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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169화 (169/240)

169화

내 머릿속에 있는 무도회의 이미지는 종이 12번 울리는 동안 유리 구두를 신고 100미터를 주파하는 초인 경기에 가까웠다.

아니면 이 포도주가 식기 전에 상대의 목을 베어 오겠다고 외치는 천하제일 무투 대회나.

응, 아니야 이건 좋은 선택이 아닌 것 같아.

“폐하, 전 아직 그런 무서운 자리에 참석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이블린 네가 공작 부인이 된 이상 사교계에 나가는 것은 피할 수가 없다. 빨리 결혼시켜 달라고 떼를 쓴 네 남편을 원망해라."

가만히 있다가 화살을 맞은 세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폐하께 부담을 드릴 생각은 없습니다. 제 아내의 사교계 데뷔는 제가 책임지도록 하겠습니다.”

“너야 엄격하게 선별한 손님들만 모아 놓고 안전하게 네 아내를 소개하고 싶겠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러자 대놓고 코웃음을 친 왕이 나를 향해 말했다.

“무도회에 로엔 공국의 사절을 초대할 계획이다. 나바르 왕국의 특사도 당연히 참석할 테고. 신성 왕국에서도 차기 성녀가 방문할 예정이야. 이 셋을 무도회의 귀빈으로 삼으면 좋겠구나.”

왕실과 함께 동맹 왕국들이 나를 지지하는 모습을 보여 주겠다는 소리였다. 내게 힘을 실어 주려는 왕의 의지가 느껴졌다.

하지만 세스는 여전히 왕의 의도가 미심쩍은 듯했다.

“그들을 초대하는 것 정도는 저도 할 수 있습니다. 폐하께선 일부러 제 즐거움을 뺏으시려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럼 안 되느냐? 이블린은 네 아내지만, 내 귀염둥이이기도한데?"

”폐하!”

세스가 화를 낸 뒤에야 왕은 장난치는 것을 그만두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라리사 모어가 이혼 신청을 철회하고 사교계에 복귀한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네? 이렇게 갑자기요?"

라리사 모어는 백작인 남편과 이혼 절차를 밟고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혼을 그만두고 클라멘스 백작 부인의 신분으로 돌아오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적이 아직 약할 때 공격하려는 거겠지. 너는 아직 사교계에 기반이 없으니 말이다.”

신성 왕국의 일이 급한데, 라리사까지 상대해야 하다니.

떨떠름해하는 나와 달리 왕은 이것이 아주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블린, 네 시아버지 케인 엘마이어를 무도회의 파트너로 삼을 수 있겠느냐?"

“네?!”

왕이 화들짝 놀라는 나를 보고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왜? 자선이 없느냐?“

“저, 폐하. 제 파트너가 꼭 아버님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나요?”

“라리사 모어의 인맥은 대부분 네 시아버지에게서 나온 것이다. 나머지는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지.”

결국 아버님을 앞세워서 라리사 모어의 인맥을 빼앗으라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불가능 하겠지만, 너는 이미 네 시아버지를 길들이지 않았느냐?"

갑자기 사교계가 땅따먹기 게임이 된 것 같았다. 나는 망설이며 세스를 바라봤다.

그 모습을 보며 왕이 쯧쯧 혀를 찼다.

“네 남편은 혼자서 세상을 고립시키는 녀석이야. 저 녀석보단 네가 더 인맥이 많을 거다.”

세스는 왕의 폭언에도 얼굴을 굳힌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머뭇거리며 물었다.

“저, 그런데 제가 아버님과 참석하면 공작님은…….”

“다시 나바르로 돌아가서 열심히 일해야지. 안 그러냐?"

결국 세스는 무도회에 참석하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나는 시무룩하게 왕을 바라봤다.

”폐하, 이건 상이 아니라 벌인 것 같습니다.”

“당연히 상이면서 벌이지.”

