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166화 (166/240)

166화

세스는 나를 환자처럼 품에 안고 물을 먹여 주었다.

별로 목이 마르진 않았지만, 꿈이라면H 빨리 깨야 할 것 같아서 꿀꺽꿀꺽 받아 마셨다.

하지만 물을 다 마시고 나서도 세스는 사라지지 않았다. 멍하게 눈을 깜빡이자 그가 작게 웃었다.

“졸려?”

“어, 아뇨. 그냥 지금 상황이 꿈인 것 같아서요."

"꿈이었으면 좋겠어?"

나는 서둘러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러고도 얼떨떨한 기분에 다시  한번 확인했다

"진짜 세스예요?"

"응.”

“아닌데, 우리 세스는 아직 나바르에 있을 텐데.”

“당신이 보고 싶어서 빨리 돌아왔지.”

싱긋 웃는 세스의 모습에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머릿속에선 조금 전에 들은 고백이 무한 반복되고 있었다.

"좋아해, 이비 . 정말로 당신이 좋아.”

와, 세스가 날 좋아한대. 세상에! 나는 반사적으로 이불을 꼭 쥐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손이 세스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손을 안전하게 봉인한 나는 소곤소곤 물었다.

"진짜 절 좋아해요?"

“아주 많이.”

”와······. "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독 이런 내 모습이 너무 바보처럼 보일 거 같아서 덧붙였다.

“사실 세스가 절 좋아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어요.”

“정말로?"

“당연하죠!”

틈만 나면 뽀뽀하고, 밤에 보고 싶다면서 찾아오고, 멀고 먼 북부까지 쫓아오고, 어두운 과거까지 말하면서 같이 있어 달라고 하는데 눈치를 못 채면 그건 내 머리에 문제가 있는 거다.

"알고 있었지만, 세스가 끝까지 인정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어째서?"

"복수에 방해가 되잖아요.“

"······."

처음엔 세스가 너무 둔해서 날 좋아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줄 알았다. 그다음엔 내가 너무 미천한 선분이라 자기 마음을 인정하기 싫은 줄 알았고.

그러다 흑막과 복수에 대해 알게 된 뒤에는 그런 생각을 한 것이 미안해졌다. 목숨을 걸고 복수를 하는 중인데, 잠깐 스쳐 지나가는 감정이 그렇게 중요할까.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려고 노력했다. 세스가 끝까지 날 좋아한다고 인정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에게 제일 중요한 건 복수였으니까. 방해가 되고 싶진 않았다.

분명히 그랬는데, 눈을 뜨자마자 쏟아진 고백에 나도 모르게 얼떨떨해진 상태였다.

"왜 마음을 바꾼 거예요? 나바르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전보다 얼굴도 청순 맞게 수척해진 것이, 뭔가로 마음고생을 톡톡히 한 게 틀림없었다.

“미안해.”

“네?”

“당신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다 내 잘못이야.”

나는 세스가 뭘 사과하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 손등에 살짝 입을 맞춘 세스가 말을 이었다.

“나는 복수를 끝내기 전엔 누군가를 좋아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어. 언제 죽을지도 모르면서 다른 사람과 마음을 나누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라고. 그건 미래가 있는 사람에게나 가능한 거니까.”

한번 죽어 봤던 나로서는 동의할 수 없는 말이었다. 당장 내일 급사해도 이상하지 않은 게 사람의 운명이거늘.

세스 역시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멍청한 소리였지. 자격을 따질 거면 대역이라는 핑계로 당신을 내 옆에 묶어 두면 안 됐어. 내 복수에 끌어들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까. 그런데 도저히 당신을 놓아줄 수가 없었어.”

“제가 선택한 거였잖아요.”

“아니, 내가 강요했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자학 타임 중인 김 세스 씨가 들어 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냥 세스를 꼭 끌어안았다.

멈칫한 세스가 나를 마주 안아 왔다. 나는 그의 어깨에 장난스럽게 쪽쪽 입 맞추고 속삭였다.

“그럼 처음 본 순간부터 절 좋아했어요?"

“아마도. 무슨 핑계를 써서라도 옆에 묶어 둬야겠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럼 언제 알았어요?"

“당신이…….”

잠시 머뭇거리던 세스가 나와 눈을 마주했다.

“당신이 처음 나한데 달려와서 안겼을 때.”

뭐지, 엄청 의외의 대답인 것 같은데? 사실 내가 아니라 마중 나온 강아지를 좋아하는 거 아냐?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 줄 때. 날 보고 웃어 줄 때도. 하지만 그런 내 마음을 인정하기는 무서웠어."

"······.“

“내게 소중했던 사람들은 모두 날 떠났으니까. 소중하다고 인정하는 순간 당신도 잃을 것 같았어.”

나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없는 내가 조금 미웠다.

“미안해, 이비.”

“세스.”

“내가 너무 비겁했어. 용서해 줘.”

무슨 말을 해야 세스가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나는 세스의 뺨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전혀 비겁하지 않았으니까 용서해 줄게요.”

