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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172화 (172/240)

172화

* * *

러셀 백작 부인은 서둘러 준비를 끝마쳤다. 남들보다 빨리 무도회장에 도착하고 싶었던 그녀는 막내아들을 불렀다.

"데오! 어디에 있니?"

그러자 왕실 수호 기사단의 제복을 입은 테오가 나타났다. 품에 꼭 안고 있는 곰 인형만 아니면 꽤 늠름해 보였으리라.

“인형은 갖고 가면 안 돼. 오늘은 무도회란다.”

“이블린은 곰을 좋아해. 가져가서 보여 줄래.”

“갖고 가면 더러워질 거야. 어서 시종에게 주렴.”

잠시 머뭇거리던 테오가 인형을 시종에게 건넸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뿐이 아니었다. 맹수의 이빨과 화려한 깃털로 장식된 목걸이가 테오의 목에 걸려 있었다.

"목걸이도 어서 배고.”

“아냐, 이건 이블린이 준 거야. 내가 이걸 걸고 가면 좋아할 거야."

이블린이 테오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북부에서 선물로 가져온 목걸이였다. 어린아이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는 부적이기도 했다.

테오는 목걸이에 달린 송곳니를 너무 좋아해서 한시도 몸에서 떼어 놓지 않았다.

“아가, 목걸이를 누가 줬는지 말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 어서 빼렴.”

테오가 입을 삐쭉거리며 고집을 부리자 백작 부인은 한숨을 쉬었다.

“우리는 놀러 가는 게 아니란다. 이블린을 공격하는 사람들과 싸우러 가는 거야.”

"정말?“

“그래, 오늘은우리가 이블린을 지켜 줘야 해.”

순간 테오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목걸이를 벗어서 시종의 손에 건넸다.

“내 보물 상자에 넣어 줘.”

"예, 도련님.”

소중한 보물을 숨긴 테오는 비장한 얼굴로 백작 부인을 바라봤다.

”가자, 엄마.”

당장 누군가를 후려칠 것처럼 주먹을 꼭 쥔 재였다.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는데, 그들의 앞을 누군가가 가로막았다. 백작 부인의 큰이들인 데이빗이었다.

“어머니, 오늘은 왜 이렇게 서두르세요?"

“너야말로 준비가 하나도 안 됐구나. 네 아내는 지금 뭐 하고 있니?"

아들의 옷차림을 훑어본 백작 부인이 날카롭게 물었다. 데이빗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알리샤는 몸이 좀 안 좋은 것 같아요.”

“그래? 그럼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 너도 늦을 것 같으니 우리 먼저 출발하마.”

"어, 어머니!"

당황한 데이빗이 팔을 벌려 백작 부인의 앞을 막았다.

“그 여자와 친분이 있으신 것은 알겠어요. 그런데 방패막이를 자청하실 필요는 없잖아요. 잘못하면 어머니까지 같이 모욕당하실 거라고요!"

어떻게든 말리려는 큰아들을 반히 쳐다보던 백작 부인이 한숨을 쉬었다.

"데이빗, 너는 정말 사람 보는 눈이 테오의 반의반도 안 되는구나. 앞으로 어쩌려고 그러니?"

어이가 없었던 데이빗은 입만 뻐끔거렸다. 고개를 저은 백작 부인이 그를 지나쳤다.

“아버지껜 회장에서 만나자고 전해 드려라.”

이어서 어깨를 으쓱한 테오가 그녀의 뒤를 졸래졸래 따라갔다. 데이빗은 멍하게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 어머니는 벌써 출발한 모양이구나. 조금만 더 기다려 줄 것이지.”

움찔해서 돌아본 데이빗이 아버지인 백작을 발견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 전 정말 어머니가 걱정됩니다. 안 그래도 신경증을 앓고 계신데 , 고작 그런 여자 때문에 무리를······.”

“데이빗, 네 어미의 말이 맞다.”

“예?”

백작 부인과 별다를 것 없는 표정이 된 백작이 그를 타이르듯 말했다.

