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나는 복실이가 당장 코코에게 달려들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혼자 부들거리며 분을 삭인 복실이는 천천히 내 쪽으로 날아왔다. 그리고 내 뺨에 얼굴을 비비며 작게 울었다.
“아이고, 내 새끼. 엄마 걱정했어? 이제 괜찮아."
-뀨…….
세스는 복실이가 어떻게 집을 탈출해서 그에게 갔는지 설명해 주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아스트라이아의 이름을 부르게 했다는 말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복실이도 많이 반성했어. 엄마가 자기를 찾다가 악당에게 죽을 뻔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세스의 말에 고개를 폭숙인 복실이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나는 그동안 마음고생을 많이 했을 녀석을 열심히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데 만질 때마다 일자로 밀린 털이 너무 신경 쓰였다.
“머리는 누가 이랬어? 우리 귀여운 복실이 머리를 누가 이렇게 만들었어?"
-뿌우······.
복실이가 털에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나는 괜히 속이 상해서 복실이 편을 들어 주었다.
"까미가 준 벌이야. 몰래 집을 나갔으니까 혼나야 지.”
세스가 엄하게 말하자 문틈으로 우리를 엿보고 있던 주크와 성냥이 도망쳤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에 나는 한숨을 쉬었다.
“세스, 제 일과 복실이가 가출한 일은 별개라고요.”
“알아, 그러니까 둘 다 혼나야지.”
어 , 잠깐만. 나도 혼나야 돼?
내가 한 거라곤 항구 좀 얼리고, 마탑 좀 때려 부수고, 마법사랑 치고받고 싸운 것밖에 없는데?
하지만 세스를 보니 출장 간 사이에 집이 홀라당 타 버린 것을 목격이라도 한 표정이었다. 상황이 불리하다는 것을 느낀 나는 얼른 세스의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면 안 돼요? 혼나는 거 싫은 데.
"
-뀻뀨!
나와 복실이를 번갈아 보던 세스가 한숨을 쉬었다. 그는 도저히 못 이기겠다는 얼굴로 나완 복실이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갓!
그러자 그의 품에서 빠져나온 코코가 팔짝 뛰었다. 이렇게 넘어가면 안 된다고 항의하는 듯했다.
바로 그 순간, 내 품에서 빠져나온 복실이가 코코를 덮쳤다.
-카악!
-깍!
침대 위로 떨어진 코코가 날개를 퍼덕거리며 저항했다. 하지만 복실이는 야무지게 코코를 물어뜯고 꼬리로 두들겨 됐다. 덩치가 훨씬 더 큰 코코가 꼼짝도 못 하고 맞고 있었다.
"보, 복실아.”
“쉿.”
너무 심한 것 같아서 말리려 했는데 세스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잠시 뒤에 결판이 났다.
코코가 울며불며 도망치자 복실이가 입에 문 깃털을 웨 뱉어 냈다. 의기양양해진 녀석이 세스의 어깨에 앉았다. 그리고 귀엽게 울며 세스의 뺨에 얼굴을 비렸다.
“서열 정리가 끝난 것 같지?"
세스가 복실이의 목을 긁어 주며 속삭였다. 나는 멀리서 훌쩍이는 코코를 보다가 복실이에게 물었다.
"복실아, 동생이 다친 것 같은데 엄마가 봐도 돼?"
복실이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엉망이 된 코코를 안고 깃털을 골라 주었다. 그래도 동생이라고 봐줬는지 큰 상처는 없었다.
"복실아, 코코가 엄마를 여기까지 데려와 줬어. 그러니 너무 미워하지 마. 코코도 이제 형을 약 올리면 안 돼.”
못마땅한 눈으로 서로를 힐끔거린 녀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상대를 인정하기로 한 것 같았다.
안심하는 나를 꼭 끌어안은 세스가 속삭였다.
“이비, 셋째 이름은 꼭 내가 짓게 해 줘.”
“······.”
이렇게 얼렁뚱땅 둘째가 생겨 버리고 말았다.
* * *
“아이오나가 죽었다고?"
