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쓰, 쓰레기라니.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갑자기 인간쓰레기 판정을 받은 청년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지금껏 온갖 망나니짓을 하며 살았지만,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비난당한 것은 처음이었다.
"뭐? 내 말이 불만이야? 그럼 덤벼 보든가!"
케인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청년은 결국 몸을 돌려 달아났다. 케인은 무섭지 않았지만 수도에서 힘 좀 쓰기로 유명한 사인방에게 감히 덤빌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청년의 아버지, 보어 남작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이 멍청한 놈, 거기서 도망치면 저들의 말을 인정하는 거나 다름없잖아!'
그때 그의 예비 사돈인 도튼 자작이 웃으며 말했다.
"남작, 생각해 보니 아이들의 혼사를 거론하기엔 조금 일렀던 것 같습니다. 제 딸과 아드님의 약혼은 없었던 일로 하죠.”
“자,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설마 이런 상황에서 억지를 부리시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도튼 자작은 네 아들은 이제 폐급이라는 뜻을 점잖게 전했다. 보어 남작은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어야 했다.
순식간에 귀족 청년 하나를 나락으로 보낸 이블린은 놀라울 정도로 그 일에 관심이 없었다. 담담한 얼굴로 홀의 중심에 선 그녀는 참석자들을 둘러보았다.
“이블린 엘마이어입니다.”
갑자기 입을 연 그녀 때문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이런 자리에서 파트너가 아니라 데뷔 당사자가 자기소개를 하다니. 가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이블린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이렇게 제 데뷔 무도회에 참석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열심히 준비했으니 마음껏 즐기시길 바랍니다."
짧은 인사를 마친 그녀는 대기 중인 악단에게 손짓 했다. 그러자 곧바로 오프닝 연주가 시작됐다.
‘아니, 이렇게 시작한다고?'
‘폐하께서 아직 오지 않으셨는데?'
모두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에 이블린은 케인의 손을 잡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멀뚱히 그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춤은 좀 추는군.’
‘예전에 무희였나?'
이블린은 한 마리의 새처럼 춤을 췄다. 유독 가벼운 몸놀림은 공기의 저항을 아예 받지 않는 것 같았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반짝이는 보석과 우아한 드레스의 흔들림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블린을 고깝게 보는 자들마저 홀릴 수밖에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음악이 끝나고 이블린이 가볍게 인사를 한 후에야 모두가 정신을 차렸다.
첫 춤을 마친 이블린은 한쪽에 준비된 긴 의자에 앉았다. 다른 사람들과 뚝 떨어져 있는 자리였다.
케인만 그녀의 옆에 앉고 나머지 사인방은 의자를 둘러싼 채로 다가오는 이들을 경계했다. 처음 겪는 일에 사람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주춤거렸다.
‘아니, 주인공이 저렇게 앉아 버리면 우리보고 뭐 어쩌라는 거야?'
설마 인시를 올리러 오라는 건가?'
그들은 당연히 이블린이 인사를 하러 올 줄 알았다. 주최자가 회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참석자와 몇 마디 대회를 나누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사교계의 선배로서 한마디 해 줄 생각이었는데, 이블린이 이렇게 뻔뻔하게 나올 줄은 미처 몰랐다.
두 번째 음악이 시작되었지만, 사람들은 연신 이블린을 힐끔거리기 바빴다. 그러나 ‘아버님 산성’의 위용이 너무 압도적이어서 누구도 그녀에게 감히 다가가지 못했다.
그때, 하얀 성복을 입은 자들이 빠르게 이블린에게 접근했다. 선두에는 검은 베일을 쓴 여자가 있었다. ‘대지의 신관들이군 그러고 보니 대지의 신전과 공작 부인의 사이가 나쁘다는 소문이 있던데.' 일전에 대신관 후보 밸런타인이 일으킨 마찰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사치스럽다고 한마디 하거나 겸손하지 못하다고 충고하려나?'
