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나는 어리둥절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처음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커다란 덩치에 거무스름한 피부, 북슬북슬한 머리는 검은색, 눈은 기묘하게 빛나는 황금색이었다.
경계와 호기심 섞인 시선이 묘하게 버려진 삽살개를 떠올리게 했다. 음, 털 정리를 좀 해야겠는데?
“말라크 경, 내 아들이 실수를 저질렀다고 해서 아내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것까지 용납할 수는 없다.”
세스의 말에서 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이 남자가 바로 복실이에게 붙잡혀서 이동 셔틀이 되었던 사람인 것 같았다.
“한 번 더 불쾌한 발언을 하면 손님으로 여기지 않겠다. 경고는 여기까지다."
상대가 계속 선을 넘으면 주저하지 않고 손을 쓸 기세였다. 남자도 그것을 느꼈는지 곧바로 공손해졌다.
"실례했습니다. 로엔 공국에서 온 말라크라고 합니다."
“이블린 엘마이어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그대로 넘어가나 싶었는데 , 말라크가 눈을 빛내며 덧붙였다.
“저는 부인께서 갖고 계신 빛의 창의 주인이자 그리핀을 돌려받기 위해 온 사람입니다.”
나를 도독 취급하는 말투였다.
다음 순간, 챙 하고 검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말라크가 뒤로 물러섰다. 그는 어느새 뾰족한 가시 같은 것을 손에 들고 있었다.
반면 세스는 빈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손에서 보이지 않는 뭔가가 일렁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걸로 방금 말라크를 공격한 듯했다.
-뿌!
싸우는 소리에 황급히 날아온 복실이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세스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엄마에게 가 있어.”
-뿌우······.
복실이가 안절부절못하며 나를 쳐다봤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게 둘을 말려 달라는 것 같았다.
나는 세스의 팔을 살짝 붙잡았다.
“세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아요. 잠깐 이야기할 시간을 줘요.”
"······."
멈칫한 세스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아이고, 착해라. 나중에 뽀뽀해 줘야지. 칭찬하듯 그의 팔을 토닥인 나는 말라크를 쳐다봤다.
“흐음.”
기분 탓일까. 경계 어린 눈으로 이쪽을 보는 말라크가 꼭 눈치를 보는 떠돌이 개 같았다.
여기서 살아도 될까, 집주인은 좋은 사람인가, 시험해 보는 느낌 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여기서 책임질 존재를 더 늘릴 생각이 없는 나는 모른 척 입을 열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빛의 창의 나머지 반쪽이 왜 당신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예?“
“나머지 반쪽은 다른 주인을 선택할 수도 있잖아요? 쌍둥이 중 첫째가 당신을 좋아한다고 해서 , 둘째도 그럴 거라고 믿는 이유가 궁금해서요.”
“그건······,”
생각도 못 해 본 말인지 말라크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둘을 합친다고 해도 마찬가지예요. 온전해진 빛의 창이 당선을 선택할 거라고 어떻게 확신해요?"
창의 원래 주인인 배반의 기사도 아니면서, 반쪽을 갖고 있다고 나머지도 내놓으라는 것은 완전히 도둑놈 심보였다.
내 말에 상처받은 표정을 지온 말라크가 물었다.
“제가 반쪽이라서 온전한 창의 선택은 받지 못할 거라는 소리입니까?"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제가 수인족의 혼혈이니까…….”
어리동절한 눈으로 쳐다보자 말라크도 이게 아니다 싶었는지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실례했다고 고개를 숙인 그가 말을 이었다.
"부인의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온전한 빛의 창이 주인이 될지 확신할 수는 없죠. 하지만 시험해 볼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뜻밖의 시원시원한 인정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폐하께 부탁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제게는 아무런 권한이 없으니까요.”
한 가지 문제를 마무리한 나는 곧바로 다음 문제로 넘어갔다.
“그리고 고양이-아니, 그리핀 말인데요. 공국에서 애들을 학대하는 건 알고 계셨나요? 죄다 약물 중독에, 그 부작용 때문에 쇠약해진 애들도 있던데.”
아예 모르는 일은 아니었는지 말라크의 얼굴이 조금 흐려졌다.
“······그리핀이라는 맹수를 길들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애들은 그런 취급을 당하는 게 싫어서 여기로 도망친 거잖아요. 그걸 알면서도 넘겨주면 저도 똑 같은 사람이 되는 건데요?"
애초에 애들을 중독 시키면서까지 억지로 끌고 다니는 게 문제다. 하다가 안 되면 포기할 줄도 알아야지.
“저는 살려고 도망친 애들을 강제로 돌려보낼 생각은 없거든요."
뭐라고 반박할 줄 알았는데 팔리크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를 위해 덧붙였다.
“그리고 돌아가겠다는 애들을 붙잡을 생각도 없어요. 데려가고 싶으시다면 직접 애들을 설득하세요.”
이 정도면 나도 많이 양보한 셈이었다. 잠시 나를 반히 쳐다보던 말라크가 입을 열었다.
