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왜 그녀의 말을 막는 거지? 너한테 불리한 소리가 나올 것 같아서?"
제스터가 굉장히 화난 얼굴로 으르렁거렸다. 결정적인 순간에 세스가 끼어들어서 짜증이 난 것 같았다.
“난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세스는 나를 곰 인형처럼 꽉 껴안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산삼처럼 귀한 남편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그의 품에 푹 파묻혀 있어야 했다.
"공작님, 저 좀 놔주세요.”
”싫어.”
”엥?“
황당해하는 나에게 세스가 조금 시무룩해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놓으면 뱃길 것 같아서 싫어.”
이런 상황에서 왜 귀엽고 난리지? 하지만 잔뜩 화가 난 제스터가 이런다고 물러날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몇 배로 더 회를 내면 모를까.
"안 뺏기게 제가 잘할게요.”
빨리 해결하고 잘생긴 얼굴 좀 마음껏 보자.
잠시 머뭇거리던 세스가 날 끌어안은 팔을 풀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내 손을 꼭 잡아 왔다.
귀여워서 심정지가 올 것 같았지만, 이성을 되찾고 테라스 난간에 털썩 걸터앉았다.
"두 분도 여기 앉으세요.”
서로를 노려보던 두 남자가 내 양쪽에 앉았다. 나는 병아리 반 선생님이 된 것 같은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궁금한 건 다 대답해 줄 테니까 둘이 싸우기 없기. 어기는 사람은 바로 쫓아낼 거예요.”
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역시 친구라서인지 행동이 꽤 닮았단 말이지.
“정원에서 엿듣는 사람 없죠?"
“없어.”
“없습니다.”
세콤이 둘이나 되니까 편하군. 나는 안심하고 말을 이었다.
“일단 제스터 씨 질문에 답하자면, 맞아요. 전 공작 부인 대역이에요. 2년 계약직으로 입사했죠.”
세스의 손이 꿈틀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의 제스터에게 덧붙였다.
“그리고 사적으로는 공작님이랑 사귀고 있어요.”
"······예?"
"음, 전 2년 계약직 직원이지만 공작님이랑은 진지하게 연애하는 중입니다.”
예상 밖의 이야기였는지 제스터가 얼빠진 얼굴로 변했다. 나는 어색하게 뺨을 긁적였다.
“제스터 씨에겐 정말 죄송할 뿐이에요. 공작 부인을 보호하려다가 칼까지 맞으셨는데. 그 부분은 제가 욕을 먹어도 싸죠.”
“아니, 잠깐만요!"
황급히 나를 가로막은 제스터가 이마를 짚었다.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공작 부인 대역은 제 직업이고, 사적으로는 공작님과 연애 중이라는 건데. 어느 부분이 이해가 안 되세요?"
사실 그대로 말한 거라서 더 이상 어떻게 자세히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다.
"······직업이요?"
"네, 굉장히 좋은 직업이에요. 고소독인데 일은 적고 쉬운 편이거든요. 기밀 유지 조항만 아니었으면 주변에도 강력 추천했을 것 같네요.”
사장님이 바로 옆에 있어서 연봉이냐 복리 후생에 대해선 자세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제스터는 대충 이해한 것 같았다.
“다른 건 몰라도 일이 쉬운 편이라는 건 인정할 수 없습니다. 제가 보는 앞에서만 당신은 몇 번이나 목숨이 위험했어요.”
“아, 그것 때문에 이 이야기를 시작한 건데요. 제스터 씨가 좀 오해하신 것 같아서요.”
제스터는 날 데리고 도망칠 생각을 할 정도로 공작 부인 대역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전혀 아닌데 말이다.
“사실 대역으로서 받은 임무는 집에 가만히 있기였거든요. 그런데 제가 솔 활동적인 편이라 공작님을 졸라서 겸업을 하기로 한 거예요.”
”······겸업이요?“
"네, 제가 위험해졌던 건 대부분 겸업인 국왕 폐하의 시녀 일을 하던 중에 일어난 일이에요.“
제스터가 칼빵을 맞은 것도 복실이를 찾다가 있었던 일이라 본업이랑은 크게 상관없다.
“시녀 일은 본업에 비하면 박봉이고 출장도 자주 가야하지만 보람이 있어서 당분간 그만둘 생각은 없어요.”
왕은 좀 빡세게 일을 시키지만 그만큼 성과를 인정 해 주는 좋은 상사였다. 세스는 직장인에게 필요한 뽕 빨을 채워 주는 부분에서 조금 약한 편이지.
무엇보다 나도 바깥일을 해야 흑막과 그의 일당들을 무찌르기 좋기도 하고.
"2년 계약직이라고 했죠? 계약이 끝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혼란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제스터가 물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음, 다른 직업을 찾을 생각이지만 연애는 별문제가 없으면 계속하지 않을까요?"
"설마 다른, 대역을 할 생각입니까?"
“네? 아뇨, 땅이나 건물을 살 건데요.”
지금 생각으로는 하늘 위에 있다는 건물주가 되어 볼 생각이었다. 아니면 땅을 잔뜩 사서 투자를 해 보든가.
”······그렇군요. 일단은 알겠습니다.”
복잡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제스터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세스, 따로 이야기 좀 하자. 너도 할 말이 있을 텐데.”
”······나중에.”
세스가 기운 없이 답했다. 어쩐지 탈수기에 넣고 돌린 채소처럼 생기를 잃은 얼굴이었다.
