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 * *
나바르 왕국의 국경, 말락 요새.
절반은 사막, 절반은 황무지인 이곳은 사람의 발길 이 잘 닿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국경 분쟁을 마무리 짓기 위해 아스트리아의 사절단이 도착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활짝 열린 요새의 문 앞에 질서정연하게 선 사막의 전사들이 곧 도착할 사절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준비해라."
그리고 요새에서 멀리 떨어진 바위 언덕에 사절단을 기다리는 또 다른 무리가 숨어 있었다.
“사절단이 요새에 도착하기 전에 습격해 처리해야 한다. 그것만이 가증스러운 아스트리아 놈들에게서 나라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들은 폐위된 나바르 왕을 따르는 자들이었다.
대부분의 신하들은 죽은 태자가 부활한 기적 앞에 무릎을 꿇었다.
반면 여기 모인 이들은 태지를· 따를 수 없는 이유가 있거나, 처음부터 왕을 위해 키워진 전시들이었다.
그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바르와 아스트리아의 협상을 막으려 했다.
절박함에 눈이 먼 그들은 이런 상황 자체가 흑막의 의도라는 사실을 몰랐다. 하지만 알았다고 해도 다른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이윽고 그들의 목표인 사절단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일렬로 길게 늘어선 모습을 보니 습격을 당한다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습격자들의 우두머리가 검을 뽑아 들고 외쳤다.
“모두 지옥에서 만나자!"
뒤따라 검을 뽑아 든 이들이 우두머리를 따라 바위 언덕을 달려 내려갔다. 뒤늦게 습격을 알아챈 사절단의 행렬이 멈췄다.
“이미 늦었다! 죽어라!"
광소를 터트리던 우두머리는 갑자기 눈앞의 목표물 이 사라지자 흠칫했다. 놀라울 정도로 높이 뛰어오른 목표가 둘러쓰고 있던 로브를 벗어 던졌다.
인간과 다른 이종족, 아름다운 요정 같은 모습이 드러났다. 환희에 들뜬 그레이가 소리쳤다.
“제물!”
다음 순간, 우두머리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그것을 치켜든 그레이가 기쁨에 들떠서 외쳤다.
“오오. 위대한 분이시여! 보소서! 당신을 위해 바치는 제물이옵니다!"
지상에 내려온 신, 정령수의 수호자.
위폐하신 분은 세계수에게 버려진 그레이 일족에게 구원이자 빛이었다.
“정령수를 지키지 못한 죄로 버림받은 우리가 용서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 위대한 분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라! 너의 몸과 영혼을 바쳐라! 적의 피와 살을 바쳐라!"
장로 메티스는 더 많은 제물을 바칠수록 그분의 가까이에 설 수 있다고 말했다. 정령수를 지키며 위대한 분을 모실 수 있다는 사실은 그레이들을 광기로 몰아넣었다.
“나를 보소서! 당신을 위해 이 피를 바칩니다!"
“위대한 분을 위한 제물이 되어라!”
행렬의 곳곳에서 뛰쳐나온 그레이들이 습격자들에게 달라붙었다. 미쳐 날뛰는 그들과 마주한 습격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아악! 살려 줘!"
순식간에 마법과 검에 난자당한 습격자들이 쓰러졌다. 죽사한 자들은 그나마 상황이 나은 편이었다.
“내 거야! 손대지 마!"
“먼저 죽이는 놈이 임자지!"
아직 제물을 손에 넣지 못한 그레이들은 남은 습격 자들을 붙잡고 몸싸움을· 벌였다. 피가 튀고 살이 날아다니는 광경을 견디다 못한 사절단이 토하기 시작했다.
이는 사절단의 책임자인 존 워릭 백작 또한 마찬가 지였다.
원래 나바르 왕국과의 외교를 맡고 있었던 그는 원하지 않게 이번 협상의 책임을 짊어지게 되었다. 새파랗게 어린 외교관에게는 너무나 막중한 임무였다.
‘아니, 엘마이어 공작이 있는데 왜 내가?!’
