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 * *
‘이걸로 뭘 하려는 걸까?'
성녀 후보 루시아의 앞에는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야한 원고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계, 계속 보고 싶을 정도로 흥미진진한 내용이기는 해. 하지만 독서 모임에 이런 것을 내밀었다간 엄청나 게 비난받을 텐데.'
점잖은 귀족 아가씨들은 읽자마자 까무러칠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체면 때문에 질색하는 척 연기할 것이다.
루시아는 이블린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자, 여러분. 새로운 원고가 도착했습니다. 작가님들이 아주 힘내셨네요.”
잠깐 사라졌던 이블린이 또 한 아름의 원고를 안고 나타났다. 할 일이 없어 놀고 있던 의상부 시녀들이 와~ 하고 심드렁한 함성을 질렀다.
이블린은 각자의 앞에 일정 분량의 원고를 척척 내려놓으며 당부했다.
"날것 그대로의 느낌은 잘 살리면서 우아하고 품위 있는 문체만 살짝 더 해 주세요.”
"흥, 너무 자주 들어서 이제 귀에 딱지가 앉겠네요.”
입을 삐쭉거린 카밀라가 펜을 집어 들고 원고를 팔락팔락 넘겼다. 그리고 몇 가지 단어와 어미를 귀족들이 즐겨 쓰는 것으로 고치기 시작했다.
모두가 원고에 집중하는 것을 느낀 루시아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저, 저기! 이블린 님. 성국에는 언제 가실 건가요?"
내뱉고 나니 너무 무례했나 싶어서 목이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더 지체했다간 성녀 마르타를 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재촉 드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믿을 사람은 이블린 님밖에 없어서…….”
성녀 마르타는 대신관의 반란이 일어나기 전에 후계자인 루시아를 아스트리아로 도피시켰다.
“모든 일이 끝난 뒤에 돌아오렴.”
그때 루시아는 마르타가 죽음을 각오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처럼 여긴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루시아는 필사적으로 대지신께 기도했다. 그리고 뜻밖의 신탁을 받았다.
[나의 기사 옆을 지키는 사도에게 네가 원하는 길이 있을 것이다.]
처음엔 무슨 뜻인지 몰랐다. 하지만 이블린을 보는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오직 그녀만이 성녀 마르타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을.
다행히 이블린은 순순히 루시아의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루시아는 성국으로 가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중이었다.
“아, 맞다. 성국에 가야 했죠?"
완전히 잊고 있었는지 눈을 크게 뜬 이블린이 마리아를 돌아봤다.
“마리아, 일주일 뒤에 자리를 비워도 괜찮을까요?"
“안 돼요. 일주일 뒤에 ‘그리핀 런’ 오픈 행사가 있다는 거 잊었어요?"
단호한 마리아의 대답에 이블린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 참 그랬지. 그럼 사흘 뒤는 어때요?"
“이블린, 사흘 뒤는 제가 데뷔하는 날이에요. 이블린이 꼭 참석해야 한다고요.”
이번엔 다이애나가 울상을 지었다. 잊어서 미안하다고 손을 싹싹 비빈 이블린이 루시아를 바라봤다.
“시간이 없어서 그런데 내일 갔다 오면 어떨까요?”
"예?“
“내일 가서 후다닥 해결하고 정리한 다음 모레 돌아오면 될 것 같은데요.”
멍하게 이블린을 바라보던 루시아가 당황해하며 말했다.
“이블린 님, 대신관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에요. 카스티야의 지원 병력까지 있으니 그들을 물리치기 위해선 전쟁이 필요할 겁니다.”
“아, 그건 괜찮아요. 적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하루 내에 정리될 테니까요.”
이블린은 별일 아니라는 것처럼 활짝 웃었다. 루시아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무슨 묘안이 라도 있으신가요?"
“대지신께서 이끌어 주실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참, 제가 부탁한 것은 어떻게 됐어요?"
“아, 네 지시하산 대로 모두 옮겨 두었습니다."
이블린은 루시아의 부탁을 들어주면서 한 가지를 요구했다. 바로 대지신의 성물이었다.
