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 * *
라이언 아이오나.
하얀 노루 이전의 백탑주.
이번 일의 관련자들을 쥐어짜 본 결과, 배후에 그가 있다는 사설이 드러났다.
‘복실이를 납치해서 나를 협박하려는 거겠지.'
문제는 복실이의 행방을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이오나의 세력은 철저하게 점조직으로 활동해서 개개인이 알고 있는 정보량이 무척 적었다.
한마디로 납치하는 놈 따로, 협박 편지 보내는 놈 따로, 협박을 맡은 놈이 따로 있었다.
즉, 복실이의 납치가 성공했는지, 복실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는 놈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납치에 실패했다면 복실이는 내 옆으로 돌아왔을 거야.'
아이오나에게 매수된 시종은 아빠를 보러 가라는 말로 복실이를 떠밀었다. 밖으로 나간 복실이는 싸움의 흔적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심지어 주크와 성냥까지 함께 실종됐다.
그런 힘을 지닌 지들은 흑막의 세력 외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복실이가 왕의 길을 여는 건 불가능하니까.'
왕의 길을 열려면 주크의 허락을 받아야 하고, 주크를 쥔 채로 천공신의 이름을 말해야 한다.
복실이는 주크의 허락을 받을 수는 있지만, 천공신의 이름을 말하는 게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대신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니 복실이가왕의 길을 열지는 않았을 거다.
결국 아이오나 쪽에서 복실이를 납치했을 거라는 결론밖에는 안 나온다.
‘갈 수밖에 없겠네.'
나는 청탑주가 알려 준 접선 장소로 향하기로 했다. 이제 남은 단서는 거기분이니까.
“마님, 함정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함정이 아니라도 이젠 함정으로 변했겠죠.”
뉴던비 항구와 마탑이 깨졌다는 건 당연히 아이오나의 귀에도 전해졌을 것이다. 청탑주가 붙잡혔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그와 접선했던 곳에 함정을 파겠지.
위험한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복실이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복실이는 세스와 나의 소중한 아이니까.
더불어 우리가 가족이라는 상징이기도 했다.
‘그리고 세스에게 더 이상 가족을 잃는 슬픔을 줄 수는 없어.'
결심을 굳힌 나는 기사들을 바라보며 선언했다.
“무슨 희생을 치러서라도 복실이를 반드시 되찾아야 합니다. 도중에 돌아가는 일은 없습니다.”
-구르르르······.
까미가 내 말에 응답하듯 서글프게 울었다.
마탑을 박살 낸 뒤에도 복실이를 되찾지 못한 까미는 과거의 트라우마가 되살아났는지 무척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나는 까미에게 또다시 상처를 준 아이오나를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서두르죠. 시간이 지날수록 적들이 준비하는 함정이 더 정교해질 테니까요.”
어쩌면 라이언 아이오나가 떡하니 버티고 있을 수도 있었다.
나는 라이언 아이오나가 얼마만큼의 힘을 지니고 있는지 모른다. 백마법사들의 영원한 스승으로 불릴 만큼 꽤 강할 거라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여기 올 때 나도 최대한의 준비를 했다. 날고양이들과 까미와 흑룡, 코크 곰의 도움까지 있으면 결코 쉽게 지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스에게는…… 역시 알리지 않는 게 좋겠지.'
세스가 알면 분명 걱정할 테니까. 어쩌면 복실이를 포기하자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할지도 모른다.
나는 미련을 털어 내듯 짧게 심호흡을 한 후에 우유의 위에
올랐다.
* * *
청탑주가 알려 준 접선 장소는 마탑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곳이었다.
거기에는 버섯 모양의 특이한 바위만 우뚝 서 있을 뿐,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없었다. 날고양이들과 흑룡이 먼저 주변을 살펴본 후 위험한 것이 없다고 알렸다.
우유의 등에서 내린 나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없는 공터였다.
“수상해 보이는 것은 없습니다.”
탐색을 마친 기사들이 보고했다. 나는 허탈감에 멍하게 서 있었다.
단서가 여기서 끊어지다니, 그럼 납치범이 먼저 연락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조금만 더 찾아보죠.”
나는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까지 주울 기세로 주변을 돌아다녔다. 기사들은 검집으로 바닥을 헤집었고, 고양이들은 하늘 높이 올라가서 특이한 점이 없는지 살폈다.
까미와 흑룡이는 바위나 나무를 툭툭 치고 돌아다녔고, 코크 곰은 주변의 땅을 얼렸다 녹였다 하면서 변화가 있는지 관찰 중이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인간은 인간끼리, 동물들은 동 물끼리 모이게 되었지만 그 사실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I
-크르릉!
경고를 담은 코크 곰의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내가 발을 디디고 있는 땅이 은은한 흰색으로 물들었다.
깜짝 놀라 옆으로 몸을 날렸지만, 내가 떨어진 곳도 빛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마치 두부를 잘라 내듯 나와 기사 몇 명이 서 있는 공간이 통째로 이동됐다.
나는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처음 보는 풍경이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어느 귀족의 저택에 있을 법한 넓은 홀이었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지만, 한때는 벽마다 초상화가 걸려 있던 흔적이 엿보였다.
“마, 마님! 당장 탈출하셔야 합니다!"
"저희가 목숨을 걸고 길을 열겠습니다.”
“쉿, 다들 진정해요.”
나는 우왕좌왕하는 기사들을 친정시켰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호랑이는 사는 법이다. 지금 부터 나는 호랑이다.
