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 * *
트리스탄 엘마이어.
세스의 숙부이자 내가 불태운 초상화의 주인.
이번 일에 대해 조사하기로 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이었다. ‘그 양반의 초상화를 일부러 걸어 둔 것만 봐도 관련이 있다는 소리지.’
그때는 세스를 괴롭히기 위해 털색이 비슷하고 비참한 끝을 맞은 사람의 초상화를 붙여 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재 보니 뭔가 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라리사 모어의 아버지라는 소문도 있고, 비밀 통로에 대한 기록을 남겼을 가능성도 있다고 했지.'
아서가 준 단서에 의하면 꼭 한번 파 봐야 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내게 그럴 방법이 없다는 거였다.
이곳에는 정보의 바다인 인터넷이 없으니까. 뭔가를 알고 싶으면 열심히 발품을 팔아야 했다.
‘소설이나 영화에선 정보 길드 가서 돈 좀 쥐여 주면 구글 뺨치게 검색해서 가르쳐 주던데.’
하지면 여기 있는 길드는 포도주 길드, 자물쇠 길드처럼 아주 소박한 종류뿐이었다. 전국의 정보를 쥐고 흔드는 암혹의 지배자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주변에 물어 가며 정보를 모으기로 했다.
"토리스탄 엘마이어요?"
몇 번의 허탕 끝에 실마리를 잡았다. 혹시나 해서 찔러 본 시녀장이 난처한 표정을 지은 것이다. 이것은 뭔가 아는 자의 반응이로구나!
"네, 그 사람이 공작님의 친부라고 오해받을 일이 있었나요?“
“아니, 그게 무슨! 절대 아닙니다!"
대놓고 물어보자 시녀장이 기겁하며 펄쩍 뛰었다. 나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제가 오해하는 게 아니라 아버님이 헛짓거리를 하고 계신 것 같아서요. 그럴 이유가 있나 궁금했어요."
“큰 주인님께서 말입니까?"
충격 받은 표정으로 변한시녀장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한참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이건 정말 헛소문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네, 뭐라도 좋으니 말해 주세요.”
시녀장은 정말 괴로운 얼굴로 털어놓았다.
트리스탄 엘마이어가 반란에 실패해서 처형당했을 때 세스의 어머니인 캐서린 공주를 걸고넘어졌다고.
"공주 전하께 추잡한 짓을 저질렀다고, 전하께서 그걸 남편에게 감췄다고 조롱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미친놈인가?"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시녀장은 점잖게 표현했지만 그 쓰레기는 좀 더 적나라하게 지껄였을 것 이다.
“세스가 태어나기 전에 일어난 일이에요?"
"당시 공주 전하의 복중에 계셨습니다.”
”와."
그러니까 임산부에게 오명을 씌웠다는 소리였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머리가 다 얼얼해졌다.
"화형 시켰죠? 제발 그놈을 화형 시켰다고 해 주세요.”
일백 번 고쳐 죽이고 다시 고쳐 죽일 놈이었다. 시녀장도 그놈의 뼈를 갈아 마시지 못해 안타까운 듯했다.
“설마 아버님은 그걸 믿고 공작님의 출생을 의심하시는 걸까요?”
"절대 아닙니다. 공주 전하께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부정하셨습니다. 무엇보다 트리스탄이 감히 전하께 접근할 방법은 전혀 없었습니다."
카스티야 왕족은 암살에 무척 예민해서 캐서린 공주 역시 경호하는 사람들을 온몸에 둘둘 말고 다녔단다.
단순한 망나니 도련님에 불과한 트리스탄이 그 방어막을 뚫을 재주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럼 ‘트리스탄은 공격했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로 끝났나요?"
“그게······."
놀랍게도 트리스탄의 말도 안 되는 개소리에 동조하며 공주에게 해명을 요구하는 자들이 많았단다. 아무래도 카스티야의 공주가 안주인인 게 못마땅한 사람들 이 있었던 모양이다.