하지만 그들의 기대는 곧바로 빗나갔다.
“엘마이어 공작 부인, 이렇게 기쁜 날에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대지신께서 부인의 빛나는 길에 함께하시길 빌겠습니다.”
대지신의 신관들이 이블린 앞에 정중히 예를 표한 것이다.
반면 이블린은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라니요. 더 빨리 인사드리지 못해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이건 약소하지만 대지신의 축복을 전하기 위한선물입니다.“
검은 베일을 쓴 여자가 고급스러운 나무함을 내밀었다. 그 안에 담긴 것은 황금으로 만든 성물이었다.
이블린은 선뜻 함을 받지 않고 여자를 바라봤다.
“제가 뭐라고 불러 드리면 될까요?"
“저는 대지산을 따르는 준비된 종, 성녀 후보인 루시아라고 합니다.”
무려 차기 성녀가 직접 이블린의 사교계 데뷔를 축하해 주러 온 것이다. 무척 영광스러운 일이었지만 이블린은 담담하게 말했다.
"루시아 님, 선물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 저를 찾아와 주십시오.”
“가, 감사합니다!"
성녀 마르타를 구하기 위해 여기까지 달려왔던 루시아는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 광경을 보던 사람들은 지금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차기 성녀가 공작 부인에게 선물까지 바치면서 감사하다고 하는 거지?'
‘둘이 사이가 나쁜 게 아니었나? 이게 무슨 일이야?'
그때 그들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키는 일이 일어났다.
황금빛 의상을 번쩍이며 다가온 나바르의 사절이 불쾌함을 담은 헛기침을 했다.
"거, 인사 끝났으면 어서 비킵시다. 사람이 눈치가 없어.”
불과 사막의 산을 숭배하는 나바르 왕국은 당연히 신성 왕국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블린을 태자의 즉위식에 초대해야 하는 지금은 악감정까지 생길 정도였다.
‘성국 돌아가는 꼴을 보니 정령님을 모셔 가려나 본데, 어림도 없지. 어디서 뒤늦게 끼어들어서는 난리야?’
“뭐요?”
눈을 부라리는 루시아를 옆으로 밀어 버린 나바르의 사절이 이블린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귀하신 분, 이렇게 영광된 날에 뵙게 되어 정말로 기쁘옵니다. 야굽의 아들 하산이 바치는 선물을 부디 받아주십시오."
그는 금으로 만든 상자 안에 정교하게 세공된 보석들을 가득 담아서 바쳤다.
그러자 입술을 질끈 깨문 루시아가 그를 노려봤다.
‘이 작자가, 이럴 때 치사하게!'
반면 이블린은 아까와 별다를 것 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산 님, 이렇게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태자 전하께도 인사를 전해 주십시오.”
“아아, 전하께선 하루를 일 년처럼 보내며 귀하신 분을 다시 뵙기만을 고대하고 계십니다. 부디 전하의 마음을 헤아려 주십시오."
"고려하겠습니다.”
사무적인 이블린의 대답에 아쉬운 표정을 지은 사절이 깊게 절을 한 후에 물러났다. 루시아가 이룰 갈며 그의 뒤를 쫓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경쟁자를 떨어 뜨려야했기 때문이다.
시종의 손에서 성물과 보석함을 받아든 이블린은 곧바로 그것을 케인에게 넘겼다. 즐거운 얼굴로 보석을 갖고 노는 케인을 본 사인방이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저 녀석은 평생 귀여움이나 받고 살아야 해.'
보얗게 살이 오른 케인의 얼굴에선 왕년의 미모가 엿보였다. 활기찬 모습을 보니 전보다 더 건강해진 것 같았다 친구의 미래를 위해 체면까지 접어 두고 이블린에게 협조한 보람이 있었다.
"저, 저기······.”
그때 쭈뼛쭈뼛 다가온 로엔 공국의 사절이 민망한 얼굴로 물었다.
