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케인은 바람맞은 사람처럼 씩씩거렸다.
‘무도회에 가려면 나할테 와서 파트너가 되어 달라고 부탁해야 할 텐데, 대체 왜 안 오는 거야? 설마 다른 놈이랑 가려는 건가?'
이제 막 결혼한 공작 부인이 외간 남자와 함께 무도회에 나타나면 무슨 소리를 들을지는 아주 뻔했다. 케인은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절대 안 돼! 누굴 망신시키려고!'
이전의 그였다면 세스가 망신당하는 것을 아주 즐거워하며 구경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가문의 명예를 핑계대어 이블린을 뜯어 말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변화를 아직 깨닫지는 못했다.
“큰 주인님, 산책하실 시간입니다.”
때마침 나타난 시종이 정중히 말했다. 얼마 없는 외출 시간이었다. 케인은 잘됐다는 표정을 숨기려고 애쓰며 헛기침을 했다.
"생각할 것이 있으니 따라오지 마라.”
“……예.”
멈칫한 시종이 이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케인은 삐쭉 입술을 내밀었다.
‘전에는 한시도 안 떨어지고 감시하더니.'
감시가 없으면 좋아해야 할 일이지만 왠지 괘씸한 마음부터 들었다. 이블린이 찾아오지 않으니 시종들도 성의가 없어진 느낌이었다.
사실 케인이 감시를 따돌리고 나왔다가 쓰러진 날에 시종들은 시종장에게 엄한 벌을 받았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안 이블린은 아예 감시를 풀어 버렸다. 이제 시종 들에게 맡기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모르는 케인은 자신이 푸대접을 받고 있다는 착각에 씩씩거렸다.
‘내가 더 이상 쓸모가 없다는 건가?'
생각해 보니 이블린이 소홀해진 시기도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들은 후였다.
‘이젠 억지로 약을 먹이지도 않고, 문안 인사한다면서 찾아와 빈정거리지도 않고, 강제로 운동시키지도 않고.......'
이블린의 악행을 하나하나 떠올리던 케인은 울컥했다. 마치 실컷 이용당하고 버려진 기분이었다.
‘안 되겠군. 가서 따져야겠어! '
케인은 정해진 산책로를 이탈해서 별궁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가는 동안 파닥거리는 날갯짓 소리가 들렸지만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한 무리의 그리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이, 이게 뭐야!"
얼렁뚱땅 프리지어 궁으로 이주한 그리핀들은 전처럼 말썽을 부리지 않았다. 공작가의 폭군이자 군기 대장인 까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괜히 까불다가 까미에게 혼쭐이 난 그리핀들은 감히 사람에게 장난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까미의 냄새가 묻어 있지 않은 낯선 인간을 발견한 것이다.
-구르륵!
-구륵구륵!
그리핀들은 케인을 졸졸 따라다니며 장난을 쳤다. 부리로 콕콕 찌르거나 앞발로 툭툭 치기도 했다.
”으아악! 사람 살려!"
물론 그리핀들에게나 장난일 뿐, 당하는 케인은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비명을 지르며 도움을 요청했지만 하필 지나가는 사람하나 없었다.
‘이, 이렇게 죽는 건가?'
그리핀의 꼬리에 맞아 나동그라진 그는 눈앞이 기물가물해지는 것을 느꼈다. 죽음의 징조인지 멀리서 까마귀가 울고 있었다.
-까악!
“이 녀석들! 무슨 짓이야!"
순간 앞발로 케인을 꾹꾹 눌러 보며 탄성을 시험해 보던 그리핀들이 움찔했다. 그리고 갑자기 푸다닥거리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빈사 상태로 헐떡이던 케인은 간신히 눈을 뜨고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을 바라봤다. 이블린이었다. 반가움에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아버님, 여기서 대체 뭐 하세요?"
이블린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봉변당한 그를 딱하게 여기는 것 같지가않았다.
”으, 으으······.”
케인은 허우적거리며 이블린을 붙잡으려고 했다. 아직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블린은 냉정하게 그의 손을 피해 버렸다.
단순히 그녀의 체질 때문이었지만, 케인에겐 불결한 걸 피하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갑자기 그동안의 설움이 터져 버린 그는 꺽꺽거리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엥?"
놀란 토끼 눈이 된 이블린이 명하게 그를 바라봤다.
* * *
케인은 멍하게 난롯불을 바라봤다.
푹신한 소파가 그의 몸을 감싸 주었다. 들고 있던 잔을 홀짝이자 부드럽고 달콤한 코코아가 가슴 깊은 곳까지 온기를 전해 주었다. 처음 먹어 본 음료였지만 꽤 마음에 들었다.
“이제 좀 진정이 되셨어요?"
옆에서 그를 노려보던 이블린이 물었다. 케인은 일부러 못 들은 척했다. 울어서 창피하기도 했지만, 이제 괜찮다고 말하면 이블린이 훌쩍 떠나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침 저도 여쭤볼 게 있었네요. 아버님도 흑마법사로 전업한 라이언 아이오나에 대해 들으셨죠?"
"······."
“그리고 성국에선 대신관이 반란을 일으켰어요. 정말 신기하죠? 아버님이 믿을 만하다고 큰소리를 땅땅 쳤던 놈들이 전부 속이 시커멓네요?"
케인은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설마 했던 것이 갑자기 현실이 된 느낌이었다.
입을 열지 못하는 그를 보고 이블린이 피식 웃었다.
“아직도 라리사 모어가 아버님의 친딸이라고 생각하세요?"
케인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떨었다.
“이왕이면 세스의 친자 검사도 하는 게 확실하겠죠? 조만간 성국이랑 끈끈한 관계가 될 것 같으니까, 비밀 보장으로 성녀님께 부탁드려 보죠.”