“세간에 떠도는 소문을 다 믿지 마라 이블린 엘마이어는 네 생각보다 훨씬 더 대단한 여자다.”

데이빗은 눈을 굴렸다. 사교적인 성격인 그는 남들 보다 발이 넓고 소문에도 빠른 편이었다. 그래서 이불 린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대체 뭘 알고 계십니까? 제게 알려 주실 수는 없습니까?"

“따라와라.”

백작은 대답을 미루며 몸을 돌렸다. 아버지의 집무실로 자리를 옮긴 데이빗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렇게까지 은밀하게 전할 정도로 대단한 비밀이 있다는 말인가?'

이블린 엘마이어.

출신은 딱히 밝혀진 것이 없다. 왕의 시녀로 일하다가 마탑의 반란 때 공을 세운 일로 총애를 얻게 되었다.

그 뒤로 식량 지원을 통해 북부 변경백이라는 뒷배를 얻고, 천공산의 신녀와의 친분을 과시하며 자신의 입지를 쌓았다.

결국, 공작과 결혼까지 성공했으니 꽤 똑똑한 여자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인정을 받을 정도로 대단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데이빗, 이블린 엘마이어는 거물이다."

"······예?"

"네가 못 믿는 것도 당연하다. 왕이 철저하게 정보 통제를 하고 있으니까. 이 아비가 아는 것 역시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이어서 백작이 들려준 이야기는 굉장히 황당했다.

대충 이블린이 마탑의 백탑주를 수하로 거느리고 있고, 마수들과 이종족이 그녀를 승배하며, 북부는 그녀를 주인처럼 따른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블린이 죽어 가던 나바르의 태자를 살려 왕위에 앉게 도왔다는 대목에 이르자 도저히 표정 관리를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 지금 농담하시는 겁니까?"

“증거도, 증인도 명백하다. 포기하고 그냥 믿어라."

백작은 불신이 가득한 아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말을 이어 나갔다.

"최근에는 뉴던비 항구 전체를 얼음덩어리로 만들고 마탑의 결계를 박살냈다더구나. 그것도 공작가의 힘은 전혀 빌리지 않고 말이다.”

"······."

"못 믿겠으면 직접 확인해 봐라. 얼마 전의 일이니 네가 조사하기도 쉬울 거다.”

데이빗은 입술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장난이라고 넘기기에는 백작의 태도가 너무 진지했다.

“어째서, 이블린 엘마이어가 그런 존재라는 것을 아무도 모르는 겁니까?"

“한쪽은 알리고 싶어 하지 않고, 다른 한쪽은 알려 하지 않으니까. 당사자는 아무래도 좋은 것 같지만.”

쓴웃음을 지은 백작은 진지한 표정으로 충고했다.

“이번 무도회는 이블린 엘마이어가 자산의 적을 골라내는 중요한 무대가 될 거다. 데이빗, 네가 아는 사람들이 불행한 길을 걷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라.”

그제야 정선이 번쩍 든 데이빗은 자세를 바로잡았다.

"곧바로 준비하고 무도회에 참석하겠습니다. 적어도 동부 귀족 연합에선 멍청한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할 겁니다."

"좋다. 서둘러라.”

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난 데이빗은 밖으로 달려 나갔다.

문득 막내인 테오보다 보는 눈이 없다는 어머니의 말이 생각나서 울컥했지만, 지금은 그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 *

왕은 이블린을 위해 사계의 홀을 열었다.

왕족의 데뷔탕트 볼이나 외국 사절을 환영하는 연회에서만 사용되는 장소였다. 눈이 돌아갈 정도로 화려하게 꾸며진 홀을 본 참석자들은 왕이 이블린을 얼마나 총애하는지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그들은 다소 의기소침하게 수군거렸다.

"총애가 다소 지나친 것이 아닌지······.“

”폐하의 눈을 흐린 것을 보면 요부라는 소문이 사실 인 것 같습니다.”