“제, 제가 깜빡 잊고 선물을 놓고 왔습니다만, 공작 부인께 인사를 올려도 될는지요.”
사실 선물 따윈 준비하지 않았다. 로엔 공국은 그리핀을 도둑맞은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선 이들이 값비싼 선물을 바치고 고개를 조아리자 무작정 따지고 들 수가 없었다.
쭈뼛거리는 그를 보고 음흉한 웃음을 흘린 외교부 수장 레너드가 받아쳤다.
"저런, 이런 중요한 날에 그런 실수를 하면 어쩌나. 그래도 부인께선 관대하신 편이니 어서 인사부터 올리게.”
"선물은 잊지 말고 프리지어 궁으로 보내도록.”
물질적인 문제에 예민한 재무 차관 노리스가 딱딱하게 덧붙였다. 사절은 어쩔 수 없이 그러겠다고 약속한 후에 이블린과 의례적인 인사만 주고받았다.
‘그리핀에 대한 문제는 다른 때 말해야겠군.'
공개적인 장소에서 이블린을 압박하려던 처음의 목적은 이미 하늘로 날아간 뒤였다.
무도회장에 모인 사람들은 얼빠진 얼굴로 침묵했다. 처음 한 번은 우연이라고 할 수 있지만, 세 번 연속으로 목격하니 부정할 수가 없었다.
‘삼국의 사절이 고개를 조아릴 정도로 공작 부인의 권세가 대단하다는 건가?'
그때 이블린이 또다시 파격적인 일을 저질렀다.
시종들에게 간단한 음식을 가져오게 한 뒤에 대놓고 먹기 시작한 것이다. 사인방은 그것을 말리기는커녕 외려 시중을 들고 있었다.
“마, 맙소사.”
모든 무도회에선 옆에 티룸을 두고 가벼운 음식과 음료를 대접했다. 춤을 추다 지친 사람들의 입을 달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티룸의 음식으로 배를 채우는 것은 금기였고, 특히나 갓 데뷔한 아가씨가 손을 댔다간 게걸스럽다는 말을 듣기 딱 좋았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만찬이 열릴 때까지 버텨야했다.
하지만 이블린은 그런 규칙 따윈 전혀 모르는 것처럼 태연하게 식사를 줄기는 중이었다. 케인도 그녀의 옆에서 남남거리며 맛있게 먹고 있었다.
“나도 먹을래. 배고파.”
그런 이블린의 앞에 불쑥 나타난 것은 바로 데오 러셀이었다. 방심하는 사이 아들이 위험 지대로 가 버린 것을 뒤늦게 알아챈 러셀 백작 부인이 허둥지둥 쫓아 왔다.
그녀를 본 이블린은 처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예를 표했다.
"백작 부인, 이렇게 참석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처, 천만에요!"
백작 부인은 내심 감동했다. 삼국의 사절들 앞에서도 고개만 까딱거리던 이블린이 그녀에겐 더없이 정중했기 때문이다. 절로 어깨가 으쓱해졌다.
“잠깐 여기 앉으시겠어요?”
”······그럴까요?"
이블린의 옆자리로 초대받은 그녀는 얼떨결에 음식까지 대접받게 되었다. 옆에서 맛있게 먹는 아들과 달리 생각이 많아진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럴 수 있다는 것을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저였다면 남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까 봐 감히 시도하지도 못했을 텐데.”
오르센 공국에서 시집온 그녀는 유독 사교계에서 견제를 많이 당하는 편이었다. 처음엔 숨소리조차 마음대로 낼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이블린의 모습에 감탄마저 들었다.
“사실 저도 간을 보는 중이에요. 여기서 얼마나 더 나가도 될까. 합법적인 망나니짓은 어디까지일까.”
씩 웃은 이블린이 악동처럼 말했다. 눈을 동그랗게 뜬 백작 부인이 무어라 대꾸하려는 순간이었다.
“위대한 아스트리아의 지배자이신 국왕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마침내 왕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