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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174화 (174/240)

174화

사람들은 왕을 반기며 급히 예를 올렸다. 그들의 마음속엔 왕이 이 당황스러운 상황을 해결해 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고개를 들어라.”

하지만 몸을 바로 한 그들이 본 것은 하얀 제복에 붉은 망토를 걸친 왕의 모습이었다. 누가 봐도 이블린과 맞춘 옷이었다.

‘그래도 공작 부인의 행실을 알면 꾸짖으시겠지.'

왕이 오기도 전에 무도회를 시작하질 않나, 멀쩡한 청년에게 모욕을 주질 않나, 홀에 앉아서 식서를 하질 않나.

하나같이 거만하고 방자한 짓거리였다.

왕은 기대감에 가독 찬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음식 접시를 뒤로 숨기고 시침을 뚝 떼고 있는 이블린을 찾아냈다.

“이블린, 이리 와라.”

"예, 폐하!"

왕의 손짓을 받은 이블린이 쪼르르 뛰어갔다. 가까이에서 그녀의 얼굴을 본 왕이 혀를 찼다.

“이 녀석, 뭐가 그렇게 급해서 짐이 오기도 전에 먹어 대고 있었느냐?"

왕은 손수 이블린의 뺨에 붙은 과자 부스러기를 떼어 주었다. 움찔한 이블린이 잔뜩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너무 배가 고파서 그만.”

픽 웃은 왕이 이블린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그것으로 그녀의 잘못을 넘기려는 것 같았다.

‘뭣?! 이대로 넘어간다고?'

이블린이 처벌받는 모습을 은근히 기대하던 사람들의 얼굴이 우거지상으로 변했다.

"배를 채웠으면 이제 짐과 함께 왈츠라도 추겠느냐?"

왕이 제복을 입고 온 것도 이블린과 춤을 추기 위해서였다. 더없이 영광스러운 일인데도 이블린은 난처함을 숨기지 못했다.

"저, 폐하.”

"응? 무슨 일이냐?"

고개를 낮춰 달라고 손짓한 이블린이 왕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사실 제가 오프닝 왈츠 하나밖에 배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춤은 이미 췄어요.”

”······뭐라고?“

왕이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보통 무도회에선 전반부와 후반부를 통틀어 최소 16곡 이상이 연주된다.

그래서 귀족들은 최대한 많은 춤을 연습했다. 다양한 춤을 능숙하게 추는 것이 상류층의 교양이었다.

그런데 오늘 갓 데뷔한 이블린이 춤을 딱 하나, 그것도 오프닝 왈츠밖에 배우지 않았다고 선언한 것이다.

“아니 , 대체 어쩌려고 그랬느냐?"

“모르는 사람과 딱히 춤을 추고 싶지 않아서요.”

똑 부러진 이블린의 대답에 왕은 잠깐 멍해졌다.

”······그래, 모르는 사람이랑은 추지 말아야지. 그런데 그럼 짐과도 추지 못하지 않느냐?"

사실 왕이 무도회에서 춤을 추자고 할 줄은 몰랐던 이블린은 머쓱하게 뺨을 긁적였다.

“그럼 첫 곡을 다시 연주해 달라고 할까요?"

"······."

생각할 것도 없이 절대로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왕은 갑자기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꽉 막힌 사교계의 규칙을 아무렇지도 않게 뭉개 버리는 이블린의 태도가 대담하고 속 시원하게 느껴진 것이다.

“그러자꾸나."

왕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블린은 쪼르르 악단에게 달려갔다. 그녀의 말을 들은 악단장이 황당한 표정으로 변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이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왕에게 달려온 이블린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폐하, 악단이 다시 연주해 준다고 했어요.”

왕은 무슨 큰일이라도 해낸 것처럼 의기양양해하는 이블린의 모습에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자, 그럼 얼마나 잘 추는지 보자꾸나. 딱 하나만 배웠으면 남들보다 몇 배로 더 잘해야지.”

“헉! 여, 열심히 추겠습니다!"

갑자기 오프닝 왈츠곡이 흘러나오자 사람들은 어리둥절해졌다.

‘왜 또 이 곡이 나오는 거지?'

‘왕께서 오셨으니 다시 시작한다는 뜻인가?'

영문을 몰라 하는 사람들 속에서 왕과 이블린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상황이야 어쨌든 제법 멋진 장면이 연출됐다.

백금발을 높게 올려 묶고 제복을 입은 왕은 마치 동화속의 왕자님처럼 보였다. 왕이 여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아가씨들도 몽롱해질 정도였다. 자연스럽게 이블린을 향해 질투 어린 눈빛이 쏟아졌다.

‘고작 하층민 주제에…….'

그들에게 이블린은 그저 운 좋은 천출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최고의 권위자들이 그녀를 둘러싸서 보호하고, 왕이 함께 춤을 추며 체면을 세워 주려하고 있었다.

‘나는 데뷔탕트 볼에서 트집 잡히지 않으려고 뼈를 깎는 노력을 했는데.'

차라리 이블린이 열심히 준비하고 노렴해서 흠 하나 잡을 곳이 없었으면 이렇게 분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블린은 아무렇지도 않게 사교계의 금기를 어겼다. 그럼에도 누구도 감히 그녀를 비난하지 못했다.

분해서 입술을 깨무는 사람들 속에서 이블린은 멋지게 두 번째 춤을 마쳤다.

왕은 그녀를 원래 자리로 돌려보내는 대신 상석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옥좌 옆에 마련된 작은 의자에 앉혔다. 전례 없는 일에 사람들의 안색이 확 변했다.

