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신기를 자기 몸에요?"
주크의 머리를 똑딱 분질러서 손등에 박아 넣은 거나 다름없지 않나. 으으, 그게 뭐야. 무서워.
”끔찍한 건 둘째 치고 위험할 것 같은데요.”
“그만큼 절박했다는 소리지.”
사람마다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다르다.
나는 왕위에 아무 관심도 없지만, 누군가 세스를 해친다면 신기를 손에 박아 넣는 것보다 더 미친 짓을 저지를 수도 있었다. 그래서 레베카 왕녀의 절박함도 이해가됐다.
“왕녀는 지배의 힘을 얻게 되었나요?"
“그랬던 모양이다. 당시엔 아무도 몰랐지만.”
카스티야로 시집간 레베카는 훌륭한 왕비가 되었다.
자신보다 어린 남편과 화목하게 지내며 아들과 딸을 낳았고 내정 또한 잘 다스렸다. 그리고 아들이 왕위에 오른 뒤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다들 그녀가 카스티야 의 왕비로 잘 살다가 죽은 줄 알았다.
"진실을 눈치챈 것은 나의 아버지, 선왕 폐하셨다."
레베카 왕녀에게서 지배의 왕관을 돌려받은 왕자.
선왕은 늘 자신이 정당한 왕이 아니라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언젠가는 왕녀가 돌아와 죄인의 자식인 자신을 벌할 것이라 생각했다. 아마 고래서였을 것이다. 그는 첫눈에 카스티야의 신왕이 축은 레베카 왕녀라는 것을 알아봤다.
"네? 그게 무슨······."
“겉모습은 젊은 남자였으나 속은 아니었다. 영혼이 레베카왕녀의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라고하시더군.”
그리고 레베카 왕녀 역시 제 동생이 진실을 눈치겠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당황한 기색도 없이 웃으며 말했다.
“약속은 기억하고 있니? 조만간 너를 찾아가겠다. 그때까지 왕관을 잘 간직하고 있으렴.”
충격을 받은 선왕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야기를 전해 듣는 나도 순간 오싹해졌다.
“설마, 아들의 몸을 빼앗은 건가요?"
“그렇다고 보고 있다.”
예전에 라리사 모어 씨가 야망이 큰 사람이라고 감탄한 적이 있었는데 진짜는 따로 있었다. 야망이라고 하기에도 너무나 집요한, 광기에 가까운 집착.
“지배의 왕관에서 떨어져 나온 보석 ‘욕망'은 레베카 왕녀에게서 그녀의 아들에게 계승됐다. 그러면서 그녀의 욕망과 집념까지 옮겨진 모양이야."
그리고 이들의 몸을 빼앗은 레베카 왕녀는 아스트리아 정복을 위한 전쟁을 일으켰다. 그것이 7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와······."
아니, 그게 그렇게 이어지나?
노망난 왕의 잘못된 선택으로 온 대륙이 전쟁에 휘 말렸다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
“사정을 알면 모든 사람이 레베카 왕녀가 옳다고 할 것이다. ‘하틀랜드 공작 가문과 태후와 짐온 모두 죄인이다.' 그것이 선왕의 생각이셨다."
긴 한숨을 내쉰 왕이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짐은 선왕과 다르다. 카스티야는 오랫동안 우리의 숙적이었던 곳. 그들의 손에 이 땅을 넘겨줄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다. 짐은 그런 생각으로 7년 전쟁 에 임하였고 결국 승리했다."
왕의 눈은 깨끗했다. 자신의 길이 옳다는 신념이 있는 자의 얼굴이었다.
“이블린 짐은 정당한 아스트리아의 1정왕이자 진정한 태양이다. 그렇지 않느냐?"
그 말에 문독 내가 왕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왕은 누군가 자신을 인정해 주길 바랐던 것 인지도 모른다. 선대의 잘못을 짊어지고 나라를 지켜 내면서 당신은 잘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싶었을지도.
"네 폐하께선 아스토리아의 진정한 태양이십니다."
나는 다시 한번 왕이 원하는 말을 해 주었다. 나의 왕은레베카왕녀가아니라눈앞에 있는 사람이니까.
"역시 너를 왕비로 삼아야 했는데.”
정말 아쉬운 표정을 짓는 왕을 보고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왕이 그런 내 뺨을 살짝 어루만졌다.
