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 * *
천년방패.
마탑의 마법사들이 자신들의 결계를 자랑할 때 쓰는 말이었다. 마탑의 역사가 진짜 천 년이나 이어졌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만큼 견고하고 뚫을 수가 없다는 뜻으로 통했다.
하지만 지금 그 천년방패가 그들의 눈앞에서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기시들은 무너지는 결계를 보며 전율했다.
지금껏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올 그들의 주인, 이블린이 성공시켰다.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힘겹게 얻은 승리도 아니었다. 이블린이 정원에서 꺾어 온 나뭇가지를 떨어뜨리고, 그리핀들이 폭탄을 터트리고, 바실리스크들이 몇 번 몸을 부딪친 것으로 끝났다. 너무나 쉽게 박살 난 결계에 머릿속이 다 얼얼해지는 느낌이었다.
놀라서 넋을 놓은 그들과 달리 이블린은 덤덤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승리의 기쁨이나 흥분이 없었다. 마치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끝냈다는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마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기사들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울 삼켰다.
‘마님께선 절대 평범한 분이 아니다. 감히 우리의 눈으로는 재단할 수 없는 분이라 그동안 몰라봤던 것이다.'
그들은 보는 눈이 없었다는 것에 부끄러워하며 충성을 다짐했다. 이블린이 이룬 업적은 그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이제 내려가자.”
이블린이 가볍게 우유의 목을 두드렸다. 우유의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들은 그리핀들이 일제히 정렬했다. 그들은 조용히 마탑에 내려앉았다.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이오! 탑주인 내가 왜 그런 하찮은 짓을 벌이겠소!"
마법사들의 손에 붙잡혀서 끌려온 청탑주는 자신의 죄를 딱 잘라 부정했다. 범인들과 내통한 증거가 청탑에서 나왔음에도 끝까지 모른다며 잡아뗐다.
이블린은 그와 실랑이를 벌이는 대신 그리핀의 목구멍 안을 구경시켜 주었다. 순식간에 공손해진 청탑주 가전과 다른 대답을 꺼내 놓았다.
“사실 청탑주가 되기 위해서 외부의 지원을 받았는데, 그 대가로 몇 가지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장소만 빌려주기로 한 거라서 깊게 관여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블린은 분노로 미쳐 날뛰는 바실리스크 부부와 그의 미팅을 주선했다.
그러자 청탑주의 입에서는 좀 더 핵심적인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저는 이곳에서 대기하다가 뿔이 달린 하얀 뱀이 넘어오면 그것으로 공작 부인을 협박하라는 지시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뱀이 넘어오지 않아서 행동에 옮기지는 못했습니다.”
"야, 이 새끼야!"
갑자기 달려든 황탑주가 그의 뺨을 후려갈겼다. 어찌나 찰지게 때리는지 다른사람이 말릴 틈도 없었다.
“그냥 저승에 가서 대기해라! 어서 가서 마탑의 선배님들에게 사과해, 이 개새끼야!"
혹시나 오해가 있지 않을까 했던 기대가 무참히 깨어졌다. 분노한 다른 마법사들도 청탑의 마법사들을 마구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죽어! 죽어! 너희들 때문에 이게 뭐야!"
이번 일로 마탑이 입은 피해는 어마어마했다. 결계를 지탱하는 상급 마나석만 해도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비싼 물건이었다.
구하기도 힘든 상급 마나석을 다시 사들여서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쏟아 결계를 복구하는 그 모든 과정을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득해졌다.
무엇보다 결계를 복구한다고 해도 깨어진 그들의 자부심은 회복되지 않는다. 이제 천년방패는 단순한 방어막으로 전락했다. 그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한바탕의 매타작이 끝나자 청탑주는 더없이 고분고분해졌다.
이블린은 그에게 혈서를 보여 주며 네가 쓴 거냐고 추궁했다. 청탑주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건 행동부의 짓입니다.”
"행동부?"
