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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145화 (145/240)

시녀장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멋대로 물러갔다. 건방진 태도였지만, 이블린을 상처 입힌 죄가 있는 케인은 그녀를 붙잡을 수가 없었다.

케인은 자신이 이곳에서 손님으로 취급당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자 그를 뻔히 쳐다보던 시녀장이 기묘한 미소를 지었다.

시종장은 그를 위해 동쪽에서도 가장 큰 헤븐룸을 내주었다. 뜻밖의 대우에 케인은 몹시 흡족해했다.

‘역시 두고 보자는 말은 허세였군. 하긴, 제까짓 것이 나를 어쩔 수야 있겠어?'

건방진 시녀들과 다르게 시중을 드는 시종들은 몹시 정중했다. 이어진 저녁 식사도 케인의 마음에 쏙 들었다.

"음식은 입에 맞으십니까?"

“흠, 나쁘지 않군.”

처음 보는 음식이 많았지만, 보기에도 좋고 맛은 혀가 녹아내릴 정도였다. 입맛이 까다로운 그도 접시를 싹싹 비웠다.

“오늘 드신 요리는 전부 마님께서 고안해 내신 겁니다. 마음에 드셨다니 기뻐하실 겁니다.”

"······."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진 케인이 식기를 내려놓았다.

자신이 얼마나 게걸스럽게 먹었는지 이블린에게 보고될 거라 생각하자 절로 날카로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역시 천한 출신은 어쩔 수가 없군. 가문의 안주인이 돼서 음식 따위에나 한눈을 팔다니. 재신머리 없이!"

귀부인 중에 요리에 관심 가지는 사람이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건 먹을 줄은 알아도 만들 줄은 모르기 때문이었다. 케인도 자신의 말이 생트집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와인을 좀 더 드시겠습니까?“

시종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웃는 얼굴로 물었다. 솜뭉치를 때린 것 같은 반응에 맥이 빠진 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린 그가 물었다.

“설마 이것도 마님께서 만들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설마요.”

시종은 정중하게 잔을 채우며 말을 이었다.

“이건 북부의 변경백께서 마님께 바친 공물일 뿐입니다. 일 년에 백 병도 생산되지 않는 귀한 와인이라더군요. 마님께서 특별히 아버님께 대접하라 명하셨습니다.”

케인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와인 잔을 바라봤다.

"변경백이 공물을 바친다고? 왜?"

북부의 변경백이라면 그도 기억하고 있었다. 자존심 강하고 거칠기 짝이 없는 전사였다. 엘마이어 가문과 아무런 접점이 없는 그가 왜 여기서 튀어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마님께서 북부의 식량난을 해결하신 은인이기 때문이죠. 북부에선 마님을 구원자라고 부르며 신처럼 숭배하기까지 한답니다.”

시종은 무척 뿌듯한 얼굴로 설명했다. 하지만 케인은 그 말의 절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북부를 구해? 그 계집이 무슨 재주가 있어서?"

"큰 주인님, 마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입니다.”

시종은 대놓고 이블린을 찬양했다.

반역자들로부터 왕과 근위 기사들의 목숨을 구하고, 마탑의 친우가 되었으며, 북부의 구원자이자 천공신의 선녀가 아끼는 친우고, 물의 신전의 비호를 받고 있으며, 그녀 덕에 러셀과 프림로즈와 같은 대가문과도 동맹을 맺고 있다는 소리에 케인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게 일대 영웅의 모험담인지, 제 며느리에 대한 이야기 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전부 사실입니다. 이건 최소한만 말씀드린 겁니다. 이곳에서 일하는 자들은 마님의 능력이 그것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시종은 전부를  다말하지 못해서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케인은 자신이 이블린을 욕할 때 왜 시종이 아무 말 없이 웃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가 지껄이는 헛소리라고 생각해서였다.

묘한 수치심과 패배감을 느낀 케인은 서둘러 시종을 내보냈다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군.’

그는 이블린을 남자를 잘 잡아서 출세하려는 천박하고 사치스러운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런 여자가 공작 부인이 되면 고용인들 역시 불만이 많을 테고, 그걸 잘 건드리면 이블린을 쫓아내기 어렵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블린의 지지 기반은 생각보다 단단했다. 시녀들뿐만 아니라 시종들까지 이블린을 존경하며 따르고 있었다.

‘왕의 인정까지 받았으니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예상 했어야했는데.’

무엇보다 이블린의 업적은 예상외였다.

혹시나 싶어 벽난로를 피우는 시동에게 이블린에 대해 물어보자, 조금 전에 들은 것보다 더 과장된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이블린이 성검의 인정을 받고, 황금빛 하늘을 날아다니며, 온갖 동물들이 그녀에게 복종한다는 둥, 당장 나라 하나를 세워도 될 것 같은 전설이 난무했다.

“너는 내가 그걸 믿을 거라고 생각해서 말하는 거냐?"

“제 눈으로 직접 봤습니다! 전부 사실이에요!"

시동은 울상을 지으면서도 재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어이가 없었던 케인은 차갑게 시동을 내쫓았다.

‘이렇게 주변 사람들을 모두 세뇌하다니, 생각보다 더 수완이 좋은 계집이었군.'

그러나 애써 못마땅하게 여기려고 해도 이블린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꿍 소리를 낸 그는 빨리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것보다 그쪽이 더 이로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푹신한 침대에 눕자 다시 상념이 피어올랐다.

‘예상보다 나쁜 아이는 아닌 것 같았지만······.’

이블린은 모든 의미에서 그의 예상을 빗나갔다.

귀여운 외모, 대범한 성격 , 엉뚱하면서도 능청스러운 태도, 아랫사람들을 휘어잡는 능력까지.