뭔가를 말하려던 제스터가 고런 세스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프리지어 궁에 돌아가면 시간 좀 내.”
”······응.“
아무리 싸워도 친구는 친구인지, 제스터는 기운 없는 세스를 배려해 주었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뭔지 모를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본업이 힘들면 언제든 말해 주세요. 데리고 도망치겠다는 말은 진심이니까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전 명예로운 퇴직을 좋아해서요. 마음만 받을게요.”
빙긋 웃으며 거절하자 제스터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는 똑바로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전 당신이 공작 부인이라서 구한 게 아닙니다. 당신이라서죠.”
“네?"
"무슨 뜻인지 잘 생각해 보세요.”
여우처럼 눈을 흰 제스터가 그대로 테라스 난간을 건너뛰어 사라졌다. 어이없이 그가 사라진 쪽을 보고 있는데 몸이 획 끌려갔다.
“세스?"
나를 꼭 껴안은 팔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그의 등을 다독였다.
"왜 그래요?"
한참을 달랜 후에야 고개를 든 세스는 왠지 모르게 잔뜩 상처받은 얼굴이었다. 가늘게 떨리는 파란 눈이 나를 응시하며 물었다.
“이비, 당신에게 나는 가짜 남편이야?”
“네?"
"난 당신에게 진짜가 되고 싶어.”
아니, 이야기가 어쩌다 이쪽으로 흐른 거야? 나는 당황스러운 기분을 누르며 말했다.
“어, 세스. 전부터 생각했는데요.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진지하게 대회를-좀 해 봐야 할 것 같아요.”
먼 길을 달려온 세스를 괴롭히고 싶진 않지만, 지금이 아니면 이야기를 나누기 어려울 것 같았다.
“제가 대역 역할을 하는 거랑 우리가 서로를 좋아하는 거랑은 별개의 문제잖아요.”
"······무슨 뜻이야?“
“세스가 절 좋아한다고 해서 구렁이 답 넘어가듯 정규직이 될 수는 없다는 뜻이죠. 무엇보다 그건 폐하에 대한 배신이에요.”
왕은 내가 세스를 유혹해서 진짜 공작 부인이 되려고 할까 봐 경계했었다.
나는 세스에게 흑심이 없다는 것을 진실의 반지 앞에서 맹세하고 대역이 될 수 있었던 거다.
그런데 이제 와서 ‘처음엔 그럴 마음이 없었지만 지금은 서로 좋아하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진짜 공작 부인으로 인정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은 왕에 대한 배신이자 기만이었다.
“저는 정말 진지하게 대역으로 일하고 있어요. 나름대로 잘 해 나가고 있다는 자부심도 있고요. 그런데 세스가 저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이제 진짜 공작 부인이라고 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어요.”
"······."
세스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그 동작이 조금 전의 제스터와 비슷해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
"공적인 입장은 여기까지고요, 이제 사적인 이야기를 좀 해 봅시다.”
“사적인 입장?”
“우리가 서로 좋아하는 건 맞지만, ‘대역 역할 하면서 결혼식도 올렸으니까 대충 진짜 남편인 것으로 해 주세요.’라는 건 연인으로서 너무 성의 없지 않습니까. 김세스 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부분인지 세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뿌루퉁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제가 그걸 진짜였다고 치고 넘어가 줘야 하는 건가요?"
”······잘못했어.”
빠른 인정과 빠른 사과. 매우 좋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못을 박았다.
"공적이든 사적이든,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넘기는 건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응.”
뭐든 확실하게 해 놓지 않으면 문제가 생긴다. 그런 의미에서 한 번쯤은 이런 이야기를 해 두고 싶었다.
“이제 세스가 말해 줘요. 제가 들을게요.”
“아니, 당신 말이 맞아. 내가 비겁했지.”
내 손을 꼭 잡은 세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나를 진짜 남편으로 인정해 달라고 조를 게 아니라 현실을 진짜로 바꿔야 했어.”
“응? 잠깐만요. 제가 말한 거랑 조금 다르지 않아요?“
“아니, 같은 이야기지.”
세스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선언했다.
“이제부터 당신을 내 아내로 만들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유혹할 생각이야.”
”······어?“
내가 바란 건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연인의 단계를 밟아 가다가 귀엽게 청혼 받는 그런 거였는데. 어쩐지 세스의 열혈 스위치를 눌러 버린 것 같다?
”라스트 왈츠군.”
어느새 회장 안쪽에서 귀에 익은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세스와 함께 추기 위해서 열심히 연습한 왈츠 곡이었다.
왕에겐 오프닝 왈츠 하나만 배웠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세스와 추기 위해서 라스트 왈츠 곰도 배웠다.
머뭇거리는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세스가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공작 부인, 부디 마지막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제게 주시겠습니까?"
"······기꺼이요.”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살짝 떨리는 손을 세스의 손 위에 올렸다. 달빛에 비친 세스의 얼굴이 너무 잘생겨서 그런가, 심장이 크게 두근거렸다.
우리는 아무도 보지 않는 테라스에서 희미한 선율에 따라 춤을 췄다.
왈츠를 배울 때는 대체 이런 춤을 왜 추나 싶었는데, 몸이 가까워질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며 설레었다. 사랑에 빠지기 좋은 춤인 것 같았다.
영원할 것 같은 음악이 멈춘 순간, 내 이마에 입 맞춘 세스가 속삭였다.
"약속할게, 이비. 당신은 평생 나 외의 다른 사람과 마지막 춤을 추지 못할 거야. 내가 항상 당신 옆에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