‘저긴 왕족이나 앉을 수 있는 자리인데…….'

하지만 왕의 기행은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짐도 춤을 췄더니 출출하구나. 이블린, 네가 먹은 음식 중에 뭐가 제일 맛있었느냐?"

“칠면조 샌드위치만 빼고 다 맛있었습니다.”

“그래?“

왕은 시종에게 준비된 음식들을 다 가져오라고 명했다.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사람들이 멍하게 입을 벌렸다.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재빨리 시 종을 부르거나 자신 의 발로 뛰어서 먹을 것을 가지러 갔다.

그리고 왕의 눈치를 보며 와구외구 먹기 시작했다. 홀에 서서 음식을 먹는다는, 자신들이 경멸하던 짓을 저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왕은 음식을 집어 이블린에게 먹여 주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배가 불러 울상을 지으면서도 입을 벌리는 이블린의 모습이 너무 귀여웠기 때문이다.

‘어디서 이런 녀석이 나왔지?'

보면 볼수록 귀엽고, 보고 있어도 또 보고 싶다. 꼬물꼬물 움직이는 것만 봐도 기분이 좋다.

그런데 또 능력은 무시무시하게 좋아서 불가능한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낸다. 가장 대단한 점은, 그럼에도 항상 왕에게 충성스럽다는 것이었다.

‘내게 상을 달라고 한 적도 없고, 자신의 업적을 뽐내고 다니지도 않지.'

왕은 지금껏 이블린이 해낸 일들을 의도적으로 감추었다. 그럼에도 이블린은 한마디 불평조차 한 적이 없었다.

이블린이 지금껏 귀족들에게 무시당하는 것도 사실 왕의 잘못이었다. 그녀의 활약 중 일부만 알려져도 귀족들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을 데니까.

‘귀엽고 불쌍한 것.'

왕은 이블린이 귀족들의 뺨을 때리며 놀아도 잘한다고 박수를 칠 생각이었다. 이블린에겐 그럴 자격이 있었다.

"북부의 대영주이신 정령수 공작 전하의 대리, 우르스 발타자르 변경백과 아트레유 발타자르 경께서 입장하십니다.”

그리고 왕이 기다리던 마지막 귀빈, 북부의 변경백인 우르스가 등장했다.

이전의 초라한 모습이 아니었다. 검은 모피로 장식된 고급스러운 예복을 입은 그는 대영주의 위풍당당함을 제대로 뽐내고 있었다. 그의 아들인 아트레유 역시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귀공자의 모습이었다.

사람들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아니, 거지나 다름없던 변경백이 저런 모습으로 나타나다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지나쳐 왕의 앞으로 다가간 변경백이 정중히 예를 표했다.

”폐하, 늦어서 송구합니다.”

“고개를 들라 짐이 먼 길을 온 사람에게 조금 늦은 것을 탓하겠는가?"

“너그러운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변경백은 이어서 왕의 옆에 앉아 있는 이블린을 향해 가볍게 묵례했다.

"은인, 사교계에 데뷔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북부에서 소소한 선물을 준비했으니 부디 받아 주십시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종들이 수십 개의 상자를 들고 나타났다. 질 좋은 모피와 녹용, 이름 높은 장인이 만든 무기와 귀한 약초 같은 것들이었다.

“우르스 아저씨, 저를 위해 여기까지 와 주셔서 감사드려요. 정성 어린 선물도 기쁘게 받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이블린이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가까운 친척에게나 붙일 수 있는 ‘아저씨'라는 호칭에 사람들이 다시 한 번 술렁거렸다.

그리고 정작 그렇게 불린 변경백은 송구하다는 듯이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인 후에야 입을 열었다.

“폐하, 기쁜 날을 축하하기 위해 북부에서 가져온 술이 있습니다. 부디 축배로 쓸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아, 이전에 말한 그것인가?"

정령수의 열매로 담근 술에 대해서 보고받았던 왕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변경백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예, 폐하. 결코 실망하시지 않으실 겁니다."

"좋다."

왕의 허락이 떨어지자 시종 넷이 거대한 항아리를 들고 왔다. 항아리는 몇 겹이나 되는 천과 끈으로 단단히 밀봉되어 있었다.

시골에서나 볼 수 있는 투박한 술 항아리의 모습에 사람들이 비웃음을 날렸다. 그들 중에는 맥주조차 천하다고 마시지 않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저따위 술을 축하용으로 사용하겠다니, 역시 야만인들의 수준은 어쩔 수 없군.’

하지만 그것은 이블린이 손수 담그고, 정령수가 밤낮으로 알뜰살뜰 돌보며 숙성시킨 영약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왕도 이블린을 축하하는 자리가 아니었다면 결코 내놓지 않았을 것이다.

“아트레유, 네 차례다. 실수하지 마라."

변경백은 엄숙한 얼굴로 아들을 불렀다.

한 걸음 뒤에 있던 아트레유가 왕에게 절을 한 후에 술 항아리로 다가갔다. 그는 허리에 장식용으로 매달려 있던 가검을 뽑았다.

날조차 서 있지 않은 가검이 푸른 섬광을 뿌리며 항아리의 뚜껑을 깔끔하게 날려 버렸다. 기예에 가까운 솜씨에 사람들이 감탄하는 순간이었다.

항아리에서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압도적인 향기가 솟구쳤다. 그야말로 영혼을 사로잡는 향기에 홀 전체가 조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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