"저희는 지시를 내리는 지휘부와 거기에 따르는 행동부, 저처럼 현지에서 물건을 조달하거나 장소를 제 공하는 지원부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복실이라는 뱀도 아마 행동부에서 데리고 있을 겁니다.”
설명만 그럴듯하지, 사설 얼굴을 아는 한 명끼리만 연결된 점조직이었다. 청탑주 역시 제가 속한 지원부가 몇 명인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럼 행동부는 어디에 있지?"
"저도 그들의 본거지는 모릅니다. 대신 그들과 접선 하는 장소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청탑주는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장소를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듣던 이블린이 환하게 웃었다.
“이야기해 줘서 고마워. 이제 그 말이 사실인지 확인해 봐야겠네.”
그녀의 손짓을 받은 기사들이 청탑주를 으슥한 방으로 끌고 갔다.
* * *
사절단의 책임자인 존 워릭 백작은 매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공작이 마탑에 다녀오겠다고 통보한 탓이다.
"복실이가 여기 있다는 전보는 보냈지만, 전보가 전달되는 데도 꽤 시간이 걸리니까.”
키우는 뱀이 납치당했다고 마탑에 쳐들어간 공작 부인 때문이었는데, 정작 그 뱀은 혼자 가출해서 공작을 찾아와있었다.
‘그냥 내버려 둬도 괜찮을 것 같은데, 왜 굳이 가겠다는 거지?'
마탑의 결계는 무적이었다.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간 공작 부인 역시 아무것도 못 하고 돌아올 것이 분명했다.
답답해진 백작은 떠날 채비를 하는 공작을 향해 잔소리를 퍼부었다.
“정말 꼭 가셔야겠습니까?"
“가야해."
“사절단을 도중에 이탈한 일로 분명 문제가 생길 겁니다.”
"감수하지.”
적도 많은 사람이 나중에 곤란해질 것을 알면서도 물러서질 않았다. 지위라도 낮으면 안 된다고 강제로 찍어 누를 텐데, 차마 그럴 수가 없는 상대였다.
결국 백작은 한숨을 쉬며 항복했다.
“제가 감히 어떻게 전하를 말리겠습니까.”
“미안하군.”
형식적인 사과를 하면서도 공작은 빠르게 무장을 하고 있었다. 마치 마탑과 전쟁이라도 벌이러 가는 사람 같았다.
백작은 설마설마하다가 물었다.
“전하, 마탑과 싸우시려는 건 아니죠?"
"······."
침묵하는 공작의 모습에 백작은 속이 바짝바짝 타는 것을 느꼈다.
마탑의 결계는 무적이다. 그런데 왠지 이 남자라면 결계도 베어 버리고 마법사들을 도륙할 것 같았다.
그럼 왕이 공작을 말리지 못한 죄로 자신의 목을 손수 뽑아 버릴 것이다.
백작은 핏빛 미래가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 같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을 재촉했다.
“제발 아니라고 해 주십시오, 네?"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 아내가 갔다면 마탑은 이미 정리됐거나, 정리되는 도중일 테니까.”
……이건 또 무슨 혁신적인 아내 자랑이지? 황당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백작이 따지듯이 물었다.
“정말 그렇게 믿으신다면 왜 싸울 준비를 하십니까?"
“마탑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아서.”
“예?”
"예감이 좋지 않아. 내 아내가 마탑을 이미 끝장낸 다음 다른 곳에서 위험한 일을 잔뜩 하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농담이냐고 웃고 싶은데 왠지 웃음이 안 나오는 분 위기였다.
그때, 노크도 없이 문이 획 열리며 공국의 신기 선택자인 말라크가 들어왔다. 그는 인사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 용건부터 꺼냈다.
“마탑에 간다고 들었는데 저도 같이 가죠.”
"······왜?"
"공작 부인을 좀 보고 싶어서.”
"······."
이 미친놈아! 백작은 소리 없이 부르짖었다. 온몸으로 욕을 하는 그를 보고 자신의 실책을 알아 챈 말라크가 덧붙였다.
