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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163화 (163/240)

163화

* * *

거센 폭발에 사방이 크게 흔들렸다.

나무들이 이리저리 휘어지고, 흙먼지와 돌멩이가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다시 한 번 땅이 우르릉 진동한 뒤에야 겨우 폭발의 여운이 가라앉았다.

잠시 후, 흙먼지 속에서 기시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비틀거리면서도 필사적으로 달리고 있었다.

“마님!"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바닥에 움푹 팬 거대한 구덩이뿐이었다. 그 외에 는 어떤 흔적도 없었다. 주변이 깔끔하게 날아가 버린 것이다.

“아, 안 돼!"

다리가 풀린 기사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몇몇은 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어 바닥을 헤집기도 했다.

”으아악!"

울부짖는 소리를 낸 기사가 주먹으로 땅을 내리쳤다. 다른 사람들도 그와 비슷한 심정이었다.

적들의 숫자는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대로 죽는구나 하고 절망할 때 이블린이 용감하게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속임수를 쓰고, 독을 던져 가며 필사적으로 적과 맞서 싸웠다. 그리고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만나자 기꺼이 자산을 희생했다.

누구보다 기사 같고 영웅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영웅의 발목을 잡는 짐일 뿐이었다.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줄 테니까 조금만 참아요.”

그때,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절대 안 된다고 외쳤을 것이다. 살아야 할 사람은 그들이 아닌 이블린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블린은 아무렇지도 않게 희생해서 그들을 살렸다. 그 사실에 기사들은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어째서! 어째서!“

“그만, 멍청한 짓 하지 말고 어서 일어서.”

울부짖는 기사들의 귀에 냉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기사들은 원망이 담긴 눈으로 제스터를 바라봤다.

“다, 당선……!”

이 남자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 조금만 더 빨리 마님을 데리고 탈출했더라면. 이기적이라는 것은 알지만,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드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런 일로 죽을 사람이 아니야. 바보처럼 굴지 말고 주변부터 수색해.”

제스터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든 기서들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근처를 살살이 뒤진 끝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블린을 찾아냈다.

”전하!”

“마님!"

정확히는 피투성이가 된 세스와 그의 품에서 잠든 것처럼 눈을 감고 있는 이블린을.

서둘러 달려간 기시들은· 두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이블린의 발치에 입 맞추며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했다. 그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한 주인에겐 그보다 더한 것도 바칠 수 있었다.

-까악!

그때, 마지막까지 이블린의 옆을 지키던 까마귀가 빛으로 변해 그녀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하지만 아무도 녀석이 사라진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 * *

프리지어 궁엔 비상이 걸렸다.

궁으로 돌아온 이블린이 계속 눈을 뜨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 곧바로 정신을 차린 세스는 임무도 때려치우고 이블린의 옆에 붙어 있었다.

집요한 그의 시선 속에서 이블린을 진찰한 켄트 박사는 난감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저 주무시고 있는 것뿐입니다. 깨어나지 못하시는 이유는 지금으로선 알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너무 많은 힘을 한꺼번에 소진해서 탈진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마탑의 결계를 깨트린 직후에 대마법사 인 라이언 아이오나를 격퇴했으니까요.”

백탑주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덧붙였다.

하나만 해내도 전설이라고 칭송받을 일을 이블린은 연속으로 해치웠다. 백탑주 역시 아이오나가 폭발한 현장을 직접 확인하지 않았다면 사실을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대책은?"

세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백탑주와 마주 본 켄트 박사는 한숨을 쉬었다.

"몸을 보하는 약을 지어 드리는 것 말고는 뾰족한 대책이 없습니다. 차라리 신전의 도움을 구하는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아뇨. 이곳에는 정령수가 있습니다. 정령수의 힘이 작용하고 있는데도 변화가 없다면, 인간의 신전에 가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을 겁니다.”

결국 손쓸 방법 이 없다는 뜻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씁쓸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고개를 끄덕인 세스가 그만 나가 보라고 손짓했다.

하지만 박사는 선뜻 발을 떼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전하께서도 치료를 받으셔야 합니다. 포션과 성수로는 몸을 완전히 회복시킬 수 없습니다!"

세스의 신성력은 모종의 이유로 사라진 뒤였다. 그래서 전처럼 상처를 입어도 바로 회복되지 않았다.

지금은 포션과 성수를 퍼부어 겉만 아물게 한 상태였다.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었다. 만약 이블린에게 있던 공격 반사의 마도구가 작동하지 않았다면, 둘 다 목숨을 장담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중에 하지.”

박사의 당부에도 세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라도 눈을 떼면 큰일 나는 사람처럼 이블린만 보고 있었다.

더 이상 강요할 수 없었던 박사는 어쩔 수 없이 백탑주와 함께 물러났다.

세스는 조심스럽게 이블린의 손을 잡았다. 장갑을 통해서 따스한 그녀의 체온이 느껴졌다. 가끔은 약하게 움찔거리기도 해서 그저 잠을 자고 있을 뿐이라는 켄트 박사의 말이 떠올랐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들어 손끝에 입을 맞춘 세스가 속삭였다.

”……내가 당신을 탓할 자격이 없다는 것은 알아.”

기사들로부터 이블린의 행동을 전해 들었을 때, 그는 심장이 찢기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대역이니까 자신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이렇게 희생해도 된다고.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아서.

‘그녀가 그리 생각하게 만든 것은 결국 나니까.’

세스는 인생이라는 저울의 한쪽에 복수를, 다른 한 쪽에 목숨을 걸었다.

그 외의 뭔가를 가지는 건 사치라고 생각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처지면서 누군가와 따뜻한 감정을 나누겠다는 것은 욕심이니까.