‘완전히 마리 앙투아네트 같은 상황이잖아?'
사이 나쁜 나라에 시집가서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누명까지 썼던 왕비가 생각났다.
“하지만 공주 전하의 시녀인 앨리스 모어가 해명에 나서면서 상황이 반전됐습니다."
앨리스 모어는 어릴 때부터 캐서린 공주와 함께 자란 시녀였다. 공주와 외모가 비슷해 위험한 일의 대역을 맡기도 했고, 시집가는 공주를 따라 아스트리아로 건너올 정도로 충성심도 깊었다.
"그녀는 술에 취한 트리스탄이 자신을 공주 전하로 착각해서 추악한 짓을 저질렀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녀의 남편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증언했고요.”
그리고 트리스탄이 증언한 날짜와 앨리스모어의 행적이 겹치면서 증언이 사설이라는 게 밝혀졌다.
결국 트리스탄은 공주의 명예를 추락시키려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처형당했다.
캐서린 공주는 자신을 위해 진실을 밝힌 앨리스 모어에게 무척 감사했다. 원래도 사이가 좋았지만 그 뒤에는 친자매나 다름없이 지냈던 모양이다.
그 후 둘은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출산했고 앨리스 모어는 세스의 유모가 되었단다.
“엘리스가 그때 낳은 아이가 라리사 모어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라리사 모어가 트리스탄의 자식이라는 소문이 났던 거다. 나는 피해자 앞에서 그런 말을 떠들어 댈 수 있는 사람들의 잔인함에 오싹해졌다.
“이 야기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혹시라도 마님께서 오해하시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공작님께선 분명 큰 어르신의 자식입니다."
“그건 누구보다 제가 더 잘 알죠.”
흑막님의 리트머스 용지에 걸러진 순수 혈통이니까.
‘어디 보자, 단서는 거의 다 모아진 것 같군.'
추잡한 짓을 저지르고 축은 트리스탄.
그와 털색이 비슷한 세스.
그의 자식이라고 오해받은 라리사 모어.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두 아이.
이다음은 막장 드라마를 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꿰어 맞출 수 있는 그림이었다. 이제 마지막 단 한 조각, 흑막의 역할만 남았다.
‘어떻게 라리사 모어에게 정당성을 줬지?'
아무래도 이건 우리 귀여운 아버님의 입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거 놔라! 놔!"
나는 시종들에게 붙잡혀 무릎 꿇은 아버님을 지그시 바라봤다.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모습이 꼭 목욕을 거부하는 고양이 같았다.
“아버님, 포기하세요. 이제 도망칠 곳은 없으니까요.”
“나, 나한데 무슨 짓을 하려고!"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손에 든 하얀 그릇을 들어 올렸다. 특별히 진하게 우려낸 약이 새까맣게 출렁거렸다.
“몸에도 좋고 맛도 좋은 사약입니다. 자, 아~"
“이 못된 것 날 독살하려고······읍읍!"
“약이 들어간다, 쭉쭉쭉쭉!"
나는 희빈 장씨에게 사약을 먹이는 궁녀의 마음으로 약을 들이부었다. 코를 움켜쥐자 꼴깍꼴깍 잘도 넘어 갔지만 자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절반은 흘렀다.
괜찮다 왜냐하면 두 번째 그릇이 있기 때문이다.
“켁, 그만! 웁!"
“아버님, 드시다 보니 맛있죠?"
아마 둘이 먹다가 셋이 죽어도 모를 맛일 것이다.
먹다가 축 늘어진 아버님의 입에 레몬 사탕을 쑤셔 넣는 것으로 오늘의 보약 먹이기가 끝났다.
"아버님의 옷이 많이 젖었네 갈아입혀 드려야겠어.”
"예 마님.”
시종들은 공손한 태도로 아버님을 들고 갔다.
그들에게 나는 어린애처럼 약을 먹기 싫어하는 철없는 아버님에게 효도하는 착한 며느리였다.
