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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165화 (165/240)

165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준비는 다 되어 있습니다.”

내 표정이 너무 썩어 들어갔는지 성녀가 설명을 덧 붙였다.

“대신관은 아직 성국 전체를 장악하지 못했습니다. 중앙 교단을 제외하면 대신관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도망친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저항군올 긁어모으고, 성기사단장이 그들을 이끌고 쳐들어간다는 계획이었다. 온 나라가 열혈 산도라서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마르타 님이 위험하잖아요?"

“성전에서 승리하려면 제가 죽어야 합니다.”

성녀는 한 달 뒤에 자신이 죽도록 안배해 두었다고 했다. 뜻밖의 자살 예고에 나는 깜짝 놀랐다.

“아니, 대체 왜요?"

“제가 죽으면 왕국의 누구도 신성력을 쓸 수 없게 됩니다. 대선관도 마찬가지이지요.”

성녀는 모두가 신성력을 못 쓰면 수가 많은 저항군이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카스티야가출동하면 어떨까?

“대신관이 카스티야랑 짝짜꿍하는 사이라는 건 아시죠?"

"예?"

“벌써 십 년도 더 된 끈끈한 관계일걸요?"

성녀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대신관은 누구보다 신성 왕국의 독립성을 주장하는 사람이었는데.”

“뒤가 구리니까 더 공격적으로 나왔겠죠.”

“하지만······!"

성녀는 굉장히 억울해 보였다.

보수적인 신전 사회에서 그녀는 아스트리아와 가까이 지내자는 주장을 하다가 주변의 지지를 많이 잃은 상태였다

반면 그런 그녀를 물어뜯으며 자신의 편을 끌어 모은 대신관이 사실 카스티야의 끄나풀이었다니. 아마 뒤통수가 꽤 얼얼할 것이다.

나는 멍하게 선 그녀를 다그쳤다.

"확실하게 말해 주세요. 카스티야가 대신관을 밀어 줘도 저항군이 이길 수 있나요?"

"······."

응, 그래. 기대도 안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투덜거렸다.

“대지신께서는 카스티야 애들이 오면 개들까지 한꺼번에 없앨 생각이셨나 보네요.”

내가 보기에도 그냥 다 밀어 버리고 새로 농사짓는 게 나올 것 같긴 하다. 언제 일일이 다 방역을 하고 있어?

“그럴 수가.”

성녀는 완전히 절망에 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신은 한 달 뒤에 죽고, 저항군은 카스티야와 싸우다가 죽고, 나머지 백성들은 신의 분노로 타 죽을 예정 이니 그럴 만도했다.

하지만 전혀 동정이 들지 않는 것은 왜일까. 나는 냉담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성녀는 무척 좋은 사람으로 보였다. 아마 온화하고 다정한 성격으로 주변의 존경을 받고 있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세스가 가장 힘들 때 손을 뿌리쳤다는 사실이 나를 화나게 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성녀도, 신성 왕국도 미웠다. 특히 세스를 쫓아낸 선전 인간들은 몽땅 불에 타 죽어도 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스는 이런 인간들도 구해 주려고 하겠지.'

성녀가 한 달 뒤에 픽 죽어 버리면 가슴 아파할 테고, 신성 왕국이 화르륵 타 버리면 혼자 삽질할 것이 다. 그런 꼴을 보느니 그냥 내가 대신관을 물어 죽이고 말지.

“제가 어떻게든 해 볼게요.”

“네?"

“지금 상황을 알리고 도울 방법이 있는지 찾아볼게요. 폐하께서도 선성 왕국이 카스티야의 손에 넘어가는 건 바라지 않으실 거예요.”

아스트리아가 끼어들겠다고 눈치를 주면 카스티야도 주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때 신성 왕국 안에서 지들끼리 지지고 볶아서 결판을 내는 게 베스트다.

안 돼도 반드시 되게 해야지. 지금도 나바르에 끌려가서 갈리고 있는 세스가 또 신성 왕국으로 끌려가서 갈리는 꼴은 절대 못 본다.

“감사합니다, 사자님.”

털썩 무릎을 꿇은 성녀가 내게 머리를 숙였다.

나는 괜히 속이 꼬이는 것을 느끼며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노력하겠지만 아무것도 안 될 수도 있어요. 마르타 님을 구하지 못 할 수도 있고요.”

"왕국의 백성들을 위해 힘써 주신다는 것만으로도 감사드려야 마땅합니다.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나는 계속 감시를 표하는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세스에게 뭔가 남기고 싶은 말은 없으세요?"

"······."

“유언이 될 수도 있잖아요. 말씀하시면 전해 드릴게요."

약간의 심술이 섞인 말이었다. 멍한 표정으로 나를 보던 성녀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제 와서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요?"

죽기 전에 사과라도 할 줄 알았는데 , 내가 너무 큰 기대를 했던 모양이다.

“세스를 신전에서 쫓아낸 거요. 한 번도 후회하지 않으셨어요?“

세스는 형의 축음으로 신전에서 나온 게 아니었다. 사검의 선택을 받았다는 이유로 신전에서 쫓겨난 것이었다.

나는 주크를 만난 뒤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진작 알았으면 신전에 갔을 때 불이라도 질렀을 텐데.

“후회합니다. 하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제 결정은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와, 소나무세요?"

내 감탄에 성녀는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눈을 감았다.

"알고 있습니다. 매정한 짓이지요.”

"알면서 대체 왜 그러셨어요?"

“전 속세로 돌아가는 게 세스에게 더 나온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요?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해서요?"

”……신전에는 그 아이가 있을 자리가 없었으니까요.”