정확히는 교단이 보유하고 있는 성물들을 그녀가 원하는 장소에 갖다 두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 장소에 특별한 뭔가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이블린이 지도를 보면서 아무렇게나 툭툭 짚은 장소였다.
"좋아요. 성물이 있으면 더 쉽게 끝날 것 같네요.”
자신만만하게 웃는 이블린을 보며 루시아는 불안감을 느꼈다.
‘정말 이 사람을 믿어도 되는 걸까?'
대지신의 신탁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자신이 뜻을 잘못 이해한 것은 아닌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 * *
눈을 뜨자 앞머리가 헝클어진 세스가 내 옆에 누워 있었다. 살포시 눈을 감은 모습이 깊게 잠든 것 같았지 만. 이전에 몇 번이나 속은 나는 그냥 자는 척하는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 눈뜨자마자 보이는 미남이라니 행복하구나.'
벌써 수십 번을 봤지만 조금도 질리지 않는 풍경이었다. 앞으로 평생을 봐도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가운을 입은 것은 나 보라는 친절인가?'
잘 때도 야무지게 옷을 챙겨 입던 세스는 요즘 가운을 걸치고 사슴 같은 목선과 만져 보고 싶은 쇄골을 자랑했다. 아무래도 나를 유혹하려는 의도 같아서 열심 히 감상하고 있었다.
그때, 자는 척하던 세스가 살짝 웃었다. 성냥개비가 집을 지어도 될 것 같은 긴 속눈썹 사이로 새파란 눈동자가 드러났다.
“이비, 당신이 보고 있으면 얼굴이 간지러워.”
얼굴이 아니라 목선과 쇄골을 눈으로 핥고 있었던 나는 점잖게 헛기침을 했다.
"잘 잤어요?"
“응, 당신이 옆에 있으면 늘 잘 자.”
사실 세스의 옆에서 잘 때 제일 걱정한 것이 그의 숙면 문제였다. 기척에 민감한 세스는 내가 뒤척이기만 해도 잠에서 깨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스는 심각한 불면증이 있었고, 내가 옆에 있으면 그나마 눈을 붙인다고 했다. 그 말이 사실이었는지 요즘 세스의 얼굴은 한층 더 싱그러워져 있었다.
“누구 남편이 이렇게 잘생겼을까?"
"······."
내 속삭임에 세스의 귀가 조금 빨개졌다. 전에도 느꼈는데 세스는 남편이라고 불러 주면 되게 좋아한다.
가련한 냉미남이 어울리지 않게 수줍어하는 모습에 나는 꼬물꼬물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세스가 그런 나를 꼭 끌어안는 순간이었다.
-뀻!
-깟!
달칵 문이 열리며 하얗고 검은 것들이 빙글빙글 돌며 날아들었다. 복실이와 코코였다.
아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본 세스가 팔을 풀고 일어났다. 그리고 침실을 휘저으며 장난을 치는 녀석들을 불러들였다.
세스의 품에 찰싹 달라붙은 둘이 눈을 반짝이며 잔뜩 기대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 물었다.
"할머니 집에 가고 싶어서 이렇게 일찍 일어난 거야?"
-꾸!
-까각!
평소라면 이 시간에 바구니 속에 틀어박혀 쿨쿨 자고 있을 녀석들이 기운차게 파닥거렸다. 처음 떠나는 가족 여행에 잔뜩 흥분한 것 같았다.
오늘은 날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한숨을 쉰 세스가 둘을 안고 일어났다.
“당신은 좀 더 자다가 천천히 준비해"
내 이마에 키스한 세스가 욕실로 향했다. 아쉬움이 느껴지는 입맞춤에 나는 괜히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우리는 여전히 방법을 찾지 못했다.
나는 키스만 하면 기절했고, 끌어안는 것 이상의 접촉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세스가 혹시나 해서 나바르 왕국에서 받아 온 무녀의 팔찌는 내가 끼자마자 두 동강 났다. 막 각성한 무녀가 신력을 제어하지 못할 때 끼는 거라는데, 나와는 좀 안 맞았던 모양이다.
