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왕궁에선 이미 내가 범인이라고 확정 지온 것 같았다. 지금은 고양이들을 나한테 보낼지 말지 의논 중이란다.
"네? 제 의사도 안 물어보고요?"
“그리핀들이 아가씨를 주인으로 선택했으니까요. 굳이 왕궁에 먼저 간 건 아가씨의 부담을 줄여 주기 위해서라더군요.”
아니, 내가 언제 고양이 놈들의 집사가된 거지?
무엇보다 녀석들에겐 공국이라는 주인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었다.
“그냥 공국으로 돌려보내는 게 맞지 않을까요?"
“그리핀은 뛰어난 전략 병기이자 보물입니다.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무조건 받아들여야죠.”
왕도 귀족들도 그리핀을 돌려보낼 생각은 없다는 소리였다. 공국과 사이가 나빠지는 것을 감수할 만큼 고양이들이 귀하다는 뜻도 되고.
“하지만 개들 엄청 많이 먹는다고요.”
“그, 그렇죠. 그래도 그 정도는 공작 가문에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잖습니까?"
그게 내 돈이 아니라 세스 돈이니까 문제지. 게다가 더 이상의 군식구를 늘리는 건 좀 곤란하다고.
복실이와 까미, 흑룡에 이어서 코크 곰에 정령수에 성냥이까지 전부 내가 데려온 애들이다.
여기에 한두 마리도 아니고 수십 마리의 고양이들을 더하는 것은 좀 눈치가 보였다.
“무엇보다 그런 보물을 공작 가문에서 독차지하면 엄청 시끄러울 것 같은데요.”
왕이야 세스를 자기 후계자로 삼을 생각이니 상관없을 것이다. 하지만 귀족들은 도시락까지 싸들고 다니면서 반대할 것 같았다.
“아가씨의 말씀이 맞지만 그냥 그리핀을 인수할 준비를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예? 왜요?"
"왕궁에선 도저히 감당이 안 됩니다. 며 칠만 더 지나면 왕궁 전체가 쑥대밭이 될 것 같습니다. 반대파들도 거기에 대해선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고요.”
날고양이 녀석들은 지금 닥치는 대로 왕궁을 헤집고 다니며 먹고 싸고 부수는 중이었다. 그것 때문에 왕궁 이 반쯤마비 상태란다.
그래서 나한테 고양이들을 맡기는 쪽으로 의견이 모이고 있단다. 와. 귀족들 인성 좀 보소.
“우리 집은 쑥대밭이 되어도 된단 말이에요?"
“음, 왠지 아가씨의 말은 잘 들을 것 같아서요. 저만 그런 게 아니라 다들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개들은 고양이라고요. 고양이.”
고양이가 주인 말 듣는 거 봤냐. 내 투덜거림에 핀이 머쓱하게 웃었다.
나는 그에게 따질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한 숨을 쉬었다.
"알려 줘서 고마워요. 임시 보호를 대비해야겠네요.”
시녀장에게 또 뭐라고 말해야 할지 걱정이었다. 시무룩해진 나를 보고 핀이 작게 헛기침을 했다.
"저, 사실 중요한 이야기가 하나 더 남았습니다."
"네?"
“전에도 한 번 언급했었던 일입니다.”
핀은 품속에서 작은 수첩 하나를 꺼내서 내 밀었다.
"예전에 어떤 목걸이엔 저주가 걸려 있던 일이 있었잖습니까. 그걸 제가 조사하겠다고 말씀드렸지요. 기억나십니까?“
"네, 기억나요.”
누군가가 다이애나의 친척을 사칭해서 저주받은 목걸이를 보냈는데, 내가 그걸 만지는 순간 저주가 나방과 도마뱀으로 변신했다.
하지만 저주를 받았다는 사실을 밝히면 다이애나의 명예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그래서 핀이 나방의 사체를 가져가서 혼자 조사해 보겠다고 했다.
“아, 그럼 결혼식 날에 말한 ‘부탁한 알’이 바로 이거였군요.”
“그 자리에서 저주니 뭐니 같은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어서요.”
"혹시 결과가 나왔나요?“
"예,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게요.”
처음 핀은 마탑의 지인을 통해 주술사를 추적했다.
나방은 그 자리에서 축었지만 도망친 도마뱀은 자신을 만든 이에게 돌아갔을 터였다. 그래서 심하게 다쳤거나 죽은자를 찾으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패했습니다. 지인의 말로는 위쪽에서 조 서를 막고 있다고 하더군요.”
위험을 감지한 핀은 마탑이 아니라 다른 통로로 조사를 시작했다. 바로 대지의 신전이었다.
“대지의 신전은 저주술사를 꺼리는 만큼 협조를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가로막혔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서 핀을 바라봤다.
“우와, 핀! 진짜 발이 넓네요.”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상대가 마탑과 선전 모두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상황이 위험하다는 것을 느낀 핀은 조사를 중단했다. 그런데 최근에 우연히 저주를 실행한 주술사의 위치는 물론, 사주한 이의 정보까지 손에 넣게 되었다.
“주술사의 이름은 맨드릭, 그쪽에선 제법 유명한 저 주술사더군요. 지금은 모든 힘을 잃고 닉스탑에 갇혀 있습니다."
핀의 수첩에는 맨드릭의 증언과 그가 저지른 범죄가 상세히 적혀 있었다. 나는 거기에서 다이애나에게 목걸이를 보낸 범인을 찾을 수 있었다.
‘라리사 모어, 지금의 클라멘스 백작 부인.’
아주 놀랍지는 않았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여자니까.
내가 아니라 다이애나를 공격했기 때문에 바로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다.