하지만 그는 제 인생으로 굴러들어온 이블린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대역이라는 비겁한 변명으로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다.

아주 조금은 이 따스함을 누려도 된다고. 아주 잠깐만 그녀를 옆에 두겠다고.

그게 아니면 이블린을 붙잡을 자격조차 없었으니까. 그녀를 동생과 멀리 보내 주는 것이, 그녀를 위한 길이 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세스가 그렇게 거짓말을 하는 동안 이블린은 그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진짜가 아니니까, 대역이니까 얼마든지 자신을 희생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과거가 쏘아 올린 화살이 지금 그의 가슴을 찌르고 있었다.

“당신은 대역 같은 게 아니야. 누구보다 내게 소중해. 그러니 제발.”

하지만 아무리 애원하듯 속삭여도 눈을 감은 그녀는 반응이 없었다.

"돌아와, 이비.”

세스는 이대로 그녀가 떠나 버릴까 봐 두려웠다.

이제 자신은 대역으로서의 일을 마쳤다고. 모든 은혜를 갚았다며 훨훨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세스는 강박적으로 이블린의 체온과 숨결을 확인했다. 그것만이 지금 그가 매달릴 수 있는 전부였다.

* * *

이블린의 방문 앞에는 한 무리의 작은 형체가 모여 있었다. 가장 앞에 웅크린 것은 이번 사태의 원흉인 복실이였다.

까미와 흑룡이에게 붙잡혀서 털이 몽땅 벗겨질 정도로 혼이 난 복실이는 이블린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접근 금지형을 받았다.

이번 일 때문에 세스에게 밉보일까봐 걱정이 된 까미가 특단의 조치를 내린 것이다.

평소라면 떼라도 썼을 텐데, 엄마가 쓰러져서 눈을 뜨지 못하는 상황이 무서웠던 복실이는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결국 이블린의 방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방문에 붙어서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바닥에 작은 웅덩이가 생길 정도였다.

-띠리링······.

함께 가출을 한 주크와 성냥도 기가 죽기는 마찬가지였다. 잔뜩 구부러져서 물음표가 되기 직전인 녀석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말라크가 획 몸을 돌렸다.

‘엉망진창이군.’

수인족의 혼혈인 말라크는 프리지어 궁을 잠식하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리핀들이 분노해 으르렁거리는 소리, 뱀들이 한숨을 내쉬는 소리, 사람들이 초조해하며 걸어 다니는 소리가 그의 귀를 긁어 대고 있었다.

고작 한 사람이 눈을 뜨지 못할 뿐인데, 모두가 비탄에 젖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마치 왕이 병상에 누운 것 같은 분위기였다.

‘천한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조금 우스운 이야기지만, 말라크는 이블린에게 약간의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뛰어난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귀족들이 멸시하는 천한 출산의 공작 부인 자선과 너무 비슷하지 않는가.

세스에게 굳이 이블린을 보게 해 달라고 우긴 것도, 그녀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군.'

이블린은 이 넓은 궁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 같았다. 무슨 수단을 썼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왠지 모를 허탈감과 패배감에 젖은 크는 휘적휘적 회랑을 가로질렀다. 그러다 다른 사람과는 조금 다른 움직임을 보이는 검은 머리의 중년 남자를 발견했다.

그는 뭔가를 망설이듯 몇 걸음을 옮기다가 다시 멈추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꼭 가고 싶은데 무슨 이유가 있어 가지 못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한숨을 푹푹 쉬며 무어라 구시렁대던 중년 남자는 말라크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거기! 이쪽으로 와 보게!"

"······."

이건 또 뭔가 싶어서 잠시 고민하던 말라크는 순순히 그에게 다가갔다. 중년 남자의 모습이 공작과 제법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딱 봐도 가족이나 친척인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내가 궁금해서 물어보는 게 아니라 오다가다 들었는데, 누가 좀 아픈 것 같던데.”

"공작 부인 말입니까?"

“그, 그렇지. 흠흠, 그러니까 젊은 것이 어디가 아프기에 이렇게 난리인가 싶어서. 딱히 걱정이 돼서 그런 건 아니고!"

말라크가 할 말은 아니지만 엄청나게 꼬인 사람인 것 같았다. 누가 봐도 걱정이 되어서 여기까지 왔는데 들어가자니 자존심이 상하고, 그렇다고 돌아갈 순 없어서 망설이던 순간에 말라크가 나타난 것이다.

말라크가 잠시 침목하자 남자는 제멋대로 떠들기 시작했다.

"흥, 별것 아닌 모양이군. 그럴 줄 알았네. 얼마나 시건방지고 팔팔한 녀석인데 병 따위에 걸리겠나. 하도 독해서 병도 안 달라붙을 거야!"

"쓰러져서 못 깨어나고 있다더군요.”

말라크가 툭 던지듯 내뱉자 남자의 눈이 부릅떠졌다.

“모, 못 깨어나다니? 뭐 때문에 못 깨어난단 말인가?"

"뭐라더라 마탑을 깨부수고 아이오나라는 대마법사랑 싸웠다던데요. 그것 때문에 힘을 다 써 버린 모양입니다.“

”……아이오나? 백마법사 아이오나 말인가?"

남자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그것이 묘하게 즐거웠던 말라크가 좀 더 성의 있게 떠들었다.

"예, 아주 나쁜 놈이라더군요. 원래 백마법사였는데 흑마법사로 갈아탔다던가. 공작 부인도 그 마법에 당해 영영 못 깨어나고 죽을 수도 있나봅니다.”

“……허, 헉! 억!"

갑자기 심장을 부여잡은 남자가 픽 하고 쓰러졌다.

조금 골려 주고 싶었을 뿐, 이렇게까지 타격을 줄 생각은 아니었던 말라크는 크게 당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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