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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164화 (164/240)

164화

* * *

-까아악!

멍하게 걷고 있던 나는 난데없는 까마귀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까막몬?“

내 앞을 왔다 갔다 하며 날개를 퍼덕이던 까마귀가 힘없이 추락했다. 깜짝 놀란 나는 녀석을 받아 들었다.

“괜찮아?”

축 늘어진 까마귀가 내 손에 머리를 비렸다. 자세히 보니 녀석은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아니, 어쩌다 이렇게 다쳤어?"

당황한 나는 도움을 청하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하지만주변이 새카매서 아무것도보이지 않았다.

“여기는 또 어디지?"

-깟!

무심코 앞으로 향하는 나를 까마귀가 막았다. 필사적으로 날개를 퍼덕이는 모습이 꼭 저쪽으로 가면 안 된다고 말리는 것 같았다.

“그럼 반대쪽은 괜찮아?"

별 생각 없이 왔던 길로 되돌아가려던 나는 발바닥을 찌르는 느낌 에 깜짝 놀랐다. 바닥에 뾰족한 것들이 잔뜩 박혀 있었다.

손으로 더듬어 보자 내가 걸어가던 방향은 평평한 길이었고, 반대쪽은 가시밭길이었다.

“노빠꾸를 강요하는 길이라니,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는 것만큼은 알겠다.”

-깍!

내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안 까막몬이 여기까지 말리러 온 모양이다. 나는 고마움을 담아 녀석을 마구 쓰다듬어 주었다.

"좋아, 그럼 돌아가 볼까?"

나는 선발도 없이 얇은 원피스 하나만 달랑 입은 채였다. 온갖 무기로 가독 차 있던 주머니도 텅텅 비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원피스 끝을 쭉쭉 찢어 내어 새끼처럼 꼰 다음에 발에 둘둘 감아서 신발로 삼았다.

“자, 출발!"

나는 까마귀를 품에 안은 채로 가시밭길을 걸었다. 발이 따끔따끔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힘들면 노래를 흥얼거리고, 잠시 멈춰서 쉬기도 하며 걷고 또 걸었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목적지가 나오지 않았다.

다리가 너무 아파서 더 이상 못 걷겠다 싶을 때 쯤 멀리서 빛이 반짝거렸다. 마치 이쪽으로 오라고 유혹하는 것 같았다.

“저건 뭐지?"

-갓?

까마귀도 잘 모르는 것 같아서 조심스럽게 다가가 보았다. 반짝이던 빛은 가까이 갈수록 줄어들어 따뜻한 모닥불로 변했다.

그 앞에 하얀 옷을 입은 중년 여자가 앉아 있었다.

한 오십 정도 되었을까. 둥근 얼굴에 단정하게 틀어 올린 갈색 머 리가 무척 온화해 보였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얼굴에 성격이 드러난다는데, 이분은 신용 1 등급으로 보였다. 그만큼 아주 곱고 점잖게 나이가든 사람이었다.

“아, 오셨군요.”

나를 발견한 여자가 반가운 기색으로 몸을 일으켰다. 나는 경계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누구세요?”

“저는 대지의 신을 따르는 첫 번째 종, 마르타라고 합니다. 산의 말씀에 따라 사자님께서 오시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라, 대지의 신을 따르는 첫 번째 종이면…….

“성녀님?"

"저는 신의 종일뿐입니다. 선의 사자께 감히 성녀라고 불릴 사람이 못 됩니다.”

아니, 신성 왕국의 성녀가 왜 여기 있어?

당황하는 나를 보고 성녀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눈치 채셨겠지만 이곳은 이승과 저승 사이에 있는 미련의 들판입니다. 망자가 저승의 강을 건너기 전에 미련을 내려놓는 장소지요.”

“그럼 전 이미 죽은 건가요?"

“아직은 아닙니다.”

당황스러웠지 한 금세 납득이 됐다. 현실이라기엔 뭔가 좀 이상한 장소였으니까. 제일 마지막 기억이 아이오나가 화려하게 폭발하는 거였고.

"돌아가고 싶으시다면 제가 돕겠습니다.”

"돌아가요?”

나는 멍하게 눈을 깜박였다.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과 굳이 그럴 필요가 있냐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깜짝 놀란 나는 내 뺨을 찰싹 때렸다. 당연히 돌아가야지 무슨 소리야.

"들판을 너무 오래 헤매신 것 같습니다. 그래도 강까지 가지 않으셔서 다행입니다.”

-까악!

까마귀가 제 덕이라는 것처럼 작게 울었다. 성녀가 웃으면서 녀석을 칭찬했다.

“아주 영리한 녀석입니다.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주인을 위해 목숨을 걸었으니까요."

나는 뜻밖이라고 생각하며 까마귀를 바라봤다. 이 까마귀는 아이오나가 쏘아 낸 저주를 내 힘으로 쳐 내면서 생겨난 존재였다. 그 후에 내 힘을 더 불어 넣기는 했지만, 저승까지 따라올 정도로 나한테 충성 올 다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

저주에 내 힘을 불어넣어서 만든 것들은 다른 사람은 공격해도 나를 해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가 공격하면 억울해하거나 슬픈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이 녀석들은 나를 부모나 주인으로 생각하나?'

갑자기 미안해진 나는 까마귀를 꼭 끌어안았다. 까막몬 말고 좀 더 좋은 이름을 붙여 줘야할 것 같았다.