소년은 도저히 못 믿겠다는 투로 되물었다. 검은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이블린 엘마이어, 그 간악한 여자의 짓입니다. 스승님의 마지막 사념에 따르면 지금껏 대계를 방해해 온 것 또한 그 여자였습니다. 주인님, 제발 스승님의 원수를 갚아주십시오!"
울부짖는 마법사룰 본 기사가 비웃었다.
"원수가 누군지 알면서도 대선 갚아 달라고 조르다니, 부끄럽지도 않나?"
“그, 그 여자의 능력은 우리와 상극이란 말이오! 저주를 손으로 튕겨 내다니, 대체 어떤 힘을 가진 것인지 아직 파악도 못 하고 있소.”
마법사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그러자 코웃음을 친 기사가 소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주군, 제게 맡겨 주십시오. 엘마이어 놈들의 목을 베어 주군의 근접을 없앤 버리겠습니다.”
"페르난, 네게 맡길 일은 따로 있다.“
가볍게 옥좌의 팔걸이를 두드린 소년이 말을 이었다.
“상황을 보니 대지의 선전 쪽도 안심할 수 없을 것 같구나. 독인들을 이끌고 가서 대신관을 도와라.”
이미 예상했던 답이었는지 기사는 썩 놀라지 않고 어깨만 으쓱거렸다.
“대신관은 저를 썩 반기지 않을 것 같습니다. 뒤가 구리면서 깨끗한 척하길 좋아하는 놈이니까요.”
"목적을 이뤘으니 이쪽과 관계를 끊고 싶은 거겠지. 그게 착각이라는 것은 곧 깨닫게 되겠지만.”
대신관은 쐐기’를 사용해 신전을 손에 넣은 뒤로 연락을 모두 끊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쐐기와 숙주에 유통 기한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성녀의 힘이 아무리 강해도 계속 사용할 수는 없다. 곧 새로운 쐐기와 숙주로 바꿔야 해.”
대선관이 계속 선전을 좌지우지하려면 새로운 쐐기와 숙주를 얻어야 했다. 결국 소년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제가 놈에게 현실을 알려 주고 오겠습니다. 아마 정신이 번쩍 들겁니다.”
“지금까지 만든 독인들을 모두 데려가라. 이번 기회에 성국을 장악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돌아올 때 성기 사단장의 목을 가져왔으면 좋겠군.”
“예! 결코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자신만만하게 대답한 기사가 사라진 후에 소년은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마법사를 바라봤다.
“아이오나는 꽤나 쓸모가 있었는데, 제자인 너는 어디에 써야 할지 모르겠구나.”
“저, 저는 스승님의 작업을 대신할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쐐기와 독인을 만들어 바치겠습니다!"
“쐐기와 독인을 처음 만들어 낸 것이 나다. 네 능력이 그것뿐이라면 굳이 옆에 둘 이유가 없지.”
“무슨 일이 든 하겠습니다! 제발 기회를 주십시오!"
마법사가 바닥에 광광 머리를 찧으며 애원했다. 그 모습을 보던 소년이 손을 내저었다.
“그만, 네가 해 줄 일이 생각났다.”
마법사가 희망에 가득 찬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소년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라리사모어에게 가서 그녀를 도와라. 날뛸 수 있는 말이 있는데 굳이 썩혀 둘 이유는 없지.“
이미 한번 버렸던 말이지만, 주워서 쓰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소년은 라리사 모어를 움직여 이블린을 견제하기로 했다.
“도, 도우라고 하심은?”
”라리사 모어는 이블린 엘마이어에게 꽤나 깊은 원한이 있다. 그녀를 뒷받침해 주면 네 원수를 대신 갚아 줄 것이다."
“예 ,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환한 얼굴이 된 마법사가 서둘러 사라졌다. 홀로 남은 소년은 옥좌를 가볍게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블린 엘마이어라…….”
* * *
켄트 박사님의 꼼꼼한 검진 끝에 나는 완전히 회복 되었다는 진단을 받았다. 대지신의 발 마사지 덕분인지 평소보다 기운이 넘쳤다.