이런 상황에 세스가 공작새처럼 유혹을 해 대니 심란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누가 복실이 아빠 아니랄까 봐 사람 홀리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나는 이번 성국행에서 대지신과 상담을 하기로 결심 했다. ‘아드님과 부부로 살고 싶어서 제 체질을 개선할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면 좀 도와주지 않을까?
-뿍!
내가 딴생각을 하는 사이 , 물에 젖어서 홀쭉해진 복실이가 푸르르 날아왔다. 나는 젖어서 차가운 머리를 내 뺨에 비벼 대는 복실이 때문에 비명을 질렀다.
”으악, 차가워! 알았어, 알았어. 일어날게!"
아무래도 애들 때문에 더 빨리 가야 할 것 같았다.
* * *
“이, 이블린 님?"
루시아는 돗자리와 바구니를 옆구리에 끼고 나타난 우리를 보고 얼굴에 경련을 일으켰다.
아이고, 어린 나이에 저러면 풍이 오는데.
”······오늘이 성국으로 가는 날인데, 잊지는 않으셨죠?"
"네, 그럼요. 아침 일찍부터 열심히 준비했어요."
“그, 그러시군요.”
루시아가 심란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성녀가 인질로 잡혀 있는데 우리가 너무 놀러 가는 기분을 낸 것 같았다.
“이건 가다가 배고플 것 같아서 도시락을 준비한 거예요. 여러분의 몫도 있어요.”
"······네.”
힘겹게 고개를 끄떡이는 루시아의 뒤로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신관들이 보였다. 그들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루시아에게 따졌다.
"루시아 님, 저들을 믿어도 되겠습니까?"
“이렇게 중요한 때에 저런 사람들을 뭘 믿고 데려가시려는 겁니까?"
나는 어리둥절하게 그들을 바라봤다. 누가 누구를 데려간다는 말이지?
그때, 구르륵 구르륵 비둘기 소리가 나더니 하늘에서 날고양이들이 내려왔다. 도시락으로 보이는 가방을 하나씩 짊어진 모습이었다.
“응? 너희도 따라가려고?"
-구르르륵!
고양이들의 대장인 우유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덜거덕덜거덕" 수레 끄는 소리가 났다.
“마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수레에 온갖 짐을 쌓아 올린 사람들이 땀을 뻘뻘 홀리며 나타났다. 그 뒤로 까미가 영화배우처럼 우아하게 등장했다. 수레에 실린 것은 다 까미의 짐인 것 같았다.
도시락으로 보이는 것을 입에 문 흑룡이 그녀의 뒤를 얌전히 따라오고 있었다.
"음, 그래. 둘도 같이 가는 거구나.“
가족 여행이라는 말에 따라나선 모양이니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잠시 뒤에 마지막 멤버인 코크 곰이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등에는 정령수의 가지와 주크, 그리고 성냥을 매달고 있었다.
세스의 어깨에서 포르르 날아간 복실이와 코코가 녀석들과 어울려서 푸다닥거리기 시작했다. 신이 나서 팔짝거리는 녀석들을 보니, 내가 너무 가족들에게 소흘했나 싶어서 반성하게 되었다.
-뿌뿌!
복실이가 빨리 출발하자고 나를 재촉했다. 나는 고양이들 틈에 끼여서 새파랗게 질린 신관들에게 말했다.
“어, 일단 저희 가족 여행에 동참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러니 헛소리하지 말고 입 다물고 얌전히 가시죠.”
선관들은 무어라 말하려는 것처럼 입을 달싹였지만, 고양이들이 구륵구륵 울자 금세 조용해졌다.
나는 배용을 하러 나온 시녀장과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별일 없으면 내일쯤에 돌아올게요. 아버님을 잘 부탁드려요. 투정 부리면 정령주 한 잔 먹이고 재우세요.”
"예, 이곳의 일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믿음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시녀장이 한 걸음 물러서서 깊게 절을 했다.
“무사히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사람들에게 손을 흔든 나는 주크를 들었다. 왕의 길이 열리자 우리는 순식간에 성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웬 놈들이냐!"
그리고 무장한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이게 되었다. 응? 여기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