“저, 이 녀석의 치료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 때문에 많이 다쳤어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성녀가 까마귀를 받아 안았다. 그녀의 손에서 흘러나온 온화한 빛이 까마귀의 상처를 아물게 했다.

"많이 지쳐 보이십니다. 우선 의자에 앉아서 좀 쉬시지요. 그다음에 길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사양하지 않고 의자에 털썩 앉았다. 더 이상 서 있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픈 다리를 쭉 뻗고 쉬는 사이, 성녀가 음식을 잔뜩 담은 쟁반을 가져왔다.

“많이 드시고 기력을 채우십시오.”

”와, 잘 먹겠습니다.”

나는 얼른 쟁반을 받았다. 둥글고 납작한 빵과 수프, 구운 고기와 과일이 담겨 있었다. 잔에 가득 담긴 것은 과일주스인 것 같았다.

그동안 배가 고팠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허겁지겁 음식을 먹었다. 고기를 작게 떼어 내서 까마귀에게도 주려고 했지만, 녀석은 먹지 않겠다고 도리질을 쳤다.

“거기 담긴 것은 사자님을 걱정하는 사람들의 한숨과 눈물입니다. 다른 자는 입에 댈 수가 없지요.”

성녀의 말에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졌다. 나는 먹던 빵을 내려놓았다.

“지금 당장 돌아가야겠어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나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잔에 담긴 주스만큼 세스가 울고 있을 것 같아서 더 이상 태평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우선 발부터 치료하겠습니다. 그리고 신발을 내드릴 테니 그걸 신고 가시지요.”

괜찮다고 사양하려다 치료한 발로 빨리 걷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대야에 깨끗한 물을 가득 담아 온 성녀가 내 발을 정성껏 씻겨 주었다. 놀라서 사양했지만 성녀는 자신의 의무라며 멈추지 않았다. 나는 민망한 얼굴로 엉덩이를 들썩였다.

기나긴 시간이 끝난 후에 나는 치료가 끝난 멀쩡한 발로 다시 길을 나섰다. 성녀가 작은 등불을 들고 앞장을 섰다.

“저, 성녀님."

“그냥 마르타라고 불러 주십시오.”

“마르타 님은 왜 여기 계세요? 아무리 신의 말씀에 따른다고 해도 멀쩡한 사람은 올 수 없는 곳이잖아요?"

"······.“

성녀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나는 불길한 예감이 맞아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신성 왕국에 무슨 일이 있는 거죠?"

“별것 아닙니다. 반란이 일어나서 제가 여기 올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반란이요?"

……엄청나게 별일인 것 같은데.

"혹시 대신관이 반란을 일으켰나요?"

"역시 사자님께서는 예상하셨군요. 저는 대지신께서 말씀해 주시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냥 아이오나가 펄떡거리면 대신관도 따라 펄떡거릴 것 같아서 물어본 것뿐이었는데.

“그런데 신께서 말씀해 주셨다면 미리 대비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요?"

왜 통수를 맞았냐는 물음에 성녀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신께서는 신성 왕국에 진정한 신앙을 가진 이들만 남겨 두기로 하신 것 같습니다.”

"······아."

솎아 내기 들어가나요. 신이 보기에도 대신관과 그의 무리들이 심각한 불량 종자였던 것 같았다. 오히려 그동안 가만히 내버려 둔 것이 더 이상한 거였다.

‘원래 농사짓는 사람이 제일 무서운 법인데.'

농사는 피와 폭력으로 얼룩진 세계다. 밭을 덮치는 수없는 벌레와 짐승들을 살육하며, 싹수가 보이지 않는 종자들은 미리미리 제거하는 완벽한 서바이벌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지신은 이 분야의 프로일 텐데, 감히 불량 종지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니 그 끝이 어떨지가 뻔히 보였다.

‘그럼 대신관 쪽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

이게 바로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었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성녀가 우물쭈물 말을 이었다.

“신께서는 진정한 신앙을 가진 자들과 그렇지 않은 지들이 성전을 벌이게 하고, 그릇된 자들이 승리하면 신성 왕국 전체를 정화할 계획이셨습니다."

“정화요?"

“아마 대홍수나 대지진일 겁니다.”

……허허, 고전적이네. 망조가 든 나리를 한꺼번에 쓸어버리려는 건가?

“하지만 저는 죄 없는 이들이 희생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전이 일어나기 전에 저를 따르는 자들을 모두 대피시켰습니다.”

성녀의 말에 따르면 반란을 일으킨 대신관의 세력이 더 강했던 모양이다.

맞서 싸우면 반드시 지는 상황이라 성녀는 급히 자선을 따르는 이들을 외부로 빼돌렸다. 그래서 성전이 미뤄졌고, 그와 동시에 대홍수 또는 대지진 역시 예약 대기가 된 상황인 것 같았다.

“아니, 어쩌시려고요?"

“신벌을 받는 것은 각오했습니다. 이 몸이 천 번 죽어서 다른 이들을 살릴 수만 있다면 기꺼이 죽을 것입니다."

성녀가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결국 현실의 성녀는 인사불성 상태이고, 성녀를 따르는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진 상황이라는 것을 들은 나는 한숨을 쉬었다.

에라이, 그럼 그렇지. 손 안 대고 코를 풀기는. 그렇게 일이 쉽게 풀릴 리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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