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 * *
세스가 떠나기 전날 밤, 나는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계속 꼬물거리는 내 등을 세스가 토닥여 주었다.
“잠이 안 와?"
”······자고 싶지 않아요. 내일은 세스가 없잖아요.”
시무룩하게 말하자 세스가 내 뺨을 살짝 어루만졌다.
“그 말을 들으니 나도 자고 싶지 않군.”
“세스는 자야죠. 내일 멀리 가야 되니까.”
말하다 보니 더 우울해졌다. 세스가 위로하듯 내 이마에 입 맞추려 했지만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이비?"
“또 억지로 재우려는 거잖아요. 이번엔 안 속아요.”
키스를 피하는 나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짓고 있던 세스가 웃었다.
“그럴 리가. 왜 그런 아까운 짓을 하겠어?"
“전에도 그랬으면서.”
이마 보보라고 방심하다가 푹 잠들어 버린 나는 조금 삐져 있었다. 삐쭉 내민 내 입술을 세스의 손끝이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찔 떨렸다.
“헤어져 있는 동안은 당산에게 키스하지 못하니까, 그게 아쉬웠을 뿐이야.”
어두운 것을 무서워하는 나를 위해 켜 둔 희미한 빛 이 세스의 얼굴에 일렁이는 그림자를 만들었다. 오늘 따라 유독 야하고 예뻐 보이는 입술이 속삭였다.
“당신이 내게 키스해 줘.”
우물쭈물하던 나는 그의 턱에 살짝 뽀뽀했다. 세스가 한쪽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부족하다는 뜻인 것 같아서 얼른 그의 뺨에도 쪽 입을 맞췄다. 알딸딸한 기분에 홍이 나서 눈가와 코끝에도 키스했다. 그러자 나를 안은 세스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이비······."
“네에?"
“이비.”
“응응?”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는 손이 기분 좋았다. 아주 따뜻한 물속에 잠겨 있는 느낌이었다.
“내가 당신과 지금보다 더 깊은 관계가 되고 싶다고 하면 싫을까?”
그 갑작스러운 말에 해롱거리던 정신이 번쩍 깨어났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세스가 속삭였다.
“난 당신에게 좀 더 닿고 싶어. 당신을 더 가까이에서 느끼고 마음껏 입 맞추고 싶어.”
열기를 가득 담은 시선에 입술이 바짝 말랐다. 나는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그럴 수 없다는 거 알잖아요.”
"방법을 찾으면?“
"······."
“나와 닿을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면 허락해 줄 거야?"
다음 순간 나는 이상할 정도로 겁을 먹었다. 부들부들 떠는 나를 느낀 세스가 당황했다.
“겁먹지 마, 이비 . 난 당선이 싫어하는 건 하지 않아."
”……못 찾을 거예요. 저 같은 사람이 또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방법을 찾아요?"
오히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방법을 찾아 헤매다 지쳐서 나를 싫어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냥 이대로는 안 돼요? 지금까지처럼 지내는 걸로는 부족해요?"
“지금처럼 지내도 당신이 날 떠나지 않는다면.”
세스가 나와 눈을 마주한 채로 말을 이었다.
“내게 닿을 수 없고, 내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이유로 나를 버리려고 하지만 않으면. 이대로도 괜찮아.”
갑자기 말문이 턱 막혔다. 입술만 달싹이는 나를 보고 세스가 웃었다.
"알아. 당신이 나와의 미래를 꿈꾸지 않는 이유가 그 외에도 많다는 걸 앞으로 나는 그걸 하나씩 없애 나갈 생각이야.”
"······."
“당신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다 사라지면 그때는 나를 받아줘.”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막아 보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둑이라도 터진 것 같았다.
세스는 울지 말라는 말 대신 나를 꼭 안아 주었다. 나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재로 울고 또 울다가 겨우 고개를 들었다.
"······기다릴게요.”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세스는 만족한 듯이 웃었다.
부드럽게 내 눈물을 닦아 준 그가 입을 맞췄다. 이번엔 피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뜨거울 정도로 열기 어린 마음이 내게 닿아 왔다. 나는 점점 아득해지는 시야를 느끼며 살짝 웃었다.
‘내가 좋아한 게 당신이라서 정말 다행이야.’
세스에게 정말 좋아한다고 말해 주고 싶었는데, 거기까지가 내 한계였다. 나는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세스는 이미 떠난 뒤였다. 그가 남긴 쪽지가 대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무도회가 끝나기 전에 돌아올게.
사막의 신비부터 뒤져볼 생각인 세스가.]
* * *
세스가 떠났다고 상심에 빠져 있을 틈은 없었다. 코앞으로 다가온 무도회를 준비하는 것과 동시에 복실이 실종사건의 후폭풍을 정리해야했다.
“잊지 않고 불러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핀들 의 진정한 주인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고양이들에게 딸려 온 공국 기사들의 자리를 정해 주고.
“마님, 저희가 강해져서! 반드시 강해져서! 다음엔 어떤 적이 온다고 해도 꼭 지켜 드리겠습니다!"
PTSD 증세를 보이는 호위 기시들을· 다독이고.
“이번 일은 청탑주의 독단일 뿐입니다. 다른 마법사 들은 그저 휩쓸린 것뿐인데 전면 조사를 한다니요!”
자꾸만 개소리를 하는 마탑에게 협박을 하고.
"공작 부인, 전 정말 카스티야 놈들이 항구로 숨어들어 왔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멘탈이 나가 버린 뉴던비 시장도 상대해 줘야 했다.
