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 * *
-왜애애애애앵!
귀를 찢을 것 같은 경보음에 마탑의 마법사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너희들은 포위됐다. 반복한다. 너희들은 포위됐다. 인질을 풀어 주고 순순히 투항하라.
반복되는 무뚝뚝한 음성도 그들의 스트레스를 증가 시켰다. 평소 실험실에 틀어박혀 있던 지들·까지 뛰쳐나와 용성거리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황탑주.”
"누군가 마탑에 쳐들어온 건가요?"
반역 때문에 잡혀간 적탑주 대신 마탑의 방어를 맡고 있는 황탑주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 이······."
그는 바로 직전에 아스트리아 왕의 긴급 통선을 받았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급하게 받자, 느닷없는 호통이 쏟아졌다.
-마탑이 언제부터 이렇게 추잡스러운 곳이 되었는가! 짐이 이런 꼴을 보려고 그대들을 지원하는 줄 아나?
"폐, 폐하. 송구하오나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부디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엘마이어 공작 부인이 키우는 뱀을 청탑에서 훔쳐갔다. 너희가 얼마나 짐을 우습게 보면 이런 무엄한 짓을 저지를 수가 있느냐?
아스트리아 왕은 마탑의 최대 후원자였다. 그것도 아주 너그러운 후원자.
지난 3년간 아무런 연구 성과를 못 내도 허허 웃으며 더 많은 지원금을 보내 줄 정도였다. 7년 전쟁에서 아스트리아의 편을 들어 준 것에 대한 대가이자 보답이었다.
그런 왕이 지금 눈이 뒤집혀서 화를 내고 있었다. 그게 고작 뱀 한 마리 때문이라는 것이 당황스러웠지만, 이런 문제에선 ‘누가’키우는 뱀인지가 더 중요했다.
-엘마이어 공작 부인은 짐의 총신이다. 머리 허연 노신들도 감히 녀석의 앞에선 고개를 들지 못하는데, 너희의 간이 얼마나 커서 이러는지 참으로 궁금하구나.
"소, 송구하옵니다. 즉시 시정하겠습니다!"
-당장 뱀을 돌려주고 사과해라! 더 이상 추잡하게 굴지 말고!
뚝 하고 통신이 끊겼다.
황탑주는 목뒤가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다.
당장 청탑주의 멱살을 잡으러 달려갔지만, 무슨 일인지 청탑 전체가 밀폐된 상태였다. 탑 안에서는 불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죄송합니다, 황탑주. 지금 극비 실험 중이라 문을 열수가 없습니다.
"극비 실험은 무슨! 당장 이 문 열지 못해?!"
황탑주는 미친 듯이 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선 더 이상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리고 그가 뭔가를 더 하기 도전에 요란한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황탑주의 설명을 들은 마법사들은 시큰둥해졌다.
“결국 귀족이 키우는 뱀을 훔쳐서 이 난리가 났다는 거네요. 난 또 뭐라고.”
"언제 잡혔는지 몰라도 지금까지 살아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그냥 비슷한 뱀으로 하나 사 주겠다고 협상 하죠.“
연구에 미친 마법사들은 실험을 위해 남의 무덤을 파헤치거나, 멸종 직전의 생물도 아무렇지도 않게 써 버렸다. 그러니 고작 귀족이 키우던 뱀 한 마리 정도를 대단하게 생각할 리가 없었다.
-왜애애애애앵!
“그런데 저 소리 좀 꺼 줄 수 없나? 쳐들어올 거면 쳐들어올 것이지, 시끄럽게 말이야.”
“어학 아스트리아 왕이 당장 뱀을 돌려주고 사과하라고 경고했네. 이러다가 지원금이 끊기게 생겼어!"
“그럼 이번엔 카스티야 쪽에 붙는 거죠, 뭐.”
"애초에 아스트리아 편을 든 것도 그쪽이 덜 귀찮아서 그랬던 거잖습니까.”
철없는 마법사들의 투덜거림에 황탑주는 뒷골을 움켜쥐었다.
“지금 백탑주는 은퇴를 선언했고, 적탑주는 공석이고, 청탑주는 무책임하게 틀어박혔네. 사대 탑의 마스터 중 대부분이 비워진 상태라고! 이런 상태로 아스트리아와 싸우면 우리가 불리해!"
