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154화 (154/240)

154화

* * *

아버님의 친구들을 회유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적당한 병명과 켄트 박사님의 소견서 한 장이면 충분했다.

“그럼 케인이 불치병에 걸렸단 말입니까?"

"네, Ja Sick Deung-Gol Breaker 증후군이라고, 아주 심각한 질병이에요. 이대로 내버려 두면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럴 수가!"

건강 염려증에 걸리기 딱 좋은 나이의 어르신들은 크게 동요했다. 그리고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협조하겠다며 나섰다.

물론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며 발을 빼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사업적인 이득을 미끼로 회유했다.

하지만 선뜻 건드리기 어려운 사람들도 있었다.

바로 아버님의 죽마고우 4인방이었다. 외교부 수장, 수석 재판관, 왕궁 보안 관리관, 재무부 차관 등 죄다 그럴싸한 자리를 맡고 있어서 신분으로 찍어 누를 수도 없었다.

‘으음, 이 아저씨들은 어떻게 설득하지?'

열심히 머리를 쥐어짜고 있을 때, 뜻밖에도 4인방이 먼저 나를 찾아왔다.

“요즘 공작 부인께서 내 친구들을 만나고 다닌다는 소문을 들었소. 이미 대부분을 포섭한 것 같더군.”

외교부의 수장인 너구리 아저씨가 먼저 운을 뺐다.

나는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서요?"

여기서 무슨 짓을 꾸미고 있냐고 추궁하거나, 며느리 도리를 옮으면 대가리를 깨 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역시 협상에 도가 튼 너구리는 뭔가가 달랐다.

"목숨만 살려 주시오."

“네?”

“케인의 생명을 보장해 준다면 우리도 협조하겠소."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왜 아버님을 해칠 거라고 생각하세요?"

“엘마이어 가문은 사자의 가문이라고 불리지. 그 이유를아시오?"

“가문의 문장에 사자가 있어서?"

칼 들고 춤추는 망나니 사자를 떠올리며 답하자 너구리 아저씨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대대로 사자와 결혼하는 가문이었기 때문이오. 엘마이어 가문의 안주인들은 전부 사자였지. 그게 아니면 케인처럼 능력도 없으면서 자존심만 강한 섬세한 도련님이 어떻게 공작이 됐겠소?”

설득력이…… 있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고 흠흠 헛기침을 한 너구리 아저씨가 덧붙였다.

"실례지만 부인에 대해서도 좀 알아봤소. 스스로의 힘으로 명성과 가신들의 충성을 손에 넣었더군. 아무리 작아도 사자는 사자라는 거겠지.”

아닌데요. 저는 게를 닮아서 캐스팅이 된 건데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아직도 제가 왜 아버님을 해칠 거라고 생각하시는지 모르겠는데요.”

“사자가 제 가족을 해친 자를 용서하던가? 내 짐작에 케인은 이제 털이 다 뽑혀서 끓는 물에 들어가기 직전일 거요. 내 말이 틀렸소?"

예리한 지적에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누가 봐도 군인처럼 생긴 아저씨가 한숨을 쉬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세스가 결혼하기 전에 미리 대비해야 한다고 그렇게 말했건만.”

마치 십만양병설을 거부당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하얀 가발을 쓴 판사가 엄숙하게 말을 받았다.

“케인은 분명 세스에게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소. 하지만 우리가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세스를 도운 공로를 봐서 조금이라도 참작해 주시길 바라오.”

"물론 맨입으로 도와 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계산은 정확하게 해야 하니까요. 케인을 살려 두는 대가로 우리가 부인의 편의를 최대한 봐드릴 겁니다.”

스크루지 영감처럼 생긴 아저씨가 마지막으로 협상을 시도했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세스에게도 이런 친구들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세스의 친구는 내가 알기로 제스터뿐이었다. 요즘은 뭐 때문인지 사이가 틀어진 것 같았지만.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지.’

아무래도 시간을 내서 제스터에게 한번 가 봐야 할 것 같았다. 내가 작게 한숨을 쉬자 너구리 아저씨가 서둘러 덧붙였다.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면 최대한 맞춰 주겠소. 얼마든지 말씀하시오.”

“아뇨, 보상은 괜찮아요. 처음부터 아버님을 솥에 삶을 생각은 없었거든요.”

내가 바라는 것은 아버님이 오래오래 질긴 목숨을 이어 나가며 자신이 한 짓을 반성하는 거니까. 죄책감으로 팍팍 괴로워하면서.

"목숨뿐만 아니라 최소한의 의식주와 운동 시간도 보장하겠습니다.”

“그 이상은 바라면 안 되겠지. 고맙소.”

그렇게 나는 아버님의 친구들을 모두 손에 넣을 수 있었다.

* * *

가냘픈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아버님은 의무실로 옮긴 뒤에야 겨우 정선을 차렸다. 하지만 내게 패배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부짖었다.

“이건, 이건 거짓말이야! 말도 안 돼!"

특히 친구들에게 배신당한 것이 꽤나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몇 분 정도 아버님의 추태를 감상하던 나는 품속에서 곱게 접은 계약서를 꺼냈다.

“아버님, 이제 그만 패배를 인정하시죠?"

지장이 찍힌 계약서를 팔랑거리자 아버님은 마치 사채업자에 쫓기는 사람처럼 나를 바라봤다.

“제가 궁금한 건 별거 아니에요. 어쩌다가 세스를 친 자식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됐는지, 그것만 답해 주시면 돼요.”

”······처음부터 전부 계획했구나! 이 고약한 것! 얄팍한 술수로 우정을 배신하게 만들다니!"

