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 * *
이블린의 호위 기사들은 호위로 선발됨과 동시에 선배들의 당부를 들었다.
"보기와는 다른 분이니 신경 써서 모셔야 한다."
"돌발 상황이 많이 생길 텐데, 규칙 따윈 X 까고 유연하게 대처해라. 결과만 좋으면 어떻게든 된다.”
“……고생해라 살아서 만나자.”
절로 군기가 바짝 들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들이 직접 겪어 본 이블린은 모시기 까다로운 주인이 아니었다.
왕궁에 가는 것 외에는 외출하지도 않았고, 대부분은 집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가끔씩 찾아오는 손님들이 거물이라는 것만 빼면 특별한 점은 딱히 없었다.
심지어 성격도 좋아서 항상 생글생글 웃고 다녔다. 밖에서는 천사처럼 굴다가 집에서는 아랫사람을 학대하는 귀족도 있는데, 이블린은 그들에게도 잘해 줬다.
그래서 어느새 긴장을 풀고 말았다.
-끼에에엑!
기서들은 주변을 둘러싼 그리핀을 보고 망했다는 생각을 했다. 한 마리도 아니고 수십 마리, 그야말로 그리핀의 밭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비명을 지르고 기절했을 일이지만, 기서들이 망했다고 느끼는 것은 다른 포인트였다.
이 많은 그리핀들이 전부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앞에 있는 그리핀의 대장인 우유는 눈에 될 정도로 장식 깃털이 달달달 떨리고 있었다.
원인은 그들의 앞에서 무형의 기운을 너울너울 일으키고 있는 이블린이었다. 그녀 주변의 풍경이 마치 아지랑이처럼 이리저리 일그러지고 휘어져서 보였다.
“저, 마님.”
호위대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이블린이 그를 힐끗 쳐다봤다. 웃음기가 싹 사라진 무표정한 얼굴이 묘하게 섬뜩했다.
호위대장은 혈서를 보낸 자들을 미친 듯이 저주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저희들도 따르겠습니다.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말없이 고개만 끄떡인 이블린이 우유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털썩 무릎을 꿇은 우유가 날개를 바닥에 깔아서 이블린이 제 동에 타기 쉽게 도왔다.
”······우리도 가자.”
대장의 말에 기사들이 원망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갑자기 그리핀의 등에 타라니,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지금 찬물, 더운물 가릴 때가 아니야. 이러다 마님을 놓치면 우린 다 죽는다.”
결국 기서들은 삐걱거리며 그리핀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그리핀들이 그들을 덥석 물어 제 등 위에 올렸다. 괜히 이블린을 기다리게 해서 미움을 받기 싫다는 것처럼.
‘진짜로 X 됐구나.'
호위 기서들은 뻣뻣이 굳은 채 그리핀의 등에 찰싹 달라붙으며 눈물을 삼켰다. 망하다 못해 이제 망함과 하나가 되는 기분이었다.
“프리지어 궁까지. 최고 속력으로.”
-끼르르륵!
이블린의 주문에 우유가 있는 힘껏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수십 마리의 그리핀들이 마치 화살처럼 프리지어 궁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 * *
프리지어 궁은 그리핀들이 떼를 지어 날아와도 놀라지 않았다. 종탑에선 공작 부인이 돌아왔다는 신호만 가볍게 울렸다.
잠시 후, 신호를 들은 시녀장이 급히 이블린을 맞이하러 나왔다. 우유의 등에서 내린 이블린은 그녀에게 혈서를 내밀었다.
혈서를 받아 확인한 시녀장은 곧장 종탑에 사람을 보냈다. 비상사태를 알리는 종이 시끄럽게 울려 퍼지자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빠르게 중앙으로 집합했다.
호수 속에 있던 흑룡과 온실에서 낮잠을 자던 까미. 정령수 아래에 있던 코크 곰도 마찬가지였다.
질서정연하게 선 이들을 둘러본 이블린이 무표정한 얼굴로 상황을 알렸다.
"복실이가 납치당했습니다."