"불리하면 안 싸우고 여기 틀어박혀 있을 수밖에요. 결계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십니까? 어차피 저들은 여기 못 들어옵니다.”
그들의 오만한 태도는 결계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다.
비록 불미스러운 일로 한 차례 파괴된 적이 있지만, 그건 내통한 자들이 내부에 폭탄을 심었기 때문이었다.
정면에서 마탑의 결계를 깨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믿음이 상대를 하찮게 여기도록 만들었다.
-마지막 경고다. 너희들은 포위됐다. 인질을 풀어 주고 순순히 투항하라.
그때 시끄러운 경보음이 끊어졌다.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이제 끝인가 하고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몇몇은 묘한 섬뜩함을 느끼며 하늘을 살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그리핀 몇 마리가 하강하는 것을 발견했다.
“어어, 그리핀이다!"
“시끄럽게 구는 이유가 있었네요. 그리핀은 항마력이 강하니 결계를 뚫을 수 있다고 생각했겠죠.”
”와, 한 마리 안 떨어지나. 실험용으로 쓰고 싶네.”
마법사들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결계 위로 날아오는 그리핀을 구경했다. 가장 앞에 있는 가슴 털이 하얀 그리핀의 등에 분홍 머리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결계 위에 뭔가를 떨어뜨렸다. 마법사들은 일직선으로 떨어지는 그것에 호기심을 보였다.
“뭐지?"
“나뭇가지인데? 줄기는 금색이고, 이파리는 은색인게 좀 특이하네.”
“바람에 날리지 않고 수직 낙하를 하고 있는데, 무슨 마법이라도 걸어 둔 건가?"
여유롭게 수다를 떨던 마법사들은 갑자기 쿵하고 땅이 흔들리자 화들짝 놀랐다. 눈이 동그래진 이들이 다시 위를 쳐다봤다.
“뭐, 뭐야?"
마탑의 결계 위로 거꾸로 뒤집힌 초록색의 결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초록색의 결계가 마탑의 결계를 찍어 누르고 있었다.
꽈드드득!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소리가 울려 퍼지자 그제야 마법사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황탑주! 저게 뭡니까!"
"뭐, 뭔가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결계에 방어 마법이 있잖습니까. 왜 안 나오죠?"
황탑주가 우왕좌왕하는 마법사들을 달랬다.
“다들 당황하지 마시오. 저건 순수한 정령력으로 이루어진 결계요. 방어 마법이 곧바로 반응하지 않는 것도 정령력으로 인한 방해 현상 때문이오.”
원래 마법은 신력 또는 정령력과 상성이 좋지 않았다. 곧바로 납득한 마법사들이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저 정도의 정령사가 아직 남아 있었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군요.”
"발상은 좋았지만. 힘이 약하군요.”
그들의 말대로 마탑의 결계는 깨지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누르듯 가운데가 움푹 들어갔을 뿐이다.
반면 초록색 결계는 위태롭게 흔들리다가 형체를 잃고 액체처럼 주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마법사들이 쯧쯧 혀를 차며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저것 봐. 역시 무리였다니까.”
그런데 그때였다.
“이런 큰일이다!"
녹아내리는 초록색 파편에서 정령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사방을 뒤덮는 정령력을 보고 상대의 속셈을 알아챈 황탑주는 화들짝 놀랐다. 그는 황급히 손을 모으고 술식을 짜기 시작했다.
“다들 저 파편을 밀어내게! 상대는 정령력으로 이곳의 모든 마나를 봉쇄할 생각이야!"
“예?”
"빨리!"
처음부터 상대의 목적은 정령력을 사방에 가득 채우는 거였다. 정령력을 들이부어서 마나를 전부 막아 버리겠다는 미친 발상에 숨이 턱턱 막혔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인데 , 그게 왜 가능하냐고!'
마나가 사라진 마법사는 무력한 일반인과 다를 바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그들은 손발이 묶인 채로 두들 겨 맞게 될 것이다.
“막아!"
“모두 태워 버려!"
마법사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마법을 쏘아 냈다. 누군가는 불로 파편을 태웠고, 누군가는 물로 씻어 내려고 했다.
하지만 폭포처럼 쏟아지는 정령력을 모두 막아 내기에는 무리였다. 결국 마탑의 주변은 고농도의 정령력으로 가득 찼다.