“짐은 조금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신들의 사랑을 받는 네가, 신기의 친구이자 정령들과 노니는 네가, 짐이 틀렸다고 비난할 것 같았다."
"저는 옳고 그름을 따지는 재판관이 아닌걸요. 저는 세스의 편이고, 또 폐하의 편이에요.”
내 팔은 안으로 굽다 못해 회오리 감자일 것이다.
모두가 세스와 왕이 틀렸다고 비난해도 나는 둘의 편에 설 테니까. 세상의 정의가 내 소중한 사람들을 해친다면 나는 세상과도 맞서 싸울 수 있었다.
“폐하. 레베카 왕녀가 라리사 모어의 배후인가요?"
세스는 라리사 모어의 뒤에 누군가가 있다고 했다. 그가 자신의 원수이자 복수의 상대라고.
왠지 이야기를 듣다 보니 혹시 같은 사람이 아닌가 싶어서 찍어 봤는데…….
“제법이구나. 어떻게 알았느냐?"
진짜라고 합니다.
아니, 카스티야 왕이 세스의 원수라고?
그것도 속은 외할머니잖아. 아니, 친아들의 몸도 스틸한 사람이니 놀랄 것도 없나. 아무리 그래도 막장이 지만.
‘세스는 이 상황을 어떻게 2년 안에 해결하려는 거지?'
다시 전쟁이 터져도 남은 시간 동안 카스티야 왕의 목을 딴다는 보장은 없을 것 같은데 고민하던 나는 그냥 대놓고 물어보기로 했다.
“폐하, 혹시 카스티야 왕을 암살할 방법이 있나요?”
"카스티야 왕을 암살하는 것은 소용없다. 다음 몸으로 옮겨 가면 그만이니까. 실제로 지금 카스티야 왕은 레베카왕녀의 손자다.”
와, 아들 몸에서 손자 몸으로 갈아타셨구나. 무슨 새 차로 옮겨 타는 것도 아니고, 진짜 대단하시네.
“가장 좋은 방법은 그녀가 가진 아스트리아의 왕위 계승권을 포기시키는 거다.”
"네?“
“카스티야 왕이 성년인 16살이 되었을 때, 아스트리아의 왕위 계승권을 포기할 것. 그것이 7년 전쟁의 승리자로서 내가 요구한 권리였다. 이제 2년이 남았지.”
"오오!"
피와 살이 튀는 방법을 떠올리던 내가 민망할 정도로 깔끔한 해결책이었다. 그래,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법으로 해결을 보는 게 좋겠지.
“그럼 2년 동안 버티기만 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거네요.”
아, 뭐야. 별거 아니었네~ 하고 안심하려는 순간 왕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 2년 동안 버텨야지 세스가 말이다.”
"예? 세스가요?"
“전에도 말하지 않았느냐 내가 잘못되면 세스가 다음 왕이 된다고. 세스가 사라지면 그다움 왕위 계승권은 카스티야 왕이 가져간다. 레베카 왕녀의 입장에선 2년 내에 세스를 제거하면 이기는 게임이다.”
······어? 가만히 있어 봐 그럼 지금 암살 위협을 당하는 게 세스라고?
혼란스러워하는 나에게 왕은 냉정하게 선언했다.
“세스가 죽거나 왕위 계승권을 박탈당하면 이 싸움은 레베카 왕녀의 승리로 끝난다."
* * *
나는 세스를 좋아한다.
그의 도움이 되고 싶고, 그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해 왔던 일 중 단 하나라도 세스에게 도움이 되는 게 있었을까?'
세스는 오래전부터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원수와 싸우고 있었다. 자신의 목숨, 명예, 지위, 간절히 바라 온 복수까지.
2 년을 버틸 수 있느냐, 없느냐로 결정되는 싸움.
그 외의 일들은 그에게 하찮거나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라리사 모어나 그녀의 음모, 그것을 막기 위한 대역 아내의 존재까지도.
“당선을 여기 두려는 건, 밖은 위험하고 내겐 적이 많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래서 저를 고용하신 거잖아요. 공작님의 적을 속이기 위해서요."
“아니, 당신은 여기서 내 아래로 살기만 하면 돼.”
문득 떠오른 과거의 대화가 아프게 나를 할퀴고 지나갔다. 그때는 왜 몰랐을까.
