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 * *
시종들 앞에서 오줌싸개의 누명을 쓴 아버님은 그대로 방에 틀어박혔다. 충격을 받았는지 시중은 물론 식사까지 거부하는 상태였다.
문안 인서를 핑계로 문을 두드려 봤지만 안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조금 미안해진 나는 아버님 방에 충간소음을 넉넉하게 넣어 드렸다.
예민해진 상태로 신명 나는 발 망치 소리를 들으면 당장 밖으로 뛰쳐나오고 싶을 터였다. 나는 그때를 위해서 대청소를 지시했다.
“밤중에 아버님 방의 난롯불이 꺼졌다고 들었어요. 방이 너무 오래 비어 있어서 그런 것 같으니. 전부 청소한 후에 아버님이 원하는 곳으로 바꿔 드리세요.”
층간 소음에 지친 아버님이 밖으로 튀어나와도 모든 곳이 대청소 중일 것이다. 나는 프리지어 궁에서 아버님이 편히 쉴 곳을 없애 버릴 생각이었다.
"예 되도록 천천히, 꼼꼼하게 청소하겠습니다.“
척하면 척 알아듣는 시녀장이었다. 나는 아버님이 언제쯤 울면서 집을 뛰쳐나갈지 예상해 보았다.
‘일주일 정도면 넉넉하겠는데?'
세스가 돌아오기 전에 충분히 아버님을 치워 버릴 수 있을 듯했다. 나는 기분 좋게 별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별궁에는 뜻밖의 손님이 와 있었다.
“이제 오느냐?”
"폐 폐, 폐하?!"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왕이 나를 바라봤다. 깜짝 놀란 나는 제자리에 우뚝 굳어 버렸다.
“외출이라도 한 줄 알았는데, 다행히 헛걸음을 하진 않았구나."
아니, 이분께선 왜 자꾸 예고도 없이 등장하시지. 나는 속으로 울상을 지으며 예를 올렸다.
“인사는 됐으니 어서 앉아라.”
왕의 턱짓에 나는 눈치를 보며 맞은편에 앉았다. 머릿속은 왕이 무슨 일로 여기까지 행차했는지에 대한 생각으로 복잡해졌다.
“이블린 짐에게 뭔가 할 말이 없느냐?"
왕의 눈초리가 전에 없이 날카로웠다. 나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건 설마, 걸린 건가?
아니나 다를까, 왕의 입에서 내심 피하고 싶었던 주제가 나왔다.
“나바르 왕국의 왕이 바뀌었다고 하더구나. 죽었다던 태자가 나타나 아비를 폐위시키고 신왕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그럼 전쟁은…….”
“왕이 바뀌고 국경의 분쟁 역시 중단됐다 아직 논의 단계이긴 하지만, 적당한 협상 후에 동맹국으로 돌아가게 되겠지.”
”와!”
나는 상황도 잊고 활짝 웃었다. 이제 세스가 전쟁터를 전전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기 때문이다. 역시 러브 앤 피스가 최고시다.
하지만 왕의 추궁은 지금부터였다.
“그런데 나바르의 신왕이 말하기를, 사막과 불꽃의 정령인 지니가 자신을 부활시켜 줬다더구나.”
“지, 지니요?"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지니는 무슨 지니야. 이놈의 태자가 램프로 두들겨 맞고 싶은 모양이다.
태자는 위대한 정령인 지니가 온갖 마수를 부려 자신을 구해 줬다고 입을 털었다. 그래서 폐위된 왕을 따르던 자들마저 마음을 바꿔 항복했단다.
‘난 전쟁 빨리 끝내라는 말밖에 한 적이 없는데.’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자 눈을 번뜩거린 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왕이 말을 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지니가 부리는 마수가 거대한 검은 뱀 두 마리와 수많은 그리핀, 그리고 하얀 곰이라고 하더구나.”
"······."
“지니의 어깨에 작고 하얀 털 뱀이 매달려 있다는 보고도 있었고.”
나는 식은땀이 폭포수처럼 흐르는 것을 느꼈다. 아니, 누가 그렇게 쓸데없이 상세한 보고를 올린 거야.
“폐, 폐하…….”
나는 일단 변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 , 일단 반지 내놓고 살려 달라고 빌까?
그때 왕의 손이 다가와 내 코끝을 튕겼다. 아얏 하고 코를 감싸 쥐자 왕이 한숨을 쉬었다.
"혹시나 해서 떠봤더니 진짜일 줄은."
"······예에?"
“우리 측의 첩자가 고한 것은 그저 하늘에서 그리핀이 목격되었다는 것뿐이었다."
뭐지? 나 낚인 거야?! 놀라서 멍하게 입을 벌리자 왕이 내 뺨을 꼬집었다.
“이 녀석,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바르까지 가서 사고를 친 거냐! 짐이 너 때문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구나!"
“아야아, 폐하 아포요!"
뺨은 아팠지만 마음이 한결 놓였다. 왕이 나를 엄하게 처벌할 생각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왕이 이걸 심각한 문제로 여겼다면 나는 벌써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폐하. 전 공작님이 너무 걱정돼서, 빨리 전쟁을 끝내고 싶은 마음에…….”
신혼여행 중에 신랑이 끌려간 내 마음을 이해해 달라고! 눈물을 글썽이며 불쌍한 척하자 왕이 한숨을 쉬었다.
“이블린, 미안하구나."
“정말 죄송······ 예?"
“내가 네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뜬금없는 말에 당황한 나는 눈을 굴렸다. 왕은 상냥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주위에 알려지진 않았지만 너는 천공신의 선녀지."
“아, 하지만 그건······.”