“나, 나는…….”
케인은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짰다. 이블린은 싸늘한 얼굴로 그의 말을 기다려 주었다.
“나, 나도 속았어. 나도 억울한 피해자야.”
그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했다. 그러자 이블린이 냉정하게 대꾸했다.
“그들에게 속은 피해자는 맞죠. 하지만 세스에게는 가해자잖아요.”
“지, 진실을 알았다면······.”
“아버님은 그들에게 속기 전에도 세스를 구박하고 미워하셨잖아요.”
송곳으로 온몸을 푹푹 찔리는 느낌이었다. 케인은 저도 모르게 변명했다.
“어, 어쩔 수 없었다. 아서와 달리, 그 녀석은 뭐든 잘했으니까.”
케인에게 아서는 특별한 아이였다. 처음으로 품에 안은 자식. 자선을 쏙 빼닮은 장남.
공작의 자리를 물려받기엔 지나치게 마음이 약했지만 그런 점마저 안쓰럽고 사랑스러웠다.
반면 차남인 세스는 용모며 재능이며 모든 것이 압도적으로 뛰어났다. 그것이 케인에게 악몽 같은 과거를 떠올리게 했다.
과거, 케인은 지나치게 뛰어난 동생에게 짓눌리며 지옥 같은 유년기를 보냈다. 아버지가 갑자기 죽지 않았다면 그는 동생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비참하게 죽었을 것이다.
“세스를 볼 때마다 나를 비웃던 동생이 생각났다. 그 끔찍한 놈이 생각나서 견딜 수가 없었어."
이대로 둘을 자라게 하면 똑같은 일이 반복될 터. 케인은 자신의 열등감과 고통까지 그대로 물려받을 아서가 너무 안쓰럽고 불쌍했다.
그래서 그는 세스를 신전으로 보내기로 했다. 그것만이 자신과 아서, 그리고 세스까지 평온하게 살 수 있는 길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아내인 캐서린이 반대했다. 그녀는 아이들의 미래는 스스로 결정하게 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항상 자산의 편을 들어 주던 아내의 돌변에 케인은 마음이 상했다. 그 분노 또한 세스에게 향했다.
“네, 안 궁금했지만 잘 들었습니다. 별로 감동적이진 않네요.”
냉담한 이블린의 반응에 케인은 조금 억울해졌다. 자신 또한 힘들었는데 왜 이해받지 못하는 것일까.
“아버님이 동생과 차별받으며 자라서 힘들었던 건 알겠는데, 왜 그걸 세스에게 물려주세요? 맞을래요?"
“나는······."
여전히 억울해하는 그를 본 이블린이 한숨을 쉬었다.
“아버님이 반성하든 말든 상관은 없어요. 그래도 이제 세스가 친아들이고, 세스가 죽으면 엘마이어 가문 도 셔터 내린다는 것 정도는 인정하시겠죠?"
“······.”
인정하기 싫어서 미뤄 둔 사실이었다. 인정하는 순간, 그가 서있을 곳이 없어질 테니까.
“그것도 인정하기 싫으시면 됐어요. 기대도 안 했으니까. 이제 여길 떠나든 남아 있든 미음대로 하세요.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이블린이 획 몸을 돌렸다.
순간, 툭하고 뭔가가 끊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케인은 마차벼랑으로 내던져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자, 잠깐만!"
“아버님 , 전 지금 바빠요. 아버님을 신경 써 드릴 시간이 없어요. 솔직히 그러고 싶지도 않고요. 아버님도 제가 신경 쓰지 않는 쪽이 편하시잖아요?"
이블린은 항상 그에게 매정하고 날카롭게 말했기 때문에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그것을 듣는 그의 마음이 잔뜩 약해져 있었을 뿐이었다.
“내, 내가 잘못했다!"
케인은 저도 모르게 다급하게 말했다. 이블린이 힐끗 그를 돌아보았다.
“뭐가요?"
“세, 세스를 구박하고 미워한 거……."
“그건 제가 아니라세스에게 사과하셔야죠.”
“사과할게! 사과할 테니까…… 날 그렇게 미워하지 마라!"
케인은 반쯤 울먹거렸다. 그러자 이블린은 난처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아니 , 제가 뭘 그렇게 미워했다고 그러세요?"
“나, 날 쫓아내려고 했잖아!"
원망스러워하는 그를 보고 이블린이 황당해했다.
“제가 아버님을 가두고 학대한다면서요? 어떻게든 탈출하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보내 드린다는데 뭐가 불만세요?"
"안 나갈 거야. 난 여기서 살고 싶다.”
케인은 조금 비굴하게 말했다.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허! 소리를 내는 이블린을 보자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는 여기서 나가고 싶지 않았다.
이블린은 그를 구박하고 괴롭혔지만, 그래도 해치지는 않았다. 사실은 이것저것 챙겨 주는 쪽이었다.
아내가 축은 뒤로 케인을 진심으로 대해 준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 웃으면서 그를 이용하거나, 입으로만 걱정했다. 레이우드 일가 역시 그를 돌보는 척 독살하려 들지 않았는가.
반면 이블린은 그를 싫어하고 미워하면서도 약을 먹이고 운동을 시켰다. 쉴 새 없이 구박해도 그가 진짜 잘못되길 원하지는 않았다. 케인은 그런 이블린의 관심을 지금처럼 계속 받고 싶었다.
"진짜 고양이야? 나가라니까 싫대.”
뭐라고 투덜거린 이블린이 코코아 한 잔을 더 따라 주었다. 그러곤 쌀쌀맞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말썽부리면 쫓아낼 거예요.”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인 케인은 울먹거리며 따뜻한 온기를 감싸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