"······."

“아니면 벌이라도 줄까요?”

어딜 한번 깨물어 줄까 하고 고민하는데, 갑자기 세스가 움찔했다. 대번에 날카로워진 그의 눈이 동그랗게 말린 이불 더미로 향했다.

“세스?”

내가 그를 부르는 것과 세스가 이불을 확 들추며 공격 자세를 취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깍?

그리고 이불 속에서 납작 엎드려 있던 까마귀가 데굴데굴 눈을 굴렸다. 나와 같이 미련의 들판에서 돌아 왔는데, 대화에 방해가 될까 봐 나올 타이밍을 잡지 못 한 것 같았다.

미안, 완전히 잊고 있었어!

"까마귀?“

“앗, 그러니까……!"

까마귀에 대한 설명에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우선 이 녀석이 내 힘으로 태어났다는 것부터, 나를 따라 꿈속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녀를 만났던 이야기나, 신성 왕국의 상황까지 이야기하다 보니 한세월이 걸렸다.

사실 이야기를 하면서 제일 마음에 걸렸던 것이 바로 세스의 반응이었다. 어머니나 다름없는 성녀가 목숨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걸 들으면 크게 동요할 테니까.

“미련의 들판이라고?"

하지만 세스가 충격을 받은 부분은 다른 곳인 듯했다. 그는 내가 저승 강 앞까지 갔다가 까마귀의 도움으로 겨우 돌아왔다는 사실을 듣고 굳어졌다.

“그렇게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어요. 들판에서 금방 까마귀와 성녀님을 만났거든요.”

“이비.”

“정말이에요. 그러니까 또 당신이 소중하다고 말해서 내가 위험해졌다고 생각하진 말아요.”

처음엔 미련의 들판에 갔다는 사실을 숨길까 싶었다. 하지만 그래서야 성녀와 만난 이야기를 꺼낼 방법이 없었다.

“이비, 당신은 그때 정말 죽을 뻔했어.”

세스는 내가 무려 닷새 동안이나 기절해 있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했다. 폭발이 일어난 순간 세스가 몸으로 감싸서 외상은 없었지만, 한동안 눈을 뜨지 않아서 엄청나게 걱정을 시킨 모양이다.

그때 달려와서 몸빵을 해 준 사람이 세스였다니. 깜짝 놀란 나는 그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아니, 다치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그건 내가 할 소리야."

세스가 괴로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당신은 내게 대역이 아니야. 내게 있어 가장 소중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두 번 다시 스스로를 희생시키지 말아줘 부탁이야.”

"······다시는 안 그럴게요.”

사실 공격 반사의 마도구를 믿고 저지른 짓이었만, 기절한 뒤에 닷새나 잠들어 있었다는 말을 들으니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세스의 고백 안전핀이 뽑힌 건 내가 아이오나랑 같이 자폭하려고 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속이 따끔거리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세스는 다치지 않았어요?"

“당신에 비하면 긁힌 정도야.”

결국 다치긴 다쳤다는 말이었다. 나는 뒤늦게 후회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세스의 얼굴이 수척해진 원인 이 부상때문이 아닐까 걱정되었다.

“다친 곳 보여 주면 안 돼요?"

“이미 다 아물었어.”

내가 시무룩해하는 사이, 세스는 나를 구해 준 까마귀를 쓰다듬으며 칭찬했다.

“도와줘서 정말 고맙다.”

-깍?

세스에게 겁을 먹고 있던 까마귀는 곧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발딱 일어나서 침대 위를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뭔가를 기대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참, 이름을 지어 주기로 했었지. 잠시 고민하던 나는 즉석에서 떠오르는 이름을 말했다.

"코코, 네 이름은 코코로 하자.”

색이 까맣기도 하고 마침 코크 곰도 있으니 형제 같고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세스가 약간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우리 둘째 이름은 내가 지어 주고 싶었는데.”

“······코코는 둘째가 아니라 저 혼자 낳은 거죠.”

코코를 둘째로 들이면 족보가 꼬인다. 복실이와 까마귀 사이에 수많은 애들이 생겨 버린다고.

"둘째가 아니야?“

세스는 한층 더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나는 차마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멍하게 세스를 쳐다봤다. 까마귀가 그런 세스의 품으로 안겨 들며 애교를 떨었다. 꼭 둘째로 받아 달라고 조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달칵 문이 열리며 하얀 것이 날아 들어왔다. 바로 복실이였다.

-꾸우! 끗!

울며불며 날아 들어오는 녀석을 본 순간 나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우리 복실이의 탐스러운 머리털이, 일자로 박박 밀려 있었던 것이다.

“보, 복실아?!"

-꾸······?

그런데 복실이가 날아 들어오는 기세 그대로 갑자기 정지했다. 루비처럼 빨간 눈이 세스의 품에 폭 안겨 있는 까마귀를 보고 있었다.

-깟?

그러자 코코는 보란 듯이 세스의 품으로 파고들며 귀엽게 울었다. 순간 나는 복실이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것을 목격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