"북부의 구원자이자 사막의 정령이기도 하고. 너는 네 능력만으로도 어디에서든 환영받을 수 있는 사람이다."
왕은 왠지 씁쓸한 얼굴이었다.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눈만 깜빡였다.
“하지만 아스트리아에서 너는 천한 출선이라 매도당하고 오해받을 것이다. 단지 세스의 옆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을 견딜 수 있겠느냐?"
“네.”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왕은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저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게 더 중요하니까요. 모르는 사람이야 절욕하든 말든 상관없어요."
남들이 백번 욕해 봐야 아무런 소용없다. 내가 좋아 하는 사람들이 나를 인정하는 게 중요하지. 축은 뒤에 몇 명이 진심으로 슬퍼해 주냐에 따라 성공한 인생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
“폐하께서 저를 천하다고 매도하지 않고, 소중하게 여겨 주신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아요.”
내겐 세스가 제일 소중하지만, 왕 또한 소중한 존재인 건 마찬가지였다. 왕은 지금껏 중요한 순간마다 나를 인정하고 힘을 실어 준 사람이었으니.
“전 대역이 끝난 뒤에도 아스트리아에 남아 있을 생각이에요. 만약 폐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요."
나는 왕이 가장 걱정할 것 같은 부분을 콕 찍어서 말해 주었다. 그러자 왕이 나를 번쩍 안아 올리며 속삭였다.
"네가 만약 남자였다면 나는 너를 국서로 삼았을 것이다.“
”······하하."
이전의 왕비가 되겠냐는 제안보다 좀 더 발전된 것 같은 대답이 조금 무서웠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나를 옆자리에 내려놓은 왕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 너에게 꼭 해 줘야 할 이야기가 있다."
나는 왕이 오늘 여기 온 목적이 바로 이것임을 깨달았다. 만약 내가 도중에 틀린 대답을 했다면 왕은 추궁 올 마치고 돌아갔을 것이다.
"레베카 왕녀에 대해 알고 있느냐?"
“아뇨.”
“내 고모님이자 세스의 외조모이신 분이다."
나는 곰곰이 기억을 더듬었다. 세스의 어머니는 카스티야의 공주였다. 자연스럽게 세스의 외할머니는 카스티야의 왕비라는 결론이 나온다.
“어, 그러면 아스트리아의 왕녀였던 분이 카스티야로 시집을 가신 거네요?"
지금은 원수처럼 싸워 대는데 과거에는 사이가 좋았나?
의아해하는 나를 보고 왕은 긴 한숨을 쉬었다.
"레베카 왕녀는 내 할아버지, 현명왕의 유일한 딸이었다.”
옛날, 아스트리아엔 현명 왕이라는 지혜로운 왕이 있었다. 왕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사고나 병으로 모두죽고막내인 레베카왕녀만이 남았다.
그러나 누구도 레베카가 왕위를 잇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다. 레베카는 그만큼 대범하고 총명한 왕재였다.
세 왕자의 뚝배기를 깬 범인으로 모두 레베카 왕녀를 지목할 정도였다. 그래서 아무도 그녀가 왕위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현명왕과 새로 결혼한 어린 왕비가 아들을 낳으면서 문제가 생겼다. 늙은 현명왕이 레베카가 아닌 어린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 했던 것이다.
‘아니, 이것은 역사의 망조 루트!'
전생의 역사에서도 몇 번 있었지. 철퇴 붕붕 왕자 대신 어린 막내아들을 왕위에 앉히려다 돌아올 수 없는 길로 가셨던 분이라든가.
"당연히 왕위를 물려받을 줄 알았던 레베카 왕녀는 분노했다."
”······예에."
보통왕이 날랜 범 같은 후계자 대신 어린 왕자를 택하면 나라가 망하든가, 어린 왕자가 망하든가 한다.
“하지만 어린 왕비의 배경인 하틀랜드 공작 가문은 집요했다. 그들은 레베카 왕녀가 불륜으로 태어난 씨앗이라고 매도해서 계승권을 박탈시키려 들었어.”
어린 왕자가 레베카를 이기지 못할 것 같으니, 레베카 왕녀의 평판을 망쳐 버리려고 한 것이다.
어머니의 명예를 모욕당했다고 느낀 레베카는 뒤에서 손을 써서 하틀랜드 공작 가문을 몰살 직전으로 몰고 갔다. 그런데 이것이 현명왕의 비위를 거스르고 말았다.
"현명왕은 카스티야와의 평화 협정을 내세워 레베카 왕녀를 정략 결혼시켰다."
사실상 딸을 버리고 어린 왕비의 편을 들어 준 것이 나다름없었다.
”와, 현명왕 아니고 노망왕이신 듯……."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던 나는 왕의 시선을 받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나를 보고 왕이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사실이지 노망이 드신 거야.”
레베카 왕녀는 결국 카스티야로 시집을 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아스트리아의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5신기 중 하나이자 태자의 상징인 지배의 왕관을 소유한 채로 떠났다.
뒤늦게 그것을 알게 된 왕비는 자신의 아들을 보내 왕관을 찾아오라고 명령했다.
레베카는 뒤를 쫓아온 이복동생에게 왕관을 돌려주며 말했다. 자신이 이 왕관을 찾으러 올 때까지 잘 간직하고 있으라고.
“죄책감에 고개를 들지 못하던 왕자는 한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신기인 왕관만 확인하고, 왕관에 박힌 보석이 바꿔치기 되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어."
그 보석의 이름을, 욕망이라고 한다.
인간을 지배하는 힘을 지닌 보석을 레베카 왕녀는 자신의 손등에 박아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