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153화 (153/240)

153화

* * *

케인이 이블린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지금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였다.

아침 일찍 강제로 일어나서 운동하고 규칙적인 식사와 산책을 반복하는 생활.

독서와 음악 감상, 일기 쓰기 외의 일은 전부 건강을 해친다는 이유로 금지 당했다.

하루하루 몸은 좋아졌지만 꼭 사육당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블린이 케인을 방에 가둬도, 강제로 약을 먹여도, 강재로 운동을 시켜도 전부 아버님을 생각하는 며느리의 극진한 마음으로 포장됐다.

“마님께선 정말 효성이 지극하십니다. 아버님을 이렇게 생각해 주는 며느리는 또 없을 겁니다.”

이블린이라면 껌뻑 죽는 시종들은 그녀를 칭송하기에 바빴다. 그에 케인은 혈압이 올라서 죽을 지경이었다.

‘어떤 효부가 시아버지를 두들겨 패고 감금해! 목구멍에 약을 들이붓고, 운동을 시킨답시고 말 뒤에 매달 아서 끌고 다니는 것이 효도냐!'

하지만 자존심 때문에 도저히 며느리에게 학대당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고백한다고 해도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이젠 그냥 이곳에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어떻게 해서 든 내기에서 이겨야 해!'

절박해진 그는 치사한 방법을 썼다. 내기에 자신이 유리한 조건을 덕지덕지 갖다 붙인 것이다.

“나는 오직 사람만을 친구로 인정한다. 동물과의 우정 따위는 친구 관계라고 인정할 수 없다!"

이블린을 따르는 저 수많은 짐승들을 헤아리면 그가 질 것이 뻔했다.

"친구란 대등한 관계여야 하는 법. 가신들은 전부 제외해야 한다. 신분이 낮은 자들도 마찬가지다!"

같은 이유로 프리지어 궁의 사람들도 전부 내기에서 제외시켰다.

그러자 이블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럼 아버님의 친우들은 전부 공작이냐 왕족인가요?“

“흠흠, 대등하다는 것은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 사회적인 지위가 비슷하거나, 또 사업적인 일을 함께하는 파트너라면 대등하다고 할 수 있지.”

케인의 친구들은 모두 사회적으로 자리 잡은 명사들이었다. 신분이 조금 낮은 자들도 공작 가문과 사업적인 관계로 얽혀 있었다.

다시 말해서 케인에게만 유리한 조건이었다. 새파랗게 어린 이블린에게 사회적으로 유명하거나 큰 사업을 하는 친구가 있을 리가 없으니까.

“음, 확실히 친구란 대등한 존재죠.”

바보가 아닌 이상 자선이 불리하다는 것을 알 텐데, 이블린은 생글생글 웃으며 한술을 더 떴다.

“대등하면서 진실해야 하고요. 그러니까 우리 진정한 친구의 수 만세죠?"

"진정한······ 친구?"

"예를 들어서 거지꼴로 찾아가도 박대하지 않고 기꺼이 돈을 빌려주는 친구랄까?"

”뭐?”

뜬금없는 조건에 케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블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아버님, 사람의 마음은 어려울 때 드러나는 법이라 고 했어요. 내가 힘들 때 기꺼이 돈을 빌려주는 친구가 바로 진정한 친구죠.”

“우정을 돈으로 따지다니! 천박하고 속물적이다!"

케인은 돈이라는 말이 세상에서 제일 천하다고 믿는 순수한 귀족이었다. 그 모습에 이블린이 대놓고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진실이죠. 아버님은 힘들 때 돈도 빌려주지 않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하세요?"

"······."

입이 삐뚤어져도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설정 충돌로 삐걱거리는 그를 본 이블린이 픽 웃었다.

“아니면 아버님의 친구들은 돈을 빌려주지 않을 것 같아서 겁나세요?"

”에잇, 누가 겁난다는 거냐!"

이블린의 농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저런 말을 들으니 도저히 물러날 수가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상호 협의하에 계약서를 작성했다.

“그럼 승리 조건은 1골드 이상을 발려주는 친구의 수가 많은 사람. 친구는 선분이나 사회적 지위가 대등하거나 사업 파트너일 것. 동의하시죠?"