"네? 그럼 안 되나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버님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친자식을 벼랑으로 몰아넣는 아버님은 고작 친구가 배신하는 일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으실 줄 알았죠.“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뜨끔한 표정이 된 아버님이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지금 세스를 대신해서 나한데 복수하는 거냐?"

“무슨 소리세요? 제가 복수하기로 마음먹었으면 아버님은 이미 저승에서 어머님께 하이킥 맞고 계셨어요.”

“그럼 대체 왜……!"

"글쎄요, 아버님의 입에서 꼭 대답을 듣고 싶어서?"

"······.“

그러자 아버님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 지경이 되어 서도 말해 주기가 싫은 것 같았다. 슬슬 인내심이 바닥나는 것을 느낀 나는 상냥하게 그를 달랬다.

“계속 묵비권을 행사하시면 저 이거 공개적으로 터트려 버립니다?"

“넌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 얼마나 끔찍한 추문이 될지도 모르느냐!"

“모르겠는데요? 순순히 협조하시면 유혈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주먹을 꼭 쥐고 부들부들 떨던 아버님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세스는 내 자식이 아니다.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를 놈이야.”

"호오?"

"둘째가 태어났을 때는 심한 난산이었다. 진통을 견디지 못한 내 아내는 아이를 낳자마자 정신을 잃었어. 바로 그때 세스와내 딸이 바꿔치기 당한거다.”

역시 내가 예상한 그대로의 시나리오였다.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질문을 던졌다.

“아버님은 그 사실을 언제 알게 되신 거예요?"

"처음부터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자식들 중에서도 세스는 유독 나를 닮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진실을 알 게 된 것은 화재가 난 이후였다.”

당시 라리사는 마거릿 공녀를 학대한 죄로 방에 갇혀 있었다. 나는 그녀가 죄를 짓고도 어떻게 멀쩡히 빠져나왔는지가 궁금했다.

“그제야 라리사는 내 친딸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친어머니라고 믿었던 앨리스가 죽기 직전에야 진실을 말 해 줬다고. 하지만 증거가 없어서 지금까지 입을 다물 고 있었다고 했다."

“아니, 그 말을 아무런 의심도 없이 믿으셨어요?"

내 물음에 아버님이 울컥하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처음엔 믿지 않았지! 하지만 그런 말을 들은 이상 조사는 해야 했다. 그래서 마탑에 비밀리에 친자 검사를 해 달라는 의뢰를 넣었다.”

오, 여기도 친자 검사가 있구나. 나는 신기하게 생각 하면서 다음 이야기를 재촉했다.

“그런데 친자식으로 결과가 나와서 놀라셨겠네요.”

“그, 그랬지. 하지만 마탑의 비공식적인 결과만으로는 확신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아내와 친분이 있었던 신관에게 다시 한 번 친자 감별을 부탁했다.”

“대지의 선전이었나요?”

"당연히 대지의 신전이지. 아니면 친자 감별을 어떻게 하겠느냐?"

이곳에 대한 상식이 조금 부족한 나로서는 왜 당연히 대지의 신전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식도 일종의 열매나 수확물에 속해서인가?'

대충 혼자 납득하고 있는데 아버님이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신전의 검사 결과 역시 마찬가지였다. 라리사가 내 친딸이었어. 하지만 나는…… 진실을 밝힐 용기가 없었다."

그가 가장 염려한 것은 아내의 명예가 더럽혀지는 것이었다.

캐서린 공주는 과거 시동생에게 추잡한 짓을 당했다는 누명을 썼다. 그런데 이제 와 친자 감별 사실을 밝히면 그때의 일들이 다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것이다.

무엇보다 라리사가 자신의 친딸이라는 사실을 사람 들이 믿지 않을 터였다. 계속해서 의심 어린 시선 속에서 살게 되리라.

“고뇌하는 내게 라리사가 먼저 말해 주었다. 자신은 양녀라도 상관없다고. 내 옆에서 딸로서 살 수만 있으면 만족한다고.”

“아하~ 거기에 홀랑 넘어가서 양녀로 삼으신 거였구나~!”

굳이 양녀로 삼았다가 세스와 결혼시키려고 했던 이유도 이재야 알겠다. 라리사의 것이었던 자리를 돌려주는 거라고 생각했겠지. 세스는 그냥 데릴사위인 셈 치면 되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세스를 미워하신 거예요? 친자식이 아니라고 해도 기른 정은 있을 거 아니에요?"

아버님의 말이 전부 진실이라도 아기 때 뒤바뀐 것은 세스의 죄가 아닌데. 그냥 실력 좋은 양자 들였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그놈 때문에 내 아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놈은······. 내 딸 마거릿에게 추잡한 짓을 했어!"

"네?"

“마거릿은 너무 어려서 제가 놈에게 무슨 짓을 당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라리사는 놈과 어울리지 말라고 마거릿을 혼낼 수밖에 없었던 거야!"

나는 절로 얼굴이 싹 굶어지는 것을 느꼈다.

라리사 모어, 진짜 넌 곱게 죽을 생각은 버려라. 감히 세스에게 누명을 씌워?

“그분만인 줄 아느냐! 놈은 라리사의 남편을 공격해서 불구로 만들었다! 내 딸의 인생을 완전히 망쳐 놓은 놈을 내가 어떻게 용서 할 수 있단 말이야?"

라리사 인생이야 내가 알바 아니고, 이쯤에서 슬슬 아버님의 입을 다물게 해야 할 것 같다.

”와, 아버님에게 옥장판을 팔았어야 했는데 정말 아깝네요. 그런데 아버님, 그거 아세요?"

흥분해서 얼굴이 벌게진 아버님이 나를 쏘아봤다. 나는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버님이 사기당하신거요. 마탑이랑 신전이랑 라리사, 모조리 한통속인데 모르셨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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