빡빡한 일정에 시녀장이 몸을 좀 돌보시라고 잔소리를 퍼부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바쁜 게 좋았다. 가만히 있을 때는 세스의 말이 계속 떠올라서 괴로웠다.
“당신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다 사라지 면 그때는 나를 받아줘.”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른 문제가 다 해결되어도 내 출신 문제는 계속 남아 있으니까. 내가 죽었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나는 세스를 믿고 싶었다. 그가 약속을 지킬 때까지 계속 기다릴 것이다.
‘그러니까 이번 무도회도 완벽하게 해내야 해.'
나 외에 다른 사람을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 내 목표였다.
‘하지만 저쪽에선 무슨 짓을 해서라도 날 물어뜯으려고 하겠지.'
굳이 라리사 모어의 편이 아니라도 나를 적대시하는 자들은 많았다. 듣도 보도 못한 애가 갑자기 공작 부인의 자리에 올랐으니 불만을 품는 것도 당연했다.
“포도주 샤워만큼은 피하고 싶은데.”
소설에서나 등장하는, 실수인 척 음료수 끼얹는 일이 현실로 나타날 수 있다는 소리다.
그렇다고 상대의 멱살을 잡고 때릴 수도 없고, 문 워크로 포도주를 피할 수도 없으니, 아예 그런 상황을 안 만드는 게 최선이었다.
“흐음, 무슨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머리를 감싸 쥐고 고민하던 나는 다급한 코코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밖으로 나가 본 나는 날고양이들에게 쪼이고 있는 아버님을 발견했다. 꼭 늙고 쭈글쭈글한 고양이가 다른 고양이들에게 괴롭힘 당하는 모습 같았다.
”으어어엉!"
기껏 구해 줬더니 고맙다는 말도 안 하고 우엉우엉 우는 모습까지 똑같았다. 어쩔 수 없이 주워서 벽난로 앞에 던져뒀더니 뜻밖의 보상이 나왔다.
잘못이란 잘못은 다 저질러 놓고도 도도하게 굴던 아버님이 백기를 흔든 것이다.
그래 봤자 크게 달라지는 일은 없었지만.
‘뭐, 얌전히 무도회에 참석해 주기는 하겠네.'
아버님은 내게 명분을 주는 것 외에는 도움이 하나도 안 된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도련님이라 체력도 없고 특기는 더 없다. ‘아버님이 백 마리 있어도 아무런 도움이 안 되겠지. 응? 잠깐만? 백 마리?'
순간, 내 머릿속에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사람들에게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면서도 포도주를 뒤집어쓰지 않을 방법이!
“아버님, 부탁드릴 게 있어요.”
”으, 으응?”
나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아버님의 어깨를 움켜잡은 채로 히죽 웃었다.
그래, 내가 세스도 아닌데 정정당당하게 싸울 필요가 뭐가 있나. 지금부터 나는 비겁하고 졸렬하게 무도회를 주름잡을 것이다.
“지금 당장 초대장을 써 주세요.”
* * *
아스트라이아강림 축일.
천공신 아스트라이아가 지고왕에게 다섯 개의 신기를 건네준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태양이 가장 높게 떠오르는 정오에 기념식이 열리며, 수도에 있는 모든 귀족들이 참여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기념식에 가기 위해 준비 중이던 귀족들은 뜻밖의 초대장을 받았다.
바로 축일의 밤에 왕궁에서 열리는 무도회에 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귀족들은 아주 난리가 났다.
“왕실 무도회라니, 이렇게 갑자기?"
"입고 갈 옷이 없는데 어떡하죠?"
무도회의 초대장은 적어도 3주 전에’ 보내야 했다. 이렇게 갑자기 초대하는 것은 결례였다. 하지만 초대 한 사람이 왕인 이상 감히 불평할 수가 없었다.
“이블린, 그 여자 때문이군!"
결국 불똥은 다른 곳으로 튀었다. 초대장에 엘마이어 공작 부인의 데뷔 무도회이니 꼭 참석하길 바란다는 말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항구와 마탑이 그녀 때문에 엉망이 되었다고 들었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폐하께선 그녀를 감싸시는 건가?”
“오히려 이런 때니까 더 싸고도는 거겠죠. 왕실이 뒷배니 감히 건드리지 말라고요.”
귀족들은 불평불만을 쏟아 내며 무도회에 참석할 준비를 했다.
물론 짧은 시간 내에 준비하는 것이니만큼, 평소처럼 옷과 치장에 공을 들일 수가 없었다. 귀족들은 이것 또한 이블린을 돋보이기 위한 수작이라며 이를 갈았다.
그들만큼 준비 시간이 짧았던 이블린이 들었다면 굉장히 억울했을 소리였다.
그리고 그들과는 다른 방식의 관심을 드러내는 지들 이 있었으니, 방탕하게 노는 것을 좋아하는 귀족 도련님들이었다.
“굉장히 순진한 여자라던데? 결혼식에서 맹세의 키스를 할 때 거의 정신을 잃었다더군.”
“그때는 순진했겠지만 지금은 아닐걸?"
“결혼하자마자 남편인 공작이 나바르로 끌려갔다던데 뭘 아직 멋모르는 어린에일 확률이 높아."
"춤추면서 더듬어 보면 알겠지.”
그들은 히죽거리며 더러운 말을 지껄였다. 누가 먼저 이블린을 유혹하는지 내기를 걸기도 했다.
반면, 귀족 아가씨들은 냉담했다. 이블린의 예상과 달리 그들은 포도주를 퍼부을 생각도 없었다.
이블린 같은 자와 말을 섞는 것도 자신의 격을 떨어트리는 짓이라며 철저하게 무시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렇게 각자의 계산과 속셈 속에서 무도회의 밤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