사방에서 비명과 탄식 소리가 새어 나왔다. 몇몇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흑룡이 이를 드러내고 까미가 홱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사방을 살폈다. 어디에도 복실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까미의 숨소리가 점점 쉬쉬거리며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반면 이블린은 무서울 정도로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내부에 납치범과 내통한 자가 있는 것으로 보고 지금부터 확인합니다. 정령수.”
이 집안의 CCTV를 담당하는 정령수가 있는 힘껏 몸 떨었다. 그러자 가지에서 떨어진 이 파리들이 시종 하나의 몸에 철썩철썩 달라붙었다.
새파랗게 질린 시종이 머리를 휘저으며 아니라고 부정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달려든 시종장이 그의 얼굴을 연달아 후려쳤다.
“혈연 때문에 널 뽑았는데, 이 미친놈이!"
“아악! 잠, 잠깐만요!"
이미 죄가 확정된 분위기였다. 모두가 험악한 얼굴로 시종을 노려봤다. 어떻게든 잡아뗄 생각이었던 시종은 무척 당황했다.
‘고작 뱀 한 마리 빼돌린 거잖아?'
이런 식으로 들킬 줄도 몰랐고, 들켜도 쫓겨나는 것으로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마치 반역죄를 지은 것 같은 분위기에 놀란 시종은 변명조차 제대로 하지 못 했다.
“지하 감옥으로 끌고 가세요. 제가 직접 심문하겠습니다. 그동안은 모두 여기서 대기하세요.”
이블린은 시녀장과 몇몇 시녀들만 데리고 지하 감옥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밖으로 나온 시녀들이 기사들을 이끌고 외출했다가 부랑자로 보이는 몇 명을 잡아 왔다.
고들 역시 곧장 지하실로 끌려갔다.
이내 심문을 마치고 돌아온 이블린이 덤덤한 얼굴로 선언했다.
“지금부터 뉴던비 항구에 있는 놈들의 본거지를 칩니다. 주모자를 모두 체포한 다음, 관련자를 색출하러 마탑으로 향할 겁니다.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폐하께 지금 상황을 보고하세요.”
빠른 심문, 빠른 체포, 빠른 결론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이블린에게 반발하지 않았다. 감히 그러면 안 된다고 모두가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 이다.
이블린과 기사들을 태운 그리핀이 출발하고 30분 뒤, 뉴던비 항구 전체가 거대한 얼음덩어리로 변했다.
* * *
세스는 빠르게 진주 궁의 복도를 가로질렀다. 마음 같아선 뛰어가고 싶은데 귀찮은 짐이 달려 있었다.
"동서, 천천히 가자니까.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우리 조카는 어디 안 갈 테니까.”
뒤를 따르는 태자를 알아본 호위가 정중히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자 태자비의 품에 안겨 과일을 먹고 있는 작은 뱀이 보였다.
”······복실아.“
-뀻! 꾸우!
그의 부름에 허공으로 뛰어오른 복실이가 빠르게 날아왔다.
세스는 제 뺨에 머리를 부딪친 다음 팔짝팔짝 뛰며 기쁨을 표시하는 아들을 어렵사리 붙잡았다.
“엄마는?”
-뿍! 부우우!
복실이가 그의 손등을 꼬리로 탁탁 두들기며 불만을 표했다. 왜 자길 반겨 주지 않고 엄마부터 찾느냐는 거였다.
발밑에서 얼쩡거리는 주크와 성냥을 발견한 세스는 한숨을 쉬었다.
혹시나 했는데 정말 복실이 혼자 여기로 와 버렸다. 복실이가 사라진 것을 안 이블린이 얼마나 놀랄지 생각하니 마음이 안 좋았다.
“신수께서 공작이 많이 그리우셨나 봅니다. 너무 혼 내지 마십시오."
태자의 옆에 선 태자비가 복실이를 감싸 줬다. 제 편을 들어 주는 태자비에게로 날아간 복실이가 뻑뻑 울었다.
그러자 태자가 덥석 복실이를 움켜잡았다.
“우리 조카, 여전히 귀엽구나. 이모부라고 불러 봐라."
퉤! 복실이가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당황한 세스가 복실이를 뼜어 들었다.
"남의 얼굴에 침 뱉고 그럼 못 써."
-뿍!