잠시 후, 여럿의 인기척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된다는 아이오나 님의 말이 사실이었군. 이렇게 쉽게 월척이 낚일 줄이야.”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남자들이 등장했다. 나는 그들의 복장과 생김새를 빠르게 살폈다.
"안녕하신가, 공작 부인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이오.”
무리의 대장으로 보이는 껄껄이가 능글거리며 말했다. 나는 마지막까지 그들을 살핀 후에 결론을 내렸다.
“당신들 사실 복실이룰 손에 넣지 못했지?”
복실이를 손에 넣었다면 나를 고분고분하게 만들기 위해 분명 함께 데리고 왔을 것이다. 그러지 못하는 것은 처음부터 사기를 쳤단 소리였다.
"복실이? 아, 부인이 키우는 뱀 말인가? 우린 뱀 따윌 인질로 잡는 시시한 짓은 안 해.“
껄껄이가 콧방귀를 뀌며 나를 비웃었다. 나도 생글 생굴 웃으며 맞받아쳤다.
“그럼 어떤 시시한 짓을 잘하는데? 인질도 없으면서 있다고 사기 치기? 정면으로 싸우기 무서워서 함정에 빠지길 가만히 서서 기다리기? 남이 다 떠먹여 준 것을 창피한 줄도 모르고 껄껄 웃으면서 자랑하기?"
"······.“
“내가 너라면 물에 코 박고 죽었다. 하도 병신 같아서.”
내가 이렇게 날카롭게 쏘아붙일 줄은 몰랐는지 껄껄이의 얼굴이 경직됐다.
"귀족 계집의 입이 왜 이렇게 더럽지? 네가 정말 공작 부인이냐?“
“감당 못 하겠으면 지금이라도 울면서 도망치지 그래?”
“마음이 바뀌었다. 멀쩡히 데려오라고 했지만, 사지 중 하나가 붙어 있지 않아도 되겠지.”
껄껄이가 살기등등한 얼굴로 검을 뽑아 들었다.
나는 내 앞을 가로막으려는 기사들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오른손을 들고 까딱였다.
“한번 쳐 봐 용기 있으면"
"······."
“드루와, 드루와.”
여기 올 때 나는 최선의 준비를 다했다. 그동안 선물 받은 마도구를 온몸에 치렁치렁 감고 온 것이다.
그중 하나는 내게 가해진 공격을 몇 배로 되돌려 주는 종류였다.
이런 마도구의 단점은 한번 쓰면 바로 탄로가 난다는 거다. 그래서 첫 공격을 먹일 상대는 대장인 껄껄이 같은 애가 좋았다.
하지만 껄껄이는 애가 묘하게 소심해서 검을 치켜든 채로 망설였다. 조금 더 자극이 필요한 것 같아서 열심히 후춧가루를 뿌렸다.
"검 든 사람 어디 갔나?"
"······."
“아니면 나한테 졸았니?"
어그로의 최고봉이라는 쫄 공격까지 날렸는데, 껄껄이는 끝내 검을 날리지 못했다.
“그만두지. 나까지 바보가 되는 기분이군.”
”와, 이걸 그냥 넘기네.”
아쉬움에 혀를 차는 순간, 내 얼굴로 뾰족한 뭔가가 날아들었다. 하필 제일 뒷줄에 서 있던 약해 보이는 애가 날린 공격이었다.
"안 돼!"
첫 반격기 찬스가 날아가는 것이 안타까웠던 내가 비명을 질렀다.
그때 갑자기 내 앞에 시커먼 옷을 입은 사람이 불쑥 나타나 날아드는 것을 쳐 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껄껄이가 그를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검은 옷은 뒤에 선 나를 의식해서인지 피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찔리고 말았다.
“악! 선배님!"
나는 휘청거리는 검은 옷을 붙잡았다. 이전에 세스와 처음 만났을 때 밀수선 안에 가득하던 선배님들이 입고 있던 옷이었다.
얼굴을 가려서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후배를 위해 몸을 바치는 희생 정선에 눈물이 나려고 했다.
‘필요 없는 짓이었다고 어떻게 말해.’
나는 추가 공격이 있을까 봐 황급히 선배님을 붙잡고 뒤로 물러섰다. 껄껄이가 의혹 어린 눈으로 그런 나를 보고 있었다.
“그림자 기사에게 선배라고? 너 진짜 공작 부인이 맞나?"
순간 내 머릿속엔 온갖 생각들이 떠다녔다. 지금 상황의 유리함과 불리함이 책처럼 정리되어 차곡차곡 쌓였다. 그리고 나는 생긋 웃었다.
"들켰는걸?"
"······."
“사실 나는 공작 부인의 대역이다.”
침묵하던 껄껄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마법사 같은 옷을 입고 손에 수정구를 들고 있던 녀석이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지, 진실입니다.”
아니, 거짓말 탐지기가 있다?!
마침 잘됐다고 생각한 나는 신들린 것처럼 이야기를 풀어냈다.
“나는 완전 소중한 공작님을 지키기 위해 그림자 기사들의 막내가된!"
"진실입니다.”
”로즈다!”
“거짓입니다."
······코드 네임 정도는 마음대로 지어도 되잖아.
그때, 내 부축을 받고 있던 이름 모를 선배님이 작게 웃는 소리를 냈다.
”로즈, 임무는 훌륭하게 완수했으니 이제 내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라, 이 목소리는······ 제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