천한 출신만 빼면 그가 원하던 며느릿감이었다. 이런 식으로 만나지 않았으면 그녀를 좋아했을 거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니, 나는 녀석을 쫓아낼 거다. 그래서 그 가엾은 아이가 있을 자리를 만들어 줘야 해.’

라리사 모어를 떠올린 케인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이제 믿을 것은 아버지밖에 없다고 매달리던 그 아이를 어떻게 버릴 수 있겠는가.

‘나라도 그 애의 편이 되어 줘야해.'

라리사가 보기와 달리 착하고 순수한 아이가 아니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그에게 남은 자식은 이제 라리사뿐이었다. 어떻게든 지켜 주고 싶었다.

깊은 한숨을 쉰 케인은 이리저리 뒤척이다 눈을 감았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벽난로의 불길이 후욱 하고 사그라졌다. 동시에 창문에 성에가 서리기 시작했다.

“······응?"

추위를 느낀 케인이 번쩍 눈을 떴다. 이불을 덮고 있는데도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벽난로가 꺼진 건가?'

갑자기 방 안의 온도가 영하까지 떨어졌지만 케인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설렁줄을 당겨 시종을 불렀다.

시종은 곧바로 나타나지 않았다. 추위를 느낀 케인은 다시 침대로 돌아가 이불을 덮어썼다. 그러고도 몸이 덜덜 떨릴 정도라 가운까지 찾아 입었다.

“부르셨습니까?"

한참 후에야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시종이 나타났다. 침대에 틀어박힌 케인이 소리쳤다.

"난롯불이 꺼져서 얼어 축을 것 같다. 지금 당장 불 올 피워라!"

죄송하다고 굽실거리며 벽난로로 다가간 시종은 당황했다. 꺼졌다는 벽난로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춥기는커녕 더워서 땀이 날 정도였다.

"불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장작을 더 넣어 두겠습니다.”

시종의 말을 믿을 수 없었던 케인은 벌떡 일어나 휘장 밖을 내다봤다. 그런데 정말 난롯불이 활활 타오르는 중이었다.

"장작을 넉넉히 넣어서 아침까지 꺼지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새벽에 한 번 더 와 보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알겠다.“

무뚝뚝하게 답한 케인은 벽난로를 노려봤다. 그런데 시종이 밖으로 나가 문을 닫으려는 순간, 거짓말처럼 난롯불이 꺼졌다.

"잠깐!”

비명 같은 목소리에 멈칫한 시종이 뒤를 돌아봤다.

“다른 분부라도 있으십니까?"

“·····.“

케인은 다시 활활 타오르는 난롯불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이게 무슨 해괴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꿈을 꾸나 싶을 정도였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그가 멍하게 있는 사이, 정중히 절을 한 시종이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난롯불이 꺼졌다. 동시에 온몸이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가 밀려왔다.

"두고 보자, 영감탱이!"

갑자기 이블린의 말이 생각난 그는 부득 이를 갈았다. 대체 어떻게 된 조화인지 알 수 없지만 이게 이블린의 복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따위 수작에 질 줄 알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는 몸에 덮을 수 있는 것은 다 끌어와서 추위와 싸울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그의 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쿵,쿵쿵,쿵!

갑자기 머리 위에서 울려 퍼지는 웅장한 소리에 케인은 인상을 찌푸렸다. 계속 일정한 간격으로 들리는 소리가 신경에 거슬렸다.

‘······참아야 한다. 참아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인내심을 끌어 모아도 계속 쿵쾅거리는 소리를 참기는 힘들었다. 결국 케인은 다시 설렁줄을 잡아 당겼다.

시종이 나타나자 거짓말처럼 추위는 사라졌고 쿵쿵 뛰는 소리도 멎었다.

"위에서 누가 자꾸 뛴다.”

"예? 위층에는 아무도 없습니다만.”

“······.”

“다락에 쥐가 있나 봅니다. 사람을 시켜 쫓아내겠습니다."

공손한 표정의 시종이었지만 내심 그를 귀찮아하는 게 느껴졌다.

순간 울컥했던 케인은 이내 괜한 화풀이라는 것을 깨닫고 손을 내저었다. 시종은 정중히 고개를 숙인 후에 물러갔다.

시종이 사라지자 또다시 쿵쿵거리는 소리와 추위가 돌아왔다. 케인은 부득부득 이를 갈았다.

“아무리 그래 봤자 내가 눈 하나 깜짝할 것 같으냐!"

괜한 오기에 그는 방을 뛰쳐나가지 않고 버렸다.

이 밤만 버티면 된다. 해가 뜨면 그 마녀를 찾아가서 요절낼 것이다. 몸을 웅크린 그는 피곤함에 젖어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끼기기긱!

철판을 손톱으로 긁어내리는 것 같은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놀라 펄쩍 뛰어오른 그는 계속해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틀어막았다.

“그만! 그만!"

소리는 그의 잠이 백 리 밖으로 달아난 뒤에야 그쳤다.

케인은 그제야 이블린의 목적을 깨달았다. 이 악독한 것은 그를 한숨도 재우지 않으려는 것이 분명했다.

추위와 쿵쿵거리는 소리, 그리고 끼긱거리는 끔찍한 소음에 밤새도록 시달리던 그는 새벽이 되어서야 기절하듯 눈을 감았다.

"큰 주인님, 일어나셨습니까?"

그리고 눈을 감자마자 시종의 기척에 다시 깨어나야 했다.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린 그는 묘한 지린내를 맡았다.

퍼뜩 눈을 뜬 케인은 침대 한가운데 노랗게 그려진 거대한 지도를 발견했다. 그의 얼굴도 노랗게 변했다. 죽도록 억울했지만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이었다!

‘이블린, 이 악랄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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