“아직 한 가지는 대답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네? 뭘요?"
“대지신의 성력을 왜 그런 곳에 쓴 겁니까?"
어? 아까 그 말이 이유를 묻는 거였나?
”잃어버린 부위를 재생시키는 것은 기적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힘이 필요하다고 들었습니다.”
잃어버린 털을 자라게 하는 것이 기적이었다니, 탈모인들은 많이 힘들겠구나. 말라크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걸 고작 뱀의 털을 자라게 하는 데 쓰다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애초에 뱀은 털이 필요 없잖습니까?"
-뿌!
옆에서 듣던 복실이가 강하게 반발하며 울었다. 나는 녀석을 달래듯 쓰다듬었다.
“뱀에게 털이 필요 없다는 건 누가 정하는 거죠?"
-꾸!
복실이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복실이의 털을 자라게 한 것에 별다른 이유는 없어요. 그냥 그러고 싶었을 뿐이지.”
말라크의 얼굴이 괴상해졌다. 생긴 것만 보면 뒷골목을 주름잡을 것 같은데 , 뜻밖에 고지식한 타입인 모양이다.
‘애초에 모든 행동에 의미가 있을 필요가 있나?'
그렇게 따지면서 사는 건 너무 피곤할 것 같은데.
바로 그때, 내 안에 남아 있던 대지신의 힘이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방향을 보니 꼭 말라크에게 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저항 없이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복실이에게 털을 자라게 한 힘이 뻗어 나와 말라크의 몸을 감쌌다. 다음순간, 그의 머리 위에 퐁하고 삼각형의 강아지 귀가 생겼다.
“엥?"
당황한 나처럼 말라크도 화들짝 놀랐다. 머리 위를 더듬어 자산의 귀를 만진 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으아악!”
그는 마치 희롱당한 사람처럼 자신의 귀를 감싸 쥔 채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는 당황해서 멀거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비.”
세스가 왠지 탓하는 것 같은 어조로 나를 불렀다. 나는 억울함을 가득 담아 그를 쳐다봤다.
“제가 한 게 아니에요."
멀쩡한 총각에게 동물 귀를 만들었지만 이건 대지신의 뜻이었다. 복실이의 폭주족 머리도 그렇고, 대지신의 취향이 좀 마이너한 것 같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세스가 입을 열었다.
”로엔 공국에서 수인족은 노예로 취급돼. 그는 아마 아주 어렸을 때 붙잡혀서 귀를 잘렸을 거야. 지금은 너무 당황해서 도망쳤지만, 곧 다른 생각을 하겠지.”
“다른 생각이요?"
“수인족에게 귀는 특별한 의미니까. 그걸 돌려준 당신도 그에게 아주 특별하게 느껴질 데고.”
한숨을 내쉰 세스가 나를 달랑 안아 올렸다.
“지금도 충분하니까 더 이상 경쟁자를 늘리지 말아 줘.”
“네? 경쟁자라뇨. 전 절대 그런 의도가······."
어떻게든 해명하려는 나를 꽉 껴안은 세스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아니, 내가 더 노력할게. 당신이 한눈팔지 않도록.”
”으아아, 아니야! 대지신님! 해명해 주세요!"
하지만 무정한 신상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 * *
프리지어 궁의 순회가 끝난 뒤, 나는 곧바로 왕궁으로 향했다. 이번에 친 사고를 왕에게 직접 해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세스는 자신이 대신 하겠다고 나섰지만, 내 잘못이 분명한데 용서를 비는 것을 그에게 맡길 수는 없었다. 아무런 약속을 하지 않았음에도 우리는 프리패스로 바로 왕을 만날 수 있었다.
구구절절한 내 변명을 들은 왕이 피식 웃었다.
“그래, 멀쩡한 항구를 때려 부순 이유는 잘 들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때는 복실이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는데, 머리가 좀 식자 내가 얼마나 엄청난 짓을 저질렀는지 실감이 났다.
“다행히 항구를 때려 부수고 마탑을 뭉개 버린 것치고는 별다른 반발이 나오지 않고 있다. 오히려 모두가 네 눈치를 보고 있는 상황이야.”
내 신분을 따지며 나를 우습게보고 있던 자들마저 조용히 상황을 살피고 있다고 했다. 내가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리자 왕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짐은 네가 좀 더 뻔뻔하게 나올 줄 알았다."
“네?!”
“대마법사 아이오나를 처치한 네 공로는 네가 저지른 잘못을 모두 덮고도 남을 정도니까.”
저주나 날리는 음침한 영감탱이라고 욕만 했는데, 생각보다 거물이었던 모양이다.
“왕실 기사단을 전부 동원해도 상대하기 어려운 적을 너 혼자 해치웠으니, 벌이 아니라 상을 받아 마땅하지.”
씩 웃은 왕이 내게 줄 상을 발표했다.
“이블린, 너를 사교계에 소개하는 무도회를 왕궁에서 열겠다. 오직 너만을 위한 무도회가 될 거다.”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