좀이 쑤셨던 나는 옷을 갈아입고 밖을 한 바퀴 돌 생각이었다. 그런데 굳이 따라 나온 세스가 나를 공주님 안기로 안아들었다.
“닷새나 누워 있던 사람이 갑자기 돌아다니면 모두가 걱정할 거야.”
그럴듯한 이유였지만 나는 속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봐요. 저 내려 주기 싫어서 방금 생각 해 낸 거죠?"
말없이 웃은 세스가 내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웃는 게 하도 예뻐서 그냥 얌전히 안겨 있기로 했다. 사실 세스의 품이 꽤 안락하기도 했고.
“마님!"
“깨어나셨군요!"
하지만 밖으로 나온 나는 세스가 옳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울면서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돌아와 주실 줄 알았습니다.“
눈물을 홀리며 다행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니. 내가 씩씩하게 걸어 나왔다면 난리가 났을 것 같았다.
나는 방금 회복된 환자답게 아련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전 이제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도 너무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아무렴요. 몸을 소중히 하셔야지요.”
호들갑을 떠는 사람들 때문에 찬바람이 들어가지 않도록 온몸을 꽁꽁 싸랬다. 도롱이 벌레가 된 나를 보고 세스가 작게 웃었다.
"계속 웃으면 뽀뽀해 버립니다?"
“몇 번 해 줄 건데?"
“헉!"
웃자고 한 말에 다큐로 받아치니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내가 입을 꾹 다물자 세스가 슥 고개를 숙였다.
꼬리처럼 졸졸 따라오는 사람들이 신경 쓰였던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사, 사람들이 보잖아요.”
내가 이런 부끄럼쟁이나 할 법한 대사를 치다니, 정말 말세였다. 둥글게 눈을 흰 세스가 내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보라고 해.”
아니, 이 남자가 언제 벤츠에서 소방차로 변경을 했지. 입을 떡 벌린 내 모습에 세스가 소리 내어 웃었다. 나는 미남은 웃음소리까지 영롱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주변을 한 바퀴 돌아서 나의 무사함을 알린 우리는 복실이를 데리고 마지막 목적지인 기도설로 향했다. 대지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기도실이라고 해도 별게 있는 건 아니고 텅 빈 방 안
에 대지신의 신상만 달랑 놓여 있는 곳이었다.
"복실아, 할머니 에게 인사드리자. 할머니는 아빠의 엄마야. 세상에서 제일 마음이 넓고 크신 분이셔.”
-꾸?
내 말에 호기심 어린 소리를 낸 복실이가 신상을 향해 날아갔다. 나무로 깎은 신상 주변을 한 바퀴 돈 녀석이 다시 내 쪽으로 돌아왔다.
-뿌······.
아무것도 없다고 불평하는 것 같았다. 나는 지나치게 똑똑한 녀석을 다독였다.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거야. 할머니께 복실이가 왔다고 인사드리고, 앞으로 건강하게 자라게 해 달라고 기도하자.”
내 말에 고개를 갸웃한 복실이가 눈을 감고 꿍꿍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복실이가 기도를 끝낼 때쯤 녀석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내 안에 남아 있던 대지신의 신력이 복실이 쪽으로 흘러가면서 깨끗하게 밀린 머리에 하얀 털이 솟아올랐다.
전에 있던 털보다 더 길게 자라서 가운데 털이 우뚝 선 것 같은 머리가 되어 버렸다. 웃음을 꾹 참은 나는 얼른 거울을 꺼내서 복실이에게 보여 주었다.
"복실아, 할머니가 복실이에게 답을 주셨네."
-뀻!
거울을 본 복실이가 팔짝 뛰어올랐다. 하얀 털을 흔들며 기뻐하던 녀석이 신상 쪽으로 날아가서 뺨을 비볐다. 복실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애정표현이었다.
대지신. 전도. 성공적.
“대지선의 성력을 뱀 털을 자라게 하는 것에 쓰다니?"
그때,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