이제 마법사들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마나는 몸 안에 있는 것밖에 없었다. 평소라면 상관없었겠지만, 적을 방어하고 공격하기 위해서는 다수의 마나를 써야했다.
“다들 신중하게 생각하게! 아무 주문이나 남발하면 마나가 금방 바닥날 거야!"
황탑주는 마법사들을 자제시키며 적을 주시했다.
그 순간, 하늘 위에서 그들의 발악이 끝나길 기다리 던 분홍 머리 여자가 오른손을 척 들어 올렸다.
-끼에에에엑!
구름 속에서 수십 마리의 그리핀들이 튀어나왔다. 그들은 움켜잡고 있던 폭탄을 마탑의 결계에 거침없이 던져 넣었다.
화산 분화구처럼 움푹 들어간 부분에 굴러 들어간 폭탄들이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사방이 정신없이 흔들리자 마법사들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아악!“
“이, 이럴 수가!”
마법사들은 바닥을 뒹굴며 자괴감을 느꼈다. 결계를 공격하고 있는 것은 고성능의 마나 폭탄이 아니었다.
선원들이나 쓸 법한 저급한 폭탄이었다. 실제로 항구에서 주워 온 폭탄이기도 했다.
화약 폭탄으로 결계를 부수려는 모습에 마법사들은 더없는 수치심과 모욕을 느꼈다.
"더 이상은 용서 못 해!"
성격 급한 적탑의 마법사가 벌떡 일어서더니 마나를 있는 대로 끌어 모았다. 그리고 최고위 공격 마법을 그리핀 위에 앉아 있는 여자를 향해 쏘아 냈다.
“받아라! 헬파이어!"
하늘로 치솟은 불기둥이 여자의 몸을 휘감으려는데, 갑자기 나타난 얼음송곳이 불기둥의 핵을 꿰뚫었다.
푸식 소리와 함께 불기둥이 허무하게 흩어졌다.
"······어?"
적탑의 마법사가 멍하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그리핀 위의 여자가 다시 손을 치켜들었다가 내렸다. 그러자 수십 마리의 그리핀들이 일제히 수직 낙하를 하며 결계를 들이박았다.
항마력을 갖춘 생물인 그리핀의 육탄 돌격에 결계가 다시 심하게 흔들렸다.
황탑주는 품속에서 챙하고 무언가 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결계를 지탱하는 상급 마나석들이 부서지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캬아아악!
뒤이어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몸길이만 수십 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뱀이 마치 도끼를 찍듯 대가리로 결계의 옆면을 들이박았다. 결계가 두둥하고 북처럼 울렸다.
-캬카칵!
탑처럼 거대한 몸통과 흉측할 정도로 날카로운 비늘, 왕관처럼 머리를 둘러싼 뿔.
상대의 정체를 알아챈 마법사들이 전율했다.
“바, 바, 바실리스크!"
더욱 두려운 것은 사정없이 결계를 들이박는 놈 뒤에 웅크린 암컷 바실리스크였다. 날뛰는 수컷과 달리, 암컷은 조용히 눈을 빛내며 마법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
-엘마이어 공작부인이 키우는 뱀을 청탑에서 훔쳐 갔다.
문득 왕의 말이 떠오른 황탑주는 온몸에 소름이 쭉 돋는 것을 느꼈다.
만약 그 뱀이 바실리스크의 새끼라면?
“청탑주, 이 개새끼야!"
결계가 깨지는 순간 모두가 죽는다. 바실리스크는 절대로 복수를 포기하지 않는 생물이니까.
또다시 챙하고 결계를 지탱하는 마나석이 부서졌다 .
“아아악!“
이성을 잃은 황탑주가 청탑으로 돌진했다. 그리고 미친 듯이 문을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당황한 마법사 들이 웅성거렸다.
“뭐 해! 미친놈들아! 청탑주 못 꺼내면 우린 여기에서 다 죽는 거야! 빨리 부숴!"
머뭇거리던 마법사들이 황탑주를 도와서 문을 부수기 시작했다.
마침내 결계를 깨부순 이블린이 그리핀들을 이끌고 쳐들어갔을 때, 마법사들은 열심히 백기를 흔들고 있었다.
그들은 굴비처럼 꽁꽁 묶인 청탑주와 첨탑의 마법사들을 내밀며 애원했다.
“이 새끼가 나쁜 놈입니다. 이 새끼를 죽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