“아, 이성적으로는 흥미 없습니다. 공작 부인이 그리핀들을 완벽하게 복종시켰다고 들었거든요. 무슨 방법을 썼는지 궁금해서 한번 만나고 싶습니다.”
"거절한다."
“어째서?"
"난 지금 바쁘니 다음에 이야기하지.”
공작은 더 이상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그러자 말라크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저도 그렇게 한가한 사람은 아닙니다만. 여기서 저번에 하려다가 만 대결이라도 할까요?"
"방해된다. 비켜.”
공작은 전에 없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손에 검도 없는데 당장 말라크를 찔러 버릴 것 같았다. 당황한 백작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전하, 그를 죽이시면 안 됩니다. 잘못하면 공국과 외교 문제가 터진다고요.”
“이자가 죽으면 공국에선 오히려 좋아할 것 같은데.”
공작의 말에 말라크가 눈에 띄게 움찔했다. 그는 일그러진 얼굴로 비아냥거렸다.
"공명정대한 기사의 검이라더니, 남의 약점을 공격 할 줄도 아는군."
"공명정대는 또 어디서 나온 말이지? 네 멋대로 날 재단하지 마라. 불쾌하다.”
“그럼 어서 검을 뽑으라고.”
백작은 살벌하게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 사이에서 재 빨리 물러섰다. 그때, 정중한 노크 소리와 함께 두 번 째 방문객이 나타났다.
“저기, 바브십니까?"
백작이 그레이 일족 중에 유일한 정상인이라고 생각하는 백탑주였다. 공작은 말라크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물었다.
“무슨 일이지?”
“이블린 님을 뵈러 마탑으로 가선다는 소리를 들어서 저도 동행하고 싶습니다.”
아니, 너도냐!
황당해진 백작이 입을 떡 벌렸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공작이 내뱉듯이 거절했다.
“나와 백탑주가 동시에 없으면 그레이들을 통제하기 불가능할 것 같군.”
“하지만······."
그러나 백탑주가 무어라 반박하기도 전에 경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말라크가 비웃는 얼굴로 공작을 바라봤다.
“아, 그런 쪽인가? 의처증이 있는데 아내에게 뭐라고 할 용기는 없어서 아내 근처에 다가오는 남자들을 모조리 찔러 죽이는 놈?"
그러자 공작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아니, 거기서 움찔하시면 어쩝니까! 진짜 같잖아요!'
공작이 당하는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던 백작이 버럭 소리쳤다.
“닥쳐라! 다짜고짜 남의 아내 얼굴 좀 보자고 한 놈이!"
“아니, 그건 실수였다고.”
”뭐야? 싸움 났어?“
그때 백탑주를 밀어내며 나바르의 태자가 등장했다. 집주인의 동장에 대치중이던 두 사람도 어쩔 수 없이 자세를 풀었다.
태자가 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뭐 싸우는 건 두 사람이 나중에 알아서 하고. 동서가 마탑에 간다기에 나도 동행하겠다는 말을 전하러 왔네.”
……태자, 너마저.
이제 놀랄 기운도 없는 백작이 침착하게 물었다.
“엘마이어 공작 부인 때문입니까?"
"역시 백작은 날카롭군. 처제를 즉위식에 초대하려 면 아무래도 얼굴을 직접 보고 말하는 편이 더 좋지 않겠나. 아, 걱정하지 말게 난 처제에게 이성적인 관심 은 전혀 없으니까.”
그 변명은 이미 다른 놈이 써먹었습니다만. 백작은 속으로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공작 부인은 대체 어떤 사람이지?'
주변에 떠돌던 소문을 떠올리려 애쓰던 백작은 문득 소름 돋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세상에. 공작 부인은 아직 사교계 데뷔도 안 했잖아?'
지금도 이런데 나중에 사교계에 나서면…….
백작은 저도 모르게 동정 어린 시선을 공작에게 보냈다. 왠지 그가 진짜 의처증에 걸린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