왕이 당연하다는 듯이 작게 웃었다.

"얼굴이 많이 축났구나. 상과 함께 몸에 좋은 약재를 준비했으니 가져가도록 해라.”

결국 우리는 쫓겨나듯 알현실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기다리고 있던 시녀장 피오나가 내 품에 황금색 상자를 안겨 주었다.

”며칠 동안 깨어나지 못하셨다는 말을 듣고 폐하께서 무척 걱정하셨습니다. 몸을 튼튼하게 하는 약재들 이니 잊지 말고 꼭 챙겨 드세요.”

“가, 감사합니다.”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나머지 하사품은 마차에 실어 두었다고 덧붙인 그녀가 세스를 바라봤다. 다소 걱정스러운 시선이었다.

"되도록 빨리 나바르로 복귀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임무를 이탈했다는 소문이 나서 좋을 것은 없으니까요.”

세스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그제야 그가 나 때문에 임무를 팽개치고 돌아 왔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죄송해요.“

눈치를 보던 나는 마차에 탄 후에야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세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가 죄송해?"

"저 때문에 임무를 망친 것도 그렇고, 다치게 만든 것도 그렇고, 그동안 걱정시킨 것도 그렇고…….”

말하다 보니 죄목이 끝이 없었다. 시무룩해진 나를 보고 작게 옷은 세스가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렇게 말하면 나도 당신에게 사죄해야겠군.”

“네? 뭘요?"

“제대로 된 인맥을 만들지 못해서 당선에게 힘든 일을 강요하게 됐으니까.”

“전혀 힘들지 않아요. 아버님은 뭐, 장식용 토템이라 고생각하면 되니까.”

그러고 보니 요새 아버님이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몰래 탈출한 건 아니겠지?

‘도망쳤으면 잡아 오면 되지만 꽤 귀찮은 일이니까.’

그렇다고 세스에게 아버님에 대해 물어보는 것은 너무 무신경한 일이었다. 나는 그냥 집에 돌아간 뒤에나 확인하기로 했다.

“당신의 사교계 데뷔는 내가 준비해 주고 싶었는데. 궁을 꾸미고, 당신에게 어울리는 드레스와 꽃을 준비하고, 파트너로서 첫 춤을 출 생각이었어.”

세스가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심각한 그에겐 미안하지만, 너무 귀여운 모습이라 나도 모르게 넋을 빼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럼 드레스랑 꽃은 세스가 골라 줄래요?"

“응?”

“뭐든 세스가 선택한 것을 입을게요.”

밀가루 포대를 줘도 기쁘게 입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세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일로 나를 위로하지 않아도 돼. 사교계에 데뷔 하는 것은 단 한 번뿐인 일이니까 당신이 원하는 옷을 선택해야지.”

하지만 나는 사교계에 대한 로망이 없었다.

정확히는 잘생긴 남편과 친한 친구들이 이미 있는 이상 사교계에 나갈 필요를 못 느꼈다. 라리사 모어만 아니었어도 평생 발을 들이지 않았을 터였다.

“그럼 첫 춤은 추지 않고 아껴 둘게요. 세스가 오면 같이 추고, 그게 아니면 아무하고도 안 출래요.”

“하지만 나는…….”

“일 빨리 끝내고 오면 되잖아요. 세스가 올 때까지 기다릴 테니까."

사실 말도 안 되는 요구였지만 세스는 다정히 웃어 주었다.

“내 아내를 벽의 꽃으로 만들 수는 없지. 다만 첫 춤은 파트너와 춰야해."

뭐여, 그럼 내 첫 춤 상대가 아버님이라는 소린가?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가 아버님의 발동 위에서 탭댄스를 춰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해 주겠어? 무도회가 끝나기 전까지 당신에게 갈 데니까.”

왠지 마음이 찡해진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만 끄덕였다. 세스가 그런 내 뺨을 살짝 어루만졌다. 나는 충동적으로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많이 보고 싶을 거예요.”

