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막아 내야 해!'
주먹을 불끈 쥐고 앞으로 나서려는 나를 제스터가 덜렁 안아 올렸다. 그는 뒤쪽의 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알아서 피해!"
제스터가 옆으로 몸을 날리 자, 기사들도 구르듯이 바람을 피했다. 그러자 바람이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제스터의 뒤를 쫓아왔다.
홱 몸을 돌린 제스터가 수직으로 검을 휘둘렀다. 순간 파팍 하고 허공에서 불꽃이 튀었다.
“제법이군. 그러나 재주 있는 이를 죽이는 것도 즐거운 여흥이지.”
노래하듯 흥얼거린 아이오나가 연달아 지팡이를 콩 콩 내리찍었다. 그와 함께 아까의 바람이 몇 개나 다시 생겨서 뒤를 쫓아왔다.
나는 저놈의 손목을 분질러 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소리쳤다.
“선배님, 절 내려 주세요!”
“당신은 적과 맞서 싸우는 게 아니라 보호를 받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건 진짜 공작 부인이나 그렇고, 나는 아니라고!
나와 이야기하는 도중에도 제스터는 현란한 동작으로 마법을 피했다. 반면 기시들·은 바람에 쫓기느라 정 신이 없어 보였다.
"빨리요! 이러다가 기사들이 다 죽겠어요!"
“그럼 죽으라고 하십시오. 그게 그들의 의무니까.”
냉담한 제스터의 대답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대역인 나 때문에 죽는다면 그건 개죽음이나 다름없었다. 내게는 기사들을 무사히 공작가로 돌려보낼 책임이 있었다.
"명령입니다! 어서 날 내려놔요!"
“전 공작 부인의 명령을 들을 이유가 없습니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제스터의 어깨를 덥석 물었다.
하지만 제스터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어서 마님을 데리고 가 주십시오!"
우리가 실랑이를 하는 사이, 기시들은· 아이오나를 포위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씩 웃은 그들이 일제히 아이오나에게 달려들었다.
“안 돼!”
항마력 장비를 따로 갖추긴 했지만 전대 탑주와 맞짱을 뜰 정도는 아니었다. 그들은 내가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 목숨을 내던진 거였다.
"잘도 노는구나.”
하지만 고들의 희생은 아이오나의 손짓 한 번에 헛된 발버둥이 되었다.
아이오나의 지팡이가 바닥을 내리찍는 순간, 기사들이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제자리에 멈춰 섰다.
나를 안고 도망치던 제스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지하고 멍청한 것들! 너희의 알량한 검 따위로 감히 마법을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느냐?"
바닥에 검은 마법진이 물결치듯 퍼져 나갔다.
나는 아이오나가 선풍기처럼 바람이나 날려 댄 것이 이걸 펼치기 위해서였다는 걸 깨달았다.
"진리의 힘을 우습게 보는 놈들, 너희의 목숨으로 이 땅을 저주해 주마. 천 년 동안 아무것도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어 주겠다.“
“이 미친 영감탱이가 왜 남의 땅을 저주하고 난리야?”
"······!"
내 투덜거림에 아이오나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이해가되지 않는다는 듯 나를 멍하니 쳐다봤다.
“어떻게 움직이는 거지?"
“아, 움직일 만해서 움직여요. 안 붙잡힌 걸 어쩌란 말이에요?"
나는 낑낑거리며 제스터의 팔에서 몸을 빼냈다. 하도 꽉 끌어안고 있어서 겉옷을 벗고 쏙 빠져나와야 했다.
부르르 몸을 털어 엉망이 된 머리를 정리한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의 아이오나에게 씩 웃어 주었다.
“영감, 죽을 각오는 됐겠지?"
“······마법이 통하지 않는 건지, 아니면 마력의 구속만 무시하는 건지 시험해 봐야겠구나.”
"웃기지 마라! 이번엔 나의 턴이다!"
누가 그랬다 미친놈을 이기고 싶으면 더 미치면 되고, 중2병을 이기고 싶으면 더한 중2병이 되면 된다고. 나는 지금 흑염룡의 화신이다.
“흩날려라, 정령수!"
나는 주머니에서 정령수의 이파리를 한 줌 꺼내 촤악 뿌렸다. 바람에 흩날리던 이파리들이 아이오나의 마법진에 철썩철썩 달라붙었다.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움직이던 마법이 삐걱거리다가 정지했다. 허공에 대고 바쁘게 손을 움직이던 아이오나 역시 이파리들에게 덜커덕 붙잡히고 말았다.
”와, 이게 되네.”
정령력과 마법이 상극이라는 말이 떠올라서 시도해 봤는데 생각보다 더 효과가 좋았다.
나는 얼음 동상처럼 서 있는 사람들을 둘러봤다. 마치 술래잡기를 하다가 멈춰 선 것 같았다. 마법을 정지시키면 바로 풀려날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다.
나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뚜벅뚜벅 아이오나에게 걸어갔다. 내게서 위협을 느꼈는지 입술을 움찔거리던 아이오나가 음침한 목소리를 토해 냈다.
“이대로 나를 죽이면 내 마법이 폭주하여 일대를 모두 날려 버릴 것이다.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주 잠깐 나를 묶어 두는 것뿐이야.”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정령수의 이파리 하나가 화르르 불타올랐다. 아이오냐의 목소리에 비웃음이 어렸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못 가겠구나. 네 하찮은 힘에 마음껏 절망해라.”