대지신의 신도인 세스가 천공신의 신기에게 선택을 받은 것이 문제였다. 신앙심을 의심받기 딱 좋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하필 세스는 성기사단장 후보이기까지 했다. 뛰어난 능력만큼 그를 질투하고 찍어 내리려는 자들도 많았다.

성녀는 속세로 돌아가서 공작이 되는 것이 차라리 세스에게 더 좋을 거라 판단했다.

“사검의 선택을 받은 그 아이가 언제 죽게 될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저는 속세에서 즐거움을 누리며 사는 것이 조금이라도 보상이 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성녀가 보기에 신전은 세스를 감싸 줄 둥지가 아니었다. 남은 시간을 의심과 질책에 시달리며 사느니, 외부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안식을 찾길 바랐다.

들어 보면 참으로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내가 세스를 몰랐다면, 그를 지켜보지 않았다면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세스가 공작이 되고 싶다고 했나요? 아니면 부귀영회를 탐내고 좋아하는 성격인가요?"

"······아닙니다.”

“그럼 아실 텐데요. 세스는 미움받고 의심받더라도 가족과 함께 있길 바랐을 거라는 사실을요.”

적어도 성녀만큼은 자신의 편이 되어 주길,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 주길 기대했을 것이다.

“세스를 위해서 성국 전체와 맞서 싸우지 않더라도, 그냥 너를 믿는다는 한마디만 해 줬어도 됐을 거라고요.”

"······."

“그렇게 쫓아내면 안 되는 거였어요.”

성녀가 감싸도 세스는 신전을 나왔을 것이다. 그에겐 복수를 하겠다는 목적이 있었으니까. 소중한 가족을 복수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그런 세스를 팽개쳐 버린 성녀가 나는 여전히 밉고 원망스러웠다. 이기적이고 유치하다고 해도 좋다. 나는 무조건 세스 편이니까.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던 성녀가 괴로운 듯이 말했다.

“사자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좋다고 생각하는 길을 강요해서 그 아이에게 주지 않아도 될 상처를 입혔지요. 알면서도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싫었습니다.”

"······.“

"남은 기회가 있어 세스를 만나게 된다면, 제 잘못을 말하고 용서를 빌겠습니다.”

지나치게 깔끔한 인정 때문일까. 이상하게 속이 불편해졌다. 성녀가 세스에게 용서를 빌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오히려 상처를 후벼파면 모를까.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만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성녀와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거다.

“마음이 변했어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신관을 해 치우고 세스와 만나게 해 드릴게요.”

내 선언에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던 성녀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뇨, 감사할 필요 없어요. 제가 성국을 도우려는 건 대지신 때문이니까.”

지금껏 계속 세스의 옆에 있어 준 것은 대지신 뿐이었다. 신전을 떠난 세스가 여전히 강력한 신성력을 갖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딱 이번 한 번만큼만 대지신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 대신관과 싸우려는 거예요.”

이번 일을 기회 삼아서 세스를 호구 잡지 말라고 경고하려는데, 갑자기 땅이 우르릉 진동했다. 깜짝 놀라 두리번거리는 내 등을 거대한 바위 같은 것이 툭 쳤다. 성녀가 재빨리 나를 붙잡아 주지 않았다면 나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을 것이다.

"뭐, 뭐죠?"

성녀는 이걸 대체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속삭였다.

“신께서 방금 사자님을 향해…… 귀여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헉!”

방금 그게 대지신의 손가락 끝이나 발가락 끝이나 뭐 그런 거였나?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본 다음 성녀에게 물었다.

“지금 절 보고 계신 거예요?"

"예, 항상 보고 계십니다."

”······우와!"

채집통에 들어간 개미가 된 기분이었다. 내가 표정 관리를 못하자 성녀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곳이 명부에 가까워서 신께서 접촉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이 작용하는 모양입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어?"

그러고 보니 뻐근한 다리나 몸을 짓누르던 피로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신님의 발 마사지가 아주 끝내줬다.

내가 선기해하자 성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자님은 아무런 제약 없이 힘을 구현하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하지만 힘을 조절하지 못해 육체에 무리가 가고 있으니 조심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대지신께서요?”

“예.”

신이 그렇다면 조심해야지, 뭐.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복실이가 알에서 태어난 순간부터 함께 기른 정이 있는데, 뒤늦게 찾아온 자들이 소유권을 주장 하는 것은 아주 불쾌하다고 하십니다.”

복실이는 태어나자마자 세스의 신성력이 섞인 성수를 먹었다. 따지고 보면 대지신의 세례를 받은 거나 마찬가지인데, 세계수 쪽과 친하게 어울리는 게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깨어나자마자 복실이에게 할머니가 누군지 똑똑히 교육시키겠습니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땅이 우르릉 흔들렸다. 마치 대지신께서 크게 웃는 것 같았다.

흔들림이 너무 심해서 바닥으로 픽 꼬꾸라지는 순간, 눈이 번쩍 떠졌다. 나는 어느새 익숙한 내 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어휴, 영영 못 돌아오는 줄 알았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한쪽 손이 살짝 당겨졌다. 옆을 보자 세스가 놀란 토끼 눈이 되어 나를 보고 있었다.

······응? 세스가 왜 여기 있지?

세스는 지금 나바르에 있을 텐데, 여전히 꿈속인가?

혼란스러워하는 내 이마에 세스의 입술이 닿았다. 몇 번이고 부드럽게 입을 맞춘 세스가 알딸딸해진 내게 속삭였다.

"돌아와 줘서 고마워.”

"······."

"좋아해, 이비. 정말로. 당신이 좋아."

아, 진짜 꿈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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