"좋다.”

치열한 공방 끝에 거지꼴이라는 조건을 밴 케인은 만족했다. 그는 자선이 이번 내기에서 질 리가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계약서 끝에 둘의 지장까지 야무지게 찍은 이블린이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아버님의 친구분들부터 만나러 갈까요.”

“뭐? 여기로 부르는 게 아니라?"

“아니, 무슨 상납 받아요? 당연히 돈 빌리는 사람이 찾아가야죠.”

직접 찾아가기까지 해야 하다니. 불만스러웠지만, 대등한 관계라고 조건을 건 것이 자신이라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함께 마차를 타고 외출했다. 마차가 제일 먼저 들른 곳은 고급 주택 단지였다.

상류층의 타운 하우스가 모예 있는 이곳은 케인의 친구들이 제일 많이 살고 있는 동네였다. 이블린이 신기해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우와, 저 이런 곳은 처음 와 봐요.”

“이 녀석, 촌스럽게 굴지 마라!"

그가 꾸짖거나 말거나 이블린은 산책 나온 강아지처럼 졸래졸래 돌아다녔다. 창피해진 케인은 그녀를 끌고 서둘러 친구들의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주인어른께선 조금 전에 외출하셨습니다.”

"주인님은 새벽부터 급한 일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큰 어르신께선 아마 클럽에 계실 겁니다.”

“아직 안 들어오셨습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케인은 친구를 단 한 명도 만날 수 없었다.

‘이 시간에 다들 외출을 했다고?'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케인은 조금 당황했다. 이블린이 샐샐 웃으며 그의 약을 올렸다.

“왠지 아버님을 피하는 것 같은데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원래 만나기 싫은 사람이 찾아오면 외출했다는 핑계를 대잖아요.”

“그런 녀석들이 아니다! 이간질하지 마라!"

“흐음, 그럼 외출한 친구분들이 지금 어디 있을지는 대충아세요?"

“······.”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이곳에 찾아온 것도 몇 십 년만이니, 친구들이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깜깜했던 것이다.

“어쩔 수 없네요. 그럼 아버님은 진정한 친구가 하나도 없는 걸로.”

"잠깐!”

이대로 질 수 없었던 케인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사실 그의 절친한 친우들은 따로 있었다.

그들을 끼워 넣지 않아도 당연히 이길 거라 자신했지만 지금은 물불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왕궁으로 가자.”

아직 현역인 친우들은 지금 열심히 일하고 있을 터였다. 이런 모습으로 만나고 싶진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네, 좋아요. 왕궁의 친구분들은 외출하지 않을 테니까요.”

"······."

케인이 제일 먼저 찾은 친구는 외교부의 수장인 레너드였다. 넉살 좋은 중년이 된 레너드는 갑자기 찾아 온 케인을 뛸 듯이 반겨 주었다.

“이 친구야! 난 자네가 정말 죽은 줄 알았네!"

속으로 조마조마해하던 케인은 친구의 포옹에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그래서 그는 레너드가 이블린과 눈짓을 주고받는 장면을 놓치고 말았다.

“다행히 건강해 보이는군. 하지만 예전의 미모는 사라져 버렸어. 우리 중 최고 미남인 자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뭐, 그럭저럭…….”

케인은 말끝을 흐렸다. 오랜만에 본 친구는 여전히 당당하고 멋진 모습이었다. 연륜이 가져다준 노련한 모습까지 돋보였다.

새벽부터 새 옷으로 차려입고 부산을 떤 결과라는 것을 모르는 케인은 자신이 조금씩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자네는 여전히 사교성이 없군. 그런데 무슨 일로 여기까지 어려운 걸음을 했나?"

“그게, 다름이 아니라…….”

돈 빌려 달라는 민망한 소리를 하긴 싫었지만, 내기를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케인이 막 운을 떼는 순간, 다급한 노크 소리와 함께 벌컥 문이 열렸다.

“각하, 죄송합니다. 나바르 왕국에서 온 급보입니다.”

“지금 손님들이 계신 것 안 보이나!"

“죄송합니다. 하지면 정말 급한 일이라……."