“저는 이 정보가 함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갑작스럽게, 그리고 부자연스럽게 제게 알려졌어요.”
핀은 석연찮은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그가 똑똑하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함정은 아닐 거예요 . 마음이 바뀐 것뿐이죠.”
“네?"
마탑과 신전 모두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존재는 분명 흑막일 것이다. 하지만 이건 흑막이 저지르기엔 너무 스케일이 작았다.
아마 라리사 모어가 저지른 일올 지금껏 흑막이 감추어 주고 있었던 거겠지. 그걸 갑자기 이렇게 우리 앞 에 드러냈다는 것은…….
“자기가 쓸 만큼 썼으니 남이 처리해 주길 바라는 모양이네요."
라리사 모어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서 버려진 것이다.
어쩌면 라리사 모어가 최후의 발악을 하면서 우리를 물어뜯길 바라는 것일 수도 있고.
하지만 나는 흑막의 뜻대로 움직일 생각이 개미 눈곱만큼도 없었다. 대신 그가 준 정보를 알차게 써먹기로 했다.
“핀 정말 고마워요. 안 그래도 새로운 사업 아이템이 없나 고민했거든요.”
"예? 갑자기 사업이요?"
"네, 그때 그 목걸이요. 그대로 넘어가기엔 너무 아까웠거든요.“
다이애나의 목걸이는 저주뿐만 아니라 신성력도 담을 수 있었다. 애초에 왜 이런 목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신성력으로 반짝거리는 주얼리. 이건 반드시 된다.'
흑막께선 그런 귀한 인재를 나한데 산 채로 배송해 주셨다. 이것은 열심히 보석을 팔아서 애들의 사료 값을 대라는 친절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우리 공돌이님이 닉스탑에 갇혀 있다고요?"
당장 꺼내서 자본이 낳은 괴물이 뭔지 가르쳐 줘야겠다.
내가 히죽거리며 웃자 핀이 무척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저 , 아가씨 그자는 몹시 흉악한 술사로 가까이 해서 좋을 게 없습니다.”
“핀, 세상에 노동법이 없는 사업자보다 더 흉악한 것은 없어요.”
갱생 펀치를 먹일 생각은 아니지만, 자연히 그렇게 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드는군. 억울하면 죄를 짓고 살지 말자.
“그런데 저 이미 결혼했는데도 계속 아가씨라고 부르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요?"
“아, 죄송합니다. 공작 부인."
“그냥 이블린이라고 불러 주세요. 저도 핀을 이름으로 부르잖아요.”
그러자 복실이를 주물럭거리던 이들도 힐끔힐끔 내 쪽을 바라봤다. 은근히 기대하는 눈빛에 나는 작게 웃었다.
“다른 사람들도요. 이제 서로를 이름으로 불러도 되지 않을까요? 친구잖아요?"
“저, 정말 그래도 될까요?"
앤과 벨라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고개를 끄덕여 주자 얼굴이 확 밝아지는 모습이 무척 기쁜 것 같았다.
“뭐, 이블린 당신은 날 마리아라고 부른 지 오래됐죠.”
마리아는 새침하게 동의를 표했다. 그동안 나를 이름으로 불렀던 다이애나는 약간 서운한 듯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웃고 있었다. 그리고 카밀라는 은근슬쩍 선을 넘었다.
“이블린, 그럼 나도 말 놓으면 안 돼? 우리 친구잖아?"
"응, 안 돼. 돌아가."
“치, 나한테만 그래.”
분위기가 한결 좋아진 것을 느낀 나는 내 친구이자 동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 여러분들을 초대한 것은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예요.”
"네? 부탁이요?"
다이애나는 몹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부탁이기에 이렇게 초대까지 하느냐는 얼굴이었다. 나는 침착하게 그들에게 종이를 나눠 줬다.
종이에 쓰인 이름을 본이들이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어, 이분은…….”
“모두 제 시아버님과 친한 친우분들이에요.”
우리 귀여운 아버님은 태어날 때부터 공작 가문의 아들이었다. 그래서 연줄과 먼 핏줄로 맺어진 든든한 친구들이 꽤 있었다.
아버님이 무슨 멍멍이 짓을 해도, 쌍욕을 하면서도 기어코 편을 들어 줄 사람들.
그리고 내 목적은 그들을 미리 만나 보는 것이었다.
“전 연줄이 없어서 소개를 받을 수가 없거든요. 어떻게든 이분들과 연결을 써 줬으면 좋겠어요. 딱 한 번만 만날 수 있으면 돼요."
마리아가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이블린, 또 무슨 짓을 꾸미는 거죠?"
“효도. 다시없을 정도로 뜨거운.”
진심으로 답했는데 마리아는 무슨 재미난 농담을 들은 것처럼 웃었다.
"좋아요, 도와주죠. 대신 이번 일이 끝나면 당신도 나를 한번 도와줘야 해요.”
"콜!"
발 넓기로 유명한 해밀턴 가문의 다이애나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전 아버지께 부탁을 드려 볼게요. 대신 이블린, 우리 집에도 놀러 와 줄래요?"
"물론이죠!"
“이블린, 나 반말 쓰게 해 주면 도와줄게!"
"응, 안 돼 돌아가"
그리고 카밀라를 뺀 다른 사람들도 감자의 부탁을 내걸고 만남을 주선해 주기로 약속했다.
이렇게 해서 아버님을 붙잡을 덫이 차근차근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건 아버님께 절대적으로 유리한 내기거든요.”
"설마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이 나라에서 살아온 아버님께서 저보다 친구가 적은 건 아니시겠죠? 어때요?"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할 때의 나는 이미 아버님의 친구를 모두 만난 상태였다는 뜻이다.
미리 말했다. 이 내기에는 함정이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