그때 마침내 무도회의 주인공이 등장했다. 중앙 문이 열리며 시종이 우렁차게 외쳤다.

“이블린 엘마이어 공작 부인과 케인 엘마이어 경께서 입장하십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중앙 문으로 쏠렸다. 하지만 문 안에선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이내 무어라 언질을 받은 시종이 다시 외쳤다.

“이블린 엘마이어 공작 부인과 케인 엘마이어 경. 그리고 왕실 특사이신 레너드 헤레이스 후작 각하, 왕실 보안 관리관 버티 엠브록 백작 각하, 재무 차관 노리스 루스 경, 수석 재판관 빌러드 로튼 경께서 함께 입장하십니다."

그리고 이블린이 특유의 살랑살랑한 걸음걸이로 어슬렁어슬렁 등장했다. 그녀의 뒤로 똑같은 옷을 입은 다섯 명의 남자들이 우르르 따라왔다.

그들은 이블린을 앞뒤로 둘러싼 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조심스럽게 손을 잡아 주었다. 이블린이 ‘아버님 산성’이라고 이름붙인 방어 진형의 등장이었다.

‘뭐, 뭐지? 파트너가 다섯 명?'

혼란에 빠진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이블린은 타박타박 계단을 내려왔다. 우아함 따윈 전혀 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그럼에도 눈이 부시도록 빛나고 있었다.

높게 틀어 올린 번 헤어에 작은 티아라를 쓰고, 귀에는 단순한 진주 귀걸이를, 목에는 초커 형태의 가느다란 목걸이만 걸고 손에는 긴 장갑을 꼈다.

막 데뷔하는 공작 부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간소한 장식이었다.

하지만 이블린을 장식한 보석은 마력으로 내부를 세공하고 신성력을 가득 채운 것이었다. 황홀한 빛으로 반짝이는 그녀에게서 귀족들은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어깨를 드러낸 새하얀 드레스는 그레이들이 바친 요정 비단으로 만든 것이었는데, 이블린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물결치는 옷자락에서 오묘한 광택이 흘렀다.

레이스나 보석, 리본도 없이 붉은 실로 치맛자락에 꽃과 덩굴을 수놓았을 분인 드레스였다. 하지만 누구 도 그것이 단순하거나 초라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넋을 잃고 바라볼 뿐이었다.

"저, 자 공작 부인!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때, 이블린의 앞을 한 청년이 막아섰다.

추잡한 행실로 소문은 썩 좋지 않았지만, 순진해 보이는 얼굴 때문에 꽤 인기가 있는 편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헤실거리는 미소를 날렸다.

"부디 제게 부인과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이 쓰레기는 대체 뭐야?"

그를 노려보던 케인이 느닷없는 폭언을 내뱉었다.

"니콜라스 보어. 보어 가문의 삼남일세.”

아무렇지도 않게 답을 한 이는 외교부 수장인 레너드였다.

“앞으로의 전망이 좋지 않더군. 마이너스 10점.”

이어서 재무 차관인 노리스가 단호하게 상대를 평가했다. 재정 쪽으로는 아는 것이 없는 버티가 흥미롭게 물었다.

"보어 가문은 그래도 제법 부자가 아닌가?"

“그것까지 고려해서 마이너스 10점이야.”

“흠, 확실히 무력 쪽으로도 별로일 것 같군. 근육과 자세를 봐서 3 점을 주지.”

이어서 날카로운 눈을 번뜩인 수석 재판관 빌러드가 냉혹하게 평가했다.

“부모 형제도 팔아넘길 정도로 도박에 빠져 있다더군. 당장 수감해도 좋을 정도야. 마이너스 100점.”

각 분야의 최고수라고 할 수 있는 자들의 가차 없는 평가에 청년은 거의 혼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잔뜩 의기양양해진 케인이 소리쳤다.

"당장 꺼져라, 이 쓰레기 자식. 내 며느리의 눈에 더러운 면상을 비추지 마!"

악명 높은 ‘아버님 산성’이 처음으로 발동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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