보좌관으로 보이는 이가 허리를 연달아 접으며 사정했다. 눈살을 찌푸린 레너드가 무어라 하려던 때였다. 급하게 달려온 또 다른 이가 소리쳤다.

"각하! 로엔 공국에서 공식적인 항의 서한을 보냈다고 합니다. 지금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으니 둘 다 나가 봐라!"

“하지만 정말 급한…….”

“어허, 됐으니까 나가래도!"

레너드는 사정없이 그들을 쫓아냈다. 다급한 표정의 관리들이 나간 뒤에야 그는 찌푸린 표정을 펴고 활짝 웃었다.

“이거 귀한손님이 오셨는데, 차도 내놓지 않고 있었군. 잠깐만 기다리게.”

"바, 바쁜 것 아닌가?"

“바쁜 거야 항상 그렇지 뭐. 선경 쓰지 말게.”

하지만 허허 웃는 레너드에게 항의하듯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케인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 들었다.

“아, 참 아까 무슨 말을 하려고 하지 않았나?"

바쁜 와중에도 그를 위해 시간을 내주는 친구를 보자 도저히 돈 좀 빌려 달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냥…… 잘 지내는지 궁금해서 와 봤네.”

결국 케인은 차만 마시고 허둥지둥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고양이처럼 그를 따라붙은 이블린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가뜩이나 친구도 적으신 분이 저기서 안 빌리셔도 되겠어요?"

"누가 친구가 적다는 거냐!"

버럭 소리를 지른 그는 성큼성큼 외궁으로 향했다. 그곳엔 왕궁 보안 관리관을 맡고 있는 버티가 있었다.

신입 기시들의 훈련을 감독하던 버티는 갑자기 찾아 온 친구를 따뜻하게 환영해 주었다.

‘이번에는 꼭 돈을 빌려야 해!'

케인은 일부러 번쩍이는 친구의 갑옷과 당당한 자세를 쳐다보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돈 좀 빌려 달라고 부탁하자, 버티는 자신의 돈주머니를 그대로 건네 줬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힘내게.”

다정히 어깨를 두드려 주는 친구의 손에 순간 무릎이 꺾일 뻔했다. 가장 비참한 사질은 이제 겨우 친구 1명을 채웠다는 것이었다. 케인은 애써 자신을 다독거렸다.

‘한번 해 봤으니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

하지만 그다음의 친구들은 더 쉽지 않았다.

재무부에서 일하는 노리스는 차용증까지 쓴 뒤에야 약간의 돈을 빌려줬고, 수석 재판관인 빌러드는 친구끼리는 돈거래를 하는 게 아니라며 딱 잘라 거절했다.

갑자기 인생의 쓴맛을 보게 된 케인은 완전히 파김치가 되었다. 넋이 나가 버린 그를 본 이블린이 배시시 웃었다.

"저런, 아버님의 진정한 친구는 딱 2명이었네요. 그럼 이제 제 차례죠?"

그녀는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내궁의 안쪽, 과거 ‘봄의 방’이라고 불리던 곳의 문을 벌적 연 이블린이 안으로 들어갔다.

휴게실처럼 꾸며진 방 안에서 카드놀이를 즐기던 중년의 남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쳐다봤다.

낯익은 얼굴들이 잔득 모여 있는 것을 본 케인은 멍하게 입을 벌렸다. 전부 그가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이었다.

“너, 너희는!"

“자, 투자 설명서는 다들 읽어 보셨죠? 새로운 제 사업에 투자하고 싶으신 분?"

이블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들은 품속에서 커다란 돈주머니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사교 클럽을 운영하는 부르스가 미안한 얼굴로 케인을 바라봤다.

“그렇게 됐다.”

케인은 깨달았다. 사업 투자 역시 ‘돈을 벌리는’ 일이 라는 것과 친구들이 자산을 배신하고 이블린에게 붙었다는 사실을.

케인이 얼얼한 뒤통수에 손을 올리는 순간, 그의 팔을 살며시 붙잡은 이블린이 눈을 휘며 웃었다.

“아버님, 좋은 친구들을 물려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억 소리를 낸 케인은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