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 * *
태자는 손쉽게 상황을 뒤집었다.
비밀리에 불러 모은 전사들에게 검은 옷을 입힌 후 왕이 있는 황금 궁으로 쳐들어간 것이다.
태자에게 보낸 병서들이 돌아온 줄 알고 방심하던 왕은 손쉽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멀쩡히 살아 있는 태자를 보고 경악했다.
“대체 어떻게 살아났지? 그건 절대 해독할 수 없는 독이라고 했는데…….”
“홀로 생각해 보심이 어떠십니까? 이제부터 아바마마께는 남아도는 것이 시간일 테니까요.”
냉혹한 미소를 지은 태자는 왕을 슬픔의 궁에 유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전사들의 억센 팔에 붙잡힌 왕이 부드득 이를 갈았다.
“내가 미친 폭군이라서 카스티야의 편을 든 줄 아느냐? 너도 이제 선택해야 할 것이다!"
“어서 폐왕을 모셔라!"
태자는 저를 죽이려고 한 아비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하지만 왕은 끈질기게 저주를 퍼부었다.
“너는 곧 의지 없는 꼭두각시가 되어 이 나라를 멸망시킬 것이다! 네가 아무리 잘나도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을 줄 아느냐!"
아스트리아에 ‘왕의 길'이 있는 것처럼, 카스티야에는 ’지배의 저주’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특정 인물의 영혼을 빼앗아 제 뜻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저주.
왕이 이렇게 두려워하는 것을 보면 소문이 사실인 듯했다.
하지만······.
"애매한 저주보다는 다른 쪽이 훨씬 무섭단 말이지.”
태자비를 통해 정신을 잃었을 때의 일을 전해들은 태자는 확신했다.
카스티야와 아스트리아 사이의 전쟁은 결국 아스트리아의 승리로 끝날 거라는 사실을. 그것도 단 한 명의 어린 여자에 의해서.
-끼르르륵!
황금 궁을 벗어난 태자는 하늘을 맴도는 그리핀들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이 빨리 전쟁을 끝내라는 이블린의 재촉처럼 보였다.
“아스트리아 왕도 꽤나 골머리를 썩겠군."
아스트리아 왕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이블린을 숨기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몰래와 있는 것을 알면 뒷골을 잡고 쓰러질지도 모른다.
특별한 힘을 가진 유일무이한 보물.
그녀는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국보나 마찬가지인 존재였다.
"선택은 이미 했습니다.”
태자 역시 이블린을 보지 못했다면 아스트리아의 힘을 잘못 판단했을 것이다. 카스티야가 그를 독살하려 한 것에 감사의 마음이 들 정도였다.
이번 일로 그는 아내들과 자식들, 그리고 충성스러운 부하들을 잃었다. 뼈아픈 희생이었지만 국가의 미래를 결정하게 된 것만으로도 값을 치른 것이나 다름없었다.
“앞으로 나바르는 아스트리아의 혈맹이 될 것이다!"
새로운 왕의 선언에 모두가 고개를 조아렸다.
* * *
나바르 사람들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후손인 것 같았다. 가만히 있는 내게 뭔가를 해 주지 못해서 안달복달했다.
“이블 님, 이것은 왕가의 보석인 ‘빛의 바다‘이옵니다. 마음에 드시는지요?"
“이 비단은 어떠십니까? 이블 님의 고운 피부에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사옵니다.”
"아, 아뇨. 괜찮아요.”
지나치게 친절해서 부담스러운 미용실 직원들에게 시달리는 느낌이었다. 지금 내 설정이 도적단의 두목이니만큼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더 불편했다.
“신수님, 이 과일 좀 드셔 보세요. 정말 달콤해요.”
“바보야 신수님은 새콤한 과일을 더 좋아하셔. 그렇죠, 신수님?"
-꾸우!