복실이는 여전히 불쾌해 보였지만 얌전히 그의 어깨에 앉았다.
입을 삐쭉이 는 태자의 뺨을 태자비가 손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신수님을 함부로 잡으면 못 써요.”
"왜 다들 나만 미워하지?"
태자가 힝힝거리며 그녀의 품에 안겼다.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지은 태자비가 그를 다독여 주었다.
한편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몸 둘 바를 몰라 하던 사절단의 책임자, 존 워릭 백작은 뭔가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입을 열었다.
"저, 그런데 저분은 부구십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말라크가 무뚝뚝하게 답했다.
"말라크입니다. 로엔 공국 출신인데, 갑자기 여기로 끌려왔습니다.”
“오, 로엔 공국이요. 상당히 멀리서 오셨군요.”
“여기로 끌려왔다고요. 제 말 이해 못 하십니까?"
까칠한 그의 반용에 백작은 입을 삐쭉거렸다. 나도 할 말이 없어서 물어본 건데 왜 성질이야.
“신수께서 이분을 데려오셨답니다.”
태자비의 설명에 이어서 복실이가 의기양양하게 울었다. 말라크의 앞에서 한 바퀴를 획 도는 것이 마치 제 부하라고 자랑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던 태자가 턱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이 남자가 갑자기 나타난 것을 보면 왕의 길은 꼭 천공신의 선녀가 아니라도 열 수 있는 모양이지?"
순간 주변이 조용해졌다. 백작까지 눈을 반짝이며 세스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스는 담담하게 답했다.
“성검의 허락을 받으면 가능합니다.”
“오, 그럼…….”
"보통은 성검을 쥐는 순간 죽지만.”
"······."
순식간에 미련을 버린 태자가 태자비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장난을 쳤다.
그를 간단히 떨쳐 낸 세스는 복실이 대신 말라크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본의 아니게 폐를 끼친 것 같군. 피해 보상 후에 왔던 곳으로 돌려보내 주겠네.”
"피해 보상은 됐고, 나랑 한판 붙읍시다.”
“무슨 소리지?"
"반쪽이라서 안 느껴지냐? 나도 신기 선택자거든. 당신과 마찬가지로.”
말라크가 자선만만하게 말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본 태자가 이제야 알겠다는 듯이 웃었다.
”로엔 공국 출신이라더니, 그대가 빛의 창의 주인인 모양이군. 그런데 지금까지 어디에 숨어 있었지? 그동안 공식적으로 얼굴을 드러낸 적이 없다고 아는데.”
“선택받지 못한 놈은 빠져 이건 우리끼리의 문제다.”
"······."
말라크의 거친 대답에 태자가 멍하게 입을 벌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신분을 내세워 화를 내는 대신 태자비의 품에 안겨 혹혹 우는 척했다. 아마 지금 상황을 꽤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일 터였다.
‘곤란하게 됐군.'
속으로 혀를 찬 세스가 말라크의 힘을 가늠했다. 아주 희미하게 신기의 힘이 느껴졌다. 반쪽으로 쪼개진 것을 감안해도 흔적만 남아 있었다.
“아니, 안 되겠군. 나와 싸우면 너는 반드시 죽는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지.”
그의 대답에 자존심이 상한 말라크가 으르렁거렸다. 조금 귀찮아진 세스가 한숨을 쉬던 바로 그때였다.
“저, 전하!"
새파랗게 질린 모리스가 급히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세스는 그의 손에 들린 쪽지가 그림자 기시들이 보내는 긴급 전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봤다.
"큰일 났습니다. 복실이가 납치당했습니다!"
"······."
하지만 세스는 미묘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이상함을 느낀 모리스는 그제야 그의 어깨에 앉아 있는 복실이를 알아채고 깜짝 놀랐다.
“아니, 어떻게……?"
“전보는 그것뿐인가?"
“아, 아닙니다. 복실이가 납치당한 것에 분노한 마님께서 손수 병력을 이끌고 마탑으로 쳐들어가셨답니다."
모두의 시선이 복실이에게로 쏠렸다. 느닷없이 사람들의 시선을 받게 된 복실이가 고개를 갸웃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