“응, 리필.”
나는 정령수의 이파리 한 줌을 더 꺼내 부렸다. 그러자 부르르 입술을 떤 아이오나가 눈을 감고 뭐라고 입술을 달싹이기 시작했다.
“이놈의 영감탱이가 어디서 염불이야?"
나는 그의 뺨을 찰싹 때렸다. 눈을 부릅뜬 아이오나가 나를 노려봤다. 하지만 나는 아버님 덕에 이미 노인 공격에 도가 튼 몸이라 아무렇지도 않게 연타를 날렸다.
"늙어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찰싹!
“쮠리의 히믈~ 우쭙게 보지 마콰아~!"
찰싹!
“이따위 대사나 하고!"
찰싹!
“그만, 그만둬!"
연달아 뺨을 맞은 아이오나의 얼굴이 데친 문어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쯧쯧 혀를 찬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까막몬! 어디 있어?"
-까아악!
근처에 숨어 있던 까마귀가 허둥지둥 날아왔다. 아이오나가 본격적으로 마법을 쓰자 무서워서 도망친 모양이었다.
나는 하찮은 까마귀를 마구 쓰다듬어 준 다음 아이오나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한마디라도 중얼거리면 바로 눈을 쪼아 버려. 알겠지?"
-깍!
나는 까막몬에게 아이오나를 맡겨 두고 일을 하러 갔다. 바로 얼음땡이 되어 있는 기사들을 안전한 장소로 옮기는 거였다.
“마도구가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나는 근력을 보조해 주는 마도구들을 풀로 켜 놓고 기사들을 하나하나 옮기기 시작했다.
그래 봤자 내 힘이 천하장사가 아니었으므로 바닥에 눕혀서 이리저리 굴려야 했다. 깨어나면 제법 아플 것 같아서 연신 사과했다.
“미안해요. 그래도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줄 데니까 조금만 참아요.”
가끔은 진심 어린 충고도 건넸다.
“열심히 하는 모습 보기 좋습니다. 그래도 월급 받는 만큼만 일하세요. 집에서 기다리는 가족들이 있잖아요?"
기사들은 뭔가를 말하고 싶은 듯 열심히 눈동자를 움직였지만,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을 모두 바위 뒤나 안전해 보이는 곳에 숨겨 둔 다음엔 제스터의 차례였다. 나는 왠지 전보다 눈가가 구겨 진 것 같은 제스터를 보고 하하 웃었다.
“어깨 깨물어서 미안해요. 그리고 항상 맛있는 거 만들어 줘서 고마워요.”
"······."
제스터는 가만히 나를 바라봤다. 왠지 나를 질책하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 척하며 그를 마지막 은신처로 옮겼다.
“아이고, 삭신이야.”
무거운 것을 연달아 옮겼더니 내일은 확실히 몸살이 날 것 같았다. 마도구의 도움을 받아도 이 정도인데,
없었으면 꼼짝도 못 할 뻔했다.
"까막몬. 이제 네 차례야.”
아이오나를 감시하던 까마귀가 후다닥 날아왔다. 나는 녀석을 마구 쓰다듬어 준 다음 하늘 높이 던져 주었다.
“멀리 도망쳐 재수 없으면 폭발에 휘말릴 수도 있으니까."
-까아악!
뭔가가 마음에 안 드는지 내 머리 위를 맴돌던 까막몬이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멀리 날아갔다.
그런 나를 지켜보던 아이오나가 물었다.
“대체 뭘 하려는 거냐?"
“내가 뭐 할 것 같아?"
나는 아직 남아 있던 정령수의 이파리를 사방에 골고루 뿌렸다. 아이오나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초면에 미안하지만 영감을 살려 둘 수는 없어. 그건 참 미안하게 생각해.”
“나한테 무슨 짓을 하면 너 역시 죽을 거다!"
“응, 알아. 근데 이대로 있다가 영감이 풀려나면 결과는 같잖아?"
나도 죽고 제스터와 기사들도 죽고, 아이오나만 살아남아서 세스를 공격하는 것보다는 이게 더 나올 거다.
“나는 참 계산을 잘하거든. 뭐가 이득인지 잘 알지.”
싱긋 웃은 나는 몸을 굽혀 바닥의 마법진을 짚었다. 그리고 정령수의 이파리를 매개체로 삼아서 내 힘을 불어넣었다.
사방으로 뻗어 나가다가 강제로 멈춰진 마력이 일순 내 지배하에 들어왔다.
내가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깨달은 아이오나가 발악했다.
“그만둬! 다 함께 죽자는 거냐!"
“이제 집으로 돌아가렴.”
나는 마력을 독특 두드리며 말했다.
잠시 움찔거리던 마력이 이내 되감기를 하듯.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집으로, 자신들을 불러낸 아이오나의 몸속으로.
”으아아아악!”
자식들의 불꽃 효도에 아이오나가 거센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하얗게 뭔가가 폭발했다.
나는 서둘러 자세를 낮췄지만 몸이 붕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때, 뭔가가 후다닥 날아와서 내 얼굴을 들이박았다. 손으로 더듬자 부들부들한 깃털이 느껴졌다.
-까아악!
“까막몬?”
그리고 까막몬의 인도로 달려온 누군가가 나를 힘껏 끌어안았다. 숨이 막힌다고 생각한 순간, 거센 바람과 열기가 한 덩이가 되어서 우리를 날려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