반면 태생이 왕자인 복실이는 아주 여유롭게 무녀들의 시중을 받고 있었다. 나는 기분 좋게 빗질을 받으며 과일을 먹는 복실이의 모습에 왠지 모를 소외감을 느꼈다.
까미와 흑룡은 커플 모래찜질을 받고 있었고, 창공기사들은 태자에게 선물받은 무기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꺅꺅 수다를 떨었다.
믿었던 코크 곰과 고양이들까지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슬그머니 끼어들려던 나는 녀석들의 발톱에 걸린 가죽 공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모습에 미련을 버렸다.
결국 나무 그늘에 홀로 쪼그리고 앉아 있으니 나만 휴양지에 버려진 아싸 같았다.
‘나도 세스가 있으면 누구보다 신나게 놀 수 있는 데.’
태자만 살리면 뽕하고 전쟁이 끝날 줄 알았는데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왕도 유폐해야 하고, 협상도 다시 해야 하고, 뭔가 할 일이 많아서 세스는 당분간 국경에서 뺑이를 쳐야 하는 모양이다.
여기서 기다리다가 세스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던 나는 김이 팍 새는 것을 느꼈다.
‘애들은 놀게 내버려 두고 그냥 나혼자 집에 갈까?'
절대 자기들끼리만 놀아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띵!
그때 옆구리에 매달려 있던 주크가 자산도 있다는 것처럼 소리를 냈다. 그래, 주크야. 나한테는 너밖에 없다.
검집을 토닥이던 나는 멀리서 타박타박 걸어오는 불꽃을 발견했다.
"으잉?"
내 검지만 한 크기의 불꽃은 사람 모양을 하고 있었다. 머리 부분에 활활 타는 불이 있어서 꼭 작은 성냥처럼 보였다.
나를 발견한 성냥이 갑자기 타다닥 뛰어오기 시작했다. 엉겁결에 옆으로 피하자 그대로 나무에 부딪쳐 벌러덩 뒤로 넘어진다. 그 역동적인 동작에 당황한 나는 몸을 굽혀 녀석을 살폈다.
“꽤, 괜찮아?"
벌떡 일어난 성냥이 내 손에 매달렸다. 순간 깜짝 놀랐지만 다행히 하나도 뜨겁지 않았다.
“성화가 주인을 정한 것 같군요.”
퍼뜩 고개를 들자 언제 왔는지 바로 옆에 태자비가 서 있었다. 그녀는 처음 봤을 때처럼 조금 슬퍼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신녀님께선 곧 떠나실 생각이시지요? 그때 성회를 데려가주십시오.”
“네? 얘를요?"
-띠딩!
주크가 반대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 보니 처음 소리를 낸 것도 나를 위로한 게 아니라 성화가 다가온다는 경고였던 것 같았다.
“전 지금도 딸린 식구가 많아서요.”
농담이 아니라 복실이, 주크, 까미, 흑룡이, 코크 곰까지 총 다섯이다. 여기에 그리핀들까지 엉덩이를 비비는 것이 영 불안했다.
"하지만 성회는 이미 선녀님을 따르기로 결심한 것 같습니다. 제단을 버리고 여기까지 온 것을 보면 바다를 건너서라도 쫓아갈 겁니다.”
태자비가 무시무시한 말을 했다. 아니, 하얀 마음 백구도 아니고 왜 따라와!
“성화는 이곳에서 가장 귀한 보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두시면 분명 언젠가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태자비의 말에 성냥이 두 손을 모으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잠깐 고민했다.
‘따지고 보면 불이니까, 꽤 쓸모는 있을 것 같은데.’
나는 성냥을 툭 건드리면서 물었다.
“너 요리 잘해?”
성냥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요리가 뭐냐고 묻는 것 같았다.
하긴, 불은 스스로 요리하는 게 아니다. 남이 요리하는 걸 돕는 거지.
“그럼 내가 태우라고 할 때만 태울 수 있어?"
프리지어 궁을 불바다로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가장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그러자 성냥이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귀여운 모습에 데려가자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밤중에 육포 구워 먹을 때 제법 유용할 것 같기도 하고.
