 적당한 나무 그늘을 골라 돗자리를 펴고 나를 앉혔다. 나든' 그가 바구니에서 꺼내 주는 과일 주스를 받아 마시면서 입을 열었다.

"루시아 님, 제가 옛날이야기 하나 해 드릴게요.”

옛날 어떤 사람이 속이 훤히 보이는 개미집을 하나 주웠다. 꼬물꼬물 움직이는 개미가 귀여웠기 때문에 가끔 먹이도 주고 설탕도 뿌려 주면서 개미집을 지켜봤다.

개미들은 사람을 칭송하며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개미집에 반란이 일어나서 여왕개미가 인질로 잡혔다.

악당개미들은 여왕개미를 인질로 잡고 사람을 협박 했다. 마음 같아선 악당개미들을 짓이겨 버리고 싶었지만, 개미집에 손을 넣었다간 개미집 전체가 붕괴될 판이었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악당개미들이 요구하는 대로 설탕을 주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개미 따위에게 휘둘리는 것에 자존심이 상해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가장 화가 나는 것은 여왕이 인질로 잡히고 자신이 협박을 당하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다른 개미들이었다.

“사람은 당장 여왕개미를 구하라고, 저 새끼들 안 죽이면 개미집을 다 불태워 버리겠다고 말했죠.”

그랬더니 개미 들은 힘을 기르겠다는 핑계로 구석으로 도망을 쳐 버렸다. 그렇게 칭송하고 노래를 부르더니, 본심은 저 살기에 바빴던 것이다.

“자, 이런 상황에서 이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할까요. 뒤늦게 개미 들이 열심히 싸워서 악당을 이기 면 박수를 쳐 줄까요? 여왕개미는 이미 뒤졌는데?"

얼굴이 하얗게 탈색된 루시아가 나를 바라보며 입술을 떨고 있었다.

“시, 신, 신성 모독이에요!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을?!”

”에이, 뭘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세요. 이건 그냥 옛날이야기라니까.”

나는 세스가 입에 넣어 주는 포도알을 씹었다. 아이고, 올해 포도가 참 달다.

"루시아가 그 사람이면 어떨 거 같아요? 앞으로 개미들이 귀엽게 보일까요?"

내 생각에 대지신은 지금 머리끝까지 열이 오르다 못해서 눈에서 불이 나오고 있을 거다. 잘 싸우고 잘 이겼다는 방법으로 해결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그, 그럼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하죠?"

뒤늦게 현실을 깨달은 루시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먼 하늘을 바라봤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다른 방법은 없다. 개미집 뚜껑을 따야지.

나는 사도궁이 정면으로 보이는 양지바른 곳에 정령 수의 가지를 꽂았다.

"잘 부탁한다. 이번 한 번만 성공하면 앞으로 수백만 명이 널 우러러보면서 칭송하게 될 거야.”

정령수의 가지가 파르르 떨렸다. 나 역시 원기옥을 모으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그러자 세스가 뒤에서 나를 감싸며 손을 잡았다.

“무리하지 말라고 해 봤자 듣지 않을 테니까, 적어도 함께 있게 해 줘.”

“이번에는 별일 없을 걸요? 없을 거예요. 아마.”

세스는 아무 말 없이 웃었다. 나는 입을 삐쭉거리며 정령수의 가지에 내 힘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지금 성녀에게 모든 신성력이 몰리는 것은 그녀가 피뢰침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것보다 더 반응성이 좋은 피뢰침을 만들어 신성력을 끌어 올 생각이었다. 앞으로의 작업을 위한 연료다.

부르르 떨리던 정령수의 가지가 쭈욱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내 황금색의 번개가 우리에게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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