그는 하루하루 눈치를 보며 빌빌거릴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암살자들과 그들을 찢어발기는 그레이들이 백작을 더욱 힘들게 했다.
"저, 전하! 어떻게 좀 해 주십시오! 우욱, 우웩!"
끔찍한 광경을 참다못한 백작은 세스에게 애원했다.
맹수우리에 토끼를 던져 넣어도 이보다는 목가적일 것 같았다. 눈도 뜨지 못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세스가 입을 열었다.
"거기서 조금 물러서는 게 좋겠군.”
“예?”
다음 순간, 백작의 그림자에서 시커먼 것이 솟구쳤다.
“으아악!”
기겁하며 나동그라지는 백작과 달리 세스는 침착하게 보이지 않는 검을 내질렀다.
가슴이 꿰뚫린 암살자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리고 동료의 시체에 몸을 숨긴 또 다른 암살자가 튀어 나와 세스의 옆구리를 노렸다.
‘뻔한 수작을…….’
두 번째 공격을 예상하고 있던 세스가 그를 쳐내려는 순간이었다. 피 묻은 손이 덥석 암살자의 머리를 붙잡았다.
"여기도 제물이 있다!"
“우와악! 와악!”
괴성을 지르며 달려온 그레이들이 발버둥 치는 암살자를 움켜잡았다. 일부는 땅을 파서 또 다른 암살자를 꺼내려고 했다.
세스는 간신히 그들의 틈바구니에서 몸을 빼냈다.
습격자들은 미끼였고, 모래 속에 숨어 있던 암살자들이 흑막의 진짜 패였다.
하지만 흑막도 미쳐 날뛰는 광신도들이 세스의 옆에 붙어 있을 줄은 미처 몰랐으리라.
우왕좌왕하던 암살자들이 달아나는 것이 느껴졌다.
뒤틀리고 왜곡된 힘이 주변에서 사라지는 것을 느낀 세스가 긴 한숨을 쉬었다. 묘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모리스가 말했다.
“벌써 목적지 앞이라니, 믿어지지 않는군요. 이번처럼 편한 외유는 처음입니다."
아스트리아에 있을 때는 그나마 나았지만` 국경만 나가면 암살자들이 시도 때도 없이 덮쳐 왔다.
음식에는 독이 들어 있었고, 웃으며 이야기하던 현 지인들이 갑자기 돌변하는 일도 예사였다. 그로 인해 세스를 수행하는 그림자 기사들 역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이블린이 보급한 눈물 해독제를 한 방울만 떨어뜨리면, 먹고 마시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암살자들 역시 이블린이 풀어 놓은 미친개들이 알아서 처리했다.
그림자 기사들은 역시 공작 부인이라며, 매일매일 감격하고 있었다. 모리스 역시 이블린의 능력을 인정 할 수밖에 없었다.
“사. 살려 줘!"
그때, 그레이들의 틈바구니에서 워릭 백작이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엉망이 된 그가 다시 웩웩 토하며 흐느꼈다.
”으으, 싫어. 집에 가고 싶어.”
“백탑주, 씻겨라.”
미쳐 날뛰는 일족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침착하게 서 있던 백탑주가 말없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서 흘러나온 마법이 백작을 깨끗이 씻겼다. 하지만 백작은 도리질 치며 바닥을 기었다.
”싫어, 싫습니다. 저 퇴직하겠습니다. 집에 갈래요."
“백작, 한 시간만 더 가면 목적지다. 이제 더 이상 습격은 없을 거야. 어서 일어나라.”
"저번에도 이번 습격이 마지막이라고 하셨잖습니까! 어헝, 허어어엉!"
백작은 체면도 팽개치고 황소처럼 울었다.
하지만 세스는 그의 사정을 봐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협상의 책임자는 모든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남아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세스에겐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할 사정이 있었다.
세스는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품속에서 희미하게 바스락거리는 편지가 느껴졌다.
[공작님 . 저 연애편지는 처음 써 봐요!
전쟁터로 간 남편에겐 뭐라고 인사를 해야 하죠?
잘 지냈는지 물어볼 수는 없잖아요.