지켜야 할 존재가 늘어난다는 사실 자체가 세스에겐 부담이었다는 것을.
"공작님, 전 아직 포기하지 않았어요.”
“무슨 뜻이지?”
“제가 얼마나 유능하고 쓸모 있는 사람인지 보여 드리겠단 소리예요.”
별궁에서 얌전히 사는 것이 세스에게 가장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는 걸.
나는 몰랐다.
‘아니, 세스는 처음부터 말했어. 내가 듣지 않았을 뿐이지.’
자괴감에 빠진 나는 허우적허우적 정원을 헤랬다. 가슴이 답답해서 맑은 공기를 마시러 정령수 아래로 왔지만 조금도 기분이 나아지 지 않았다.
“너 일 안하냐?"
나는 괜히 정령수를 툭툭 건드렸다.
-구르르르?
층간 소음을 생산 중인 코크 곰 대신 정령수를 지키고 있던 흑룡이 호수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흑룡아, 이제 어떡하지?"
전부 그만둬 버리고 숨어 있을까.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게 세스에게 제일 좋을지도 몰라.
“이블린!”
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멍하게 고개를 돌리자 잔뜩 성난 얼굴로 달려오는 아버님이 보였다.
“이 악독한 것! 이러고도 네가 사람이냐!"
고작 하루 동안 충간 소음에 시달렸다고 홀쭉해진 모습에 울컥 화가 났다. 이 양반은 그동안 얼마나 온실 속의 화초처럼 살았단 말인가.
‘우리 세스는 지금도 전쟁터를 헤매고 있는데!'
무엇보다 가만히 있는 게 최선인 나와 달리, 저 인간은 모로 굴러도 세스의 도움이 된다는 게 짜증났다. 그런데 그 좋은 조건을 가지고도 세스를 도와줄 생각이 없다고?
“흑룡! 물대포!”
내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흑룡의 물대포가 케인의 몸을 강타했다. 붕 떠오른 그가 흙바닥에 철퍼덕 패대기쳐졌다.
"불꽃 효도 태클!"
착한 며느리 이미지를 엿과 바꾼 나는 비호처럼 날아올라 케인을 덮쳤다. 갑작스러운 노인 공격에 당황한 그가 버럭 소리쳤다.
“컥, 감히!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나는 버둥거리는 그를 주저 없이 때렸다.
“이것은 아서의 몫! 이것은 마거릿의 몫! 이것은 세스의 몫!"
연속으로 얻어맞은 케인이 나를 힘껏 밀어냈다. 나는 벌떡 일어나 그의 오금을 걷어찼다.
"네가 무슨 애비니킥!"
"악!"
바닥에서 일어나려던 케인이 그대로 앞으로 꼬꾸라졌다. 나는 그의 등에 찰싹 붙어 목을 졸랐다.
“이럴 거면 왜 낳았조르기!"
하지만 아무리 힘껏 졸라 봐야 남자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곧바로 내 팔을 풀어낸 케인이 나를 팽개쳤다.
나는 흙바닥을 데구르록 구르다 일어서서 씩씩거리며 그를 노려봤다. 나만큼이나 엉망진창이 된 케인이 분노한 눈으로 소리쳤다.
“이 천지분간도 못 하는 짐승 같은 계집애가!"
“자기 자식도 소중히 할 줄 모르는 인간이 짐승보다 나올 게 뭐야!"
이 사람에게 악령이 된 마거릿을, 고통받는 아서를 보여 주고 싶다. 그러지 못하는 것이 미친 듯이 화가 날 정도였다.
“나는 운 좋게 좋은 집안에 태어나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고먹다가 자식 원망하는 재미로 사는 당신에게 짐승 소리를 들을 만큼 잘못한 거 없어!"
온몸에 힘을 실어 내뱉은 외침에 케인이 움찔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나를 노려보던 그가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 세스, 그놈은 내 자식아······!"
순간, 퍼억 소리와 함께 케인의 몸이 하늘을 날았다. 그리고 철퍼덕하고 처량하게 바닥에 널브러진 채로 일어나지 못했다.
나는 황망한 눈으로 결정적인 말을 끊어 버린 이를 돌아봤다.
”·····까미야?"
-구르르륵!
언제 등장했는지도 모를 까미가 고맙다는 말은 필요 없다는 것처럼 힘차게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