아버님은 시종들을 번거롭게 만들고, 떼를 쓰며, 매 번 마님을 불러오게 만드는 나쁜 사람이고 말이다.
들리나요, 아버님의 이미지가 하락하는 소리가?
잠시 후, 깨끗이 씻기고 갈아입혀진 아버님이 벽난로 앞에 앉혀졌다. 나는 초점 없는 눈으로 벽난로만 바라보는 아버님에게 담요를 덮어 드렸다.
“어때요, 아버님? 기운이 좀 나세요?"
"으으······."
"좋은 재료를 듬뿍 넣었거든요. 앞으로 매일매일 아침저녁마다 먹기~!"
아, 나는 왜 이렇게 효성스러운 며느리란 말인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감격할 것 같았다.
“너는, 넌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 내가 뭘 잘못 했다고!"
”······네?"
정말 억울해 보이는 아버님의 모습에 나는 의아해졌다. 처음에만 좀 구박했지, 요즘은 매일매일 잘 먹이고 잘 돌보고 있는데? 대체 뭐가 문제지?
"왜죠? 뭔가 불편하신 점이라도 있으세요?"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햇빛과 바람 중에 햇빛 정책을 쓰고 있습니다만.
"흐극흑흑······."
갑자기 얼굴을 움켜쥔 아버님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저런, 불쌍하고 딱하기도 하지.
“그렇게 우시기만 하면 뭐가 불편하신지 제가 어떻게 아나요?"
"난 여기서 나가겠다! 여길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마!"
역시 우리 아버님은 가출을 꿈꾸는 집냥이인 모양이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응, 안 돼 못 내보내 줘.
“아버님, 아버님은 모르시겠지만 밖에는 나쁜 사람 들이 정말 많아요. 저는 효성스러운 며느리로서 아버님을 내보낼 수가 없답니다.”
처음에는 쫓아낼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계획이 바뀌었거든 그가 모든 진실을 알고 반성할 때까지 해방시켜 주지 않을 생각이다.
“혹시 프리지어 궁 밖을 맴도는 불량스러운 친구들이 구해 줄 거라 믿고 기다리시는 건 아니죠?"
”······뭐?"
“자꾸 아버님에게 나쁜 짓을 하라고 부추기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서요. 그런 못된 사람들은 이 며느리가 처리했으니 한심하세요.”
내가 바보도 아니고 그걸 내버려 둘 리가 있나.
첫날에 흑룡과 까미를 동원해 싹싹 긁어 넣은 지 오래다. 덕분에 지하 감옥이 아주 꽉 찼다.
”으아아아!"
생글생글 웃는 나를 보고 충격 받은 표정을 지은 아버님이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나는 파우스트를 걱정하는 메피스토처럼 그의 등을 토닥였다.
“아버님, 정 그렇게 괴로우시면 우리 내기나 하나 할까요?“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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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한번 모든 것을 걸고 싸워 보죠.”
아버님의 눈이 무슨 속셈이 나는 듯이 데굴데굴 굴러 다녔다. 여기선 좀 더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걸어야겠지.
“아버님이 이기시면 전 아버님과 친구들을 아무런 조건 없이 풀어 드릴게요."
"······."
“대신 제가 이기면 묻는 말에 숨김없이 대답해 주시는 거예요. 어때요?"
아버님은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무엇을 궁금해 하는지 이미 알고 있으니까.
나는 씩 웃으며 그를 부추겼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건 아버님께 절대적으로 유리한 내기거든요.”
이름하여 ‘누가 누가 더 친구가 많나!'
나는 뜬금없는 내기 내용에 눈을 동그랗게 뜬 아버님을 도발했다.
“설마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이 나라에서 살아온 아버님께서 저보다 친구가 적은 건 아니시겠죠? 어때요?"
미리 말해 둔다. 이 내기에는 함정이 있다.
”……좋다! 그렇게 하지!"
그리고 아버님은 훌륭하게 미끼를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