저는 세스가 없어서 쓸쓸한 것만 빼면 잘 지내고 있답니다. 게다가 굉장히 굉장히 바쁘게 살고 있어요.
저도 몰랐는데, 재가 그동안 미루어 둔 일이 꽤 많았던 모양이에요. 이런저런 손님들이 찾아와서 ‘아직도 안 했어?'라고 묻는 통에 정신이 없답니다.
참, 아버님도 집에 찾아오셨어요. 제가 본 아버님은 좀 새침한 고양이 같아요. 모든 일이 시시하다는 얼굴로 벽난로 앞에 앉아 있는 걸 좋아하시거든요.
그러면서 곁눈질로 힐끔힐끔 저를 살피시죠. 옆에서 보면 이런 모습이에요.
(엉성한그림)
봐요, 털이 듬성듬성 빠진 커다란 고양이 같죠?
그래서 저는 아주 점잖게 아버님을 돌봐 드리고 있답니다. 켄트 박사님이 아마씨 오일이 좋다기에 아버님께 먹여 드렸는데, 썩 좋아하시진 않았어요.
깔때기를 입에 꽂은 게 별로 마음에 안 드시는 모양이에요. 내가 거위인 줄 아냐고 꽥꽥 소리를 지르셨거든요.
하지만 어떻게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살겠어요. 그렇죠? 저도 세스를 전쟁터로 보내고 싶지 않았는걸요.
복실이는 아주 조금 컸어요. 2mm 정도인데, 사실 겨울털이 찐 것 같아요. 그런데 복실이가 너무 기뻐해서 사실을 말할 수가 없었어요.
봄이 와서 털이 빠지면 뭐라고 해야 할지 걱정이에요. 지금부터 같이 생각해 줘요. 전 정말 생각이 안 나거든요.
그리고 또…….
할 말이 많았는데 막상 쓰려니까 생각이 안 나네요. 이건 재 머릿속에 세스가 보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 들어 있기 때문이에요.
세스, 정말 보고 싶어요. 언재 올 수 있어요?
눈물 자국 없는 편지를 쓰는 것에 드디어 성공한 이블린이]
몇 번이나 반복해서 편지를 읽은 세스는 이제 내용을 죄다 외울 정도였다.
가장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그의 아버지인 케인 엘마이어가 이블린과 함께 있다는 점이었다.
그림자 기사들의 보고에 따르면, 케인은 이블린 앞에서 꼼짝도 못 한다고 했다. 이블린에게 해코지를 하기는 커녕 그녀를 피해 탈출을 시도하려다 외려 붙잡혀 온 모양이었다.
그림자 기사들은 ‘천적’이라는 말을 쓰며 이블린을 칭송했지만, 세스는 그것조차 마음에 걸렸다. 하루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 이블린이 괜찮은지 확인하고 싶었다.
“힘을 내게, 백작. 나는 백작의 도움이 필요해.”
그러려면 바닥에 엎어져 엉엉 우는 백작이 정신을 차리고 제 몫을 해 줘야 했다. 세스가 강제로 백작을 일으키려는 순간이었다.
날카로운 뿔피리 소리와 함께 한 떼의 기마가 등장 했다 제물을 가지고 다투던 그레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리며 눈을 빛냈다.
가장 앞에서 말을 달리는 나바르의 태자를 확인한 세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만, 저들은 적이 아니다!"
새로운 제물이 아니라는 사실에 실망한 그레이들이 다시 원래의 작업에 집중했다.
세스는 행렬을 재정비해 태자를 맞이했다. 그런데 그를 확인한 태자가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동서!"
뜻밖의 호칭에 세스가 멈칫하는 순간, 말에서 뛰어 내린 태자가 친근한 척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하, 우리 처제는 집에 잘 들어갔는지 모르겠군. 왕비가 어찌나 걱정이 많던지. 처제가 별말 없었나?”
"······."
모두의 시선이 쏠린 가운데, 세스는 조용히 아내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상할 정도로 빨리 끝난 국경 분쟁 뒤에 이블린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