“그럼 염치없지만 받아 갈게요."
"염치없다니요. 지금 당장 제 목숨을 원하셔도 기꺼이 바칠 겁니다. 나바르는 선녀님께 크나큰 은혜를 입었으니까요.”
태자비가 무릎을 꿇고 나를 올려다봤다.
“신녀님께서는 제 모든 것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저는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당신께 은혜를 갚을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이든 요구해 주십시오.”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잔잔해 보이지만 사실 누구보다 굳센 의지를 품은 눈이었다.
그것이 묘하게 세스를 닮아서, 내가 좀 곤란해지더라도 그녀를 돕고 싶은 마음이 들었었다.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었다.
“그럼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나는 무릎 꿇은 그녀를 일으키며 운을 뗐다.
"무엇이든 말씀해 주십시오.”
“앞으로 저를 좋아하는 사람보다는 욕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아질 거예요. 비전하의 주변 사람들도 저를 욕하겠죠. 그럴 때 ‘내가 개 만나 봐서 아는데, 그렇게 나쁜 애는 아니야.’라고 한마디만 해 주세요. 그거면 돼요.”
모르는 사람이야 나를 욕하든 말든 상관없지만, 내가 아는 사람은 그러지 않았으면 하니까.
그러자 고개를 끄덕인 태자비가 진지하게 답했다.
"알겠습니다. 누구든 선녀님을 욕하면 눈을 도려내고 혀를 잘라서 태어난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습니다.”
“······아니, 그냥 말만으로도 충분해요.”
역시 나바르 사람들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후손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나무의 열매는 틀림없이 엄숙엄숙 열매일 것이다.
* * *
나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다. 더 이상 여기 있어 봤자 독 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왕에게 들키면 출근도 안 하고 다른 나라에서 놀고 있었다고 뺨을 꼬집힐 것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태자비가 바리바리 싸 준 선물도 사양했다. 몰래 온 것이니만큼 증거를 남길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인원 정리도 필수였다.
“너희들도 이제 집에 가야지."
창공 기사단은 약속을 지켰다. 그래서 나는 그들과 함께 날고양이들을 로엔 공국으로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끼에에엑!
-키익!
나는 돌아가기 싫다고 반항하는 고양이들을 둘러봤다.
“나도 너희들을 돌려보내고 싶진 않아. 하지만 지금 이대로는 함께 있을 수가 없어.”
이 고양이들은 전부 로엔 공국의 것이다. 이대로 데리고 있다간 외교적인 문제가 터질 수밖에 없었다.
대역에 불과한 내가 국제 분쟁을 터트렸다간 왕에게 미운털이 숭숭 박힐 것이다.
‘왜 동물 농장이 이별 엔딩으로 끝나는지 알 것 같다.’
나는 한숨을 쉬며 고양이들의 목을 다독거렸다.
“너희들에게도 가족과 친구들이 있잖아. 이대로 영영 헤어지는 건 싫지 않아?"
-끼루룩?
“나중에 자유의 몸이 되면 언제든지 놀러 와도 돼."
입을 다문 고양이들이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납득한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나는 창공 기사단을 돌아봤다.
“도와줘서 고마웠어요.”
“아닙니다. 저희야말로 다시없을 진귀한 경험을 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즐거웠습니다."
"예 부인께서 저희의 주군이 아닌 것이 아쉬울 정도 입니다.“
이별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기사들도 듣기 좋은 소리를 해 주었다. 이때만 해도 나는 말이 씨가 된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 * *
왕의 길을 열어 날고양이와 기사들을 배송한 나는 홀가분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인원이 대폭 줄어서인지 어깨가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마님, 큰 주인님이 오셨습니다."
"네? 큰 주인님이요?"
그리고 그런 나를 비웃는 것처럼 또 다른 짐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시아버님이신 케인 엘마이어 님이십니다. 지금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