“나도.”

정신을 잃은 동안 세스가 계속 옆에 있었겠지만, 나한테는 눈을 뜨자마자 도로 헤어지는 것과 다름없었다. 세스가 너무 부족해서 갈증이 날 것 같았다. 나는 어리광 부리듯 그의 품에 뺨을 비렸다. 세스가 그런 내 머리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이비, 하나만 약속해. 내가 없을 때 혼자 성국으로 가지 않겠다고."

복실이 실종 사건 때처럼 나 혼자 성국으로 가서 문제를 해결할까 봐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약속할게요.”

어차피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저항군이 모이고 모든 준비가 끝날 때까지 얌전히 기다 릴 생각이었다.

‘무도회를 먼저 처리하고 나서 성국으로 가면 되겠군.’

이번에는 반드시 세스와 함께 성국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래야만 세스가 오명을 벗고 신전의 은인이 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때는 물어볼 수 있겠지.

“네 남편은 혼자서 세상을 고립시키는 녀석이야 저 녀석보단 네가 더 인맥이 많을 거다.”

세스가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자들을 외면하면서까지 자신을 고립시킨 이유를.

나는 몇 번이나 떠올렸다가 묻어 버린 질문을 생각 하며 눈을 감았다.

* * *

케인 엘마이어는 초조하게 방 안을 돌아다녔다.

그는 이블린이 무려 닷새 만에 눈을 떴다는 소식을 듣고 펄쩍 뛰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달려가서 확인하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찾아가면 내가 그 괘씸한 녀석을 걱정한 것 같잖아!’

이블린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놀라서 쓰러지기까지 했지만, 결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쓰러진 건 아이오나가 흑마법사라는 말에 놀라서 그런 거야! 그 녀석을 걱정한 게 아니라고!'

그도 그럴 것이 이블린은 온갖 학대와 비난을 일삼는 악독한 며느리였다.

그런 이블린이 쓰러졌다고 걱정한다면 그야말로 맞고 사는 시아버지가 아닌가.

그러니 이건 걱정이 아니라 단순한 호기심일 뿐이었다.

‘흥, 문안을 올 때까지 기다려 주지.’

케인은 툴툴거리며 하루를 기다렸다.

하지만 다음 날이 되어도 이블린은 나타나지 않았다. 초조함에 손톱을 물어뜯던 그는 결국 시종에게 볼멘소리를 했다.

“자네가 효부라고 그렇게 칭찬하던 내 며느리는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나! 문안 인사도 안올리고 말이야!”

시종은 공손하지만 무척 당연하다는 투로 대꾸했다.

“마님께선 지금 무도회 준비로 바쁘십니다.”

“무도회?”

“주인님께서 너무 급히 결혼식을 올리시느라 마님의 사교계 데뷔가 늦어졌습니다. 그래서 국왕 폐하께서 직접 마님을 위해 무도회를 열어 주시기로 했답니다.”

시종의 얼굴엔 이블린에 대한 자랑스러움으로 가득 했다. 케인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뭐가 그렇게 급해서 데뷔를 하기도 전에 결혼식을 올려 아니, 잠깐 지금은 세스 녀석이 없지 않나?"

“예, 주인님께선 임무 때문에 궁을 비우셨습니다. 무도회 전까진 돌아오지 못하실 것 같습니다.”

“그래애?"

그럼 이블린은 무도회에 함께 갈 파트너가 없다는 소리였다.

사교계 데뷔의 파트너는 몹시 중요했다. 일가친척이 나 약혼자와 입장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이블린은 기혼녀에 다른 친척도 없으니 케인이 아니면 함께 갈 사람이 없었다. 거기까지 떠올린 케인의 목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뭐, 직접 찾아와서 부탁하면 가줄 수도 있고.'

하지만 예상과 달리 이블린은 그날도, 그다음 날도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

“아니 , 왜 안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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