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 * *
“이 안에 태자님이 계십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연 시린은 깜짝 놀랐다. 방 전체에 성화의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흐음, 여긴가?“
경외심에 굳어진 그녀와 달리 이블린은 태연한 얼굴로 안으로 들어섰다.
화르륵!
순간 성화가 기세 좋게 솟구쳤다. 푸르게 변한 불꽃이 사방을 뒤덮으며 활활 타올랐다. 신성한 기적을 목격한 시린과 무녀들이 털썩
꿇었다.
"거룩하신 분이시여!"
푸른 불꽃은 마치 으스대는 것처럼 그들을 굽어봤다. 그때 멀뚱히 성화 쳐다보던 이블린이 물었다.
"혹시 지금 태자를 굽는 중이야? 맥반석 태자 구이?"
-······!
순간 움찔한 성화의 기세가 조금 줄어들었다. 그러자 불꽃 때문에 보이지 않던 태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안 돼!"
화들짝 놀란 태자비가 제단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태자는 머리끝이 조금 그을렸을 뿐 아주 멀쩡했다.
안도한 태자비가 눈물을 펑펑 홀리며 태자를 꼭 끌어안았다. 그와 함께 성화의 크기가 조금 더 줄어들었다.
“어휴, 안 그래도 더워 축겠는데 불꽃 쇼라니.”
이블린이 파닥파닥 부채질을 했다. 그녀의 어깨 위에 앉은 복실이가 뿌뿌거리며 같이 눈치를 줬다. 기가 죽은 성화는 아예 성냥불 크기가 되었다.
잔뜩 쪼그라든 성화를 본 시린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누가 봐도 지금 상황은 성화가 이블린에게 치근거리다가 차인 것이었다.
‘설마 그녀가 성화와 같은 급이란 말인가?'
정작 이블린에게선 한 톨의 신성력도 느껴지지 않건만 오히려 그녀의 주변에서 천공신이며 대지산 같은 각기 다른 신성력이 뒤섞여서 느껴졌다. 시린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이, 이블 님! 어서 태자 전하를 살펴봐주세요.”
그때 태자비가 조심스럽게 재촉했다. 그제야 이블린은 어슬렁거리며 제단으로 다가갔다.
“어디 보자-어디가 잘못됐나―”
제단 위에 누워 있는 태자는 그야말로 흉측한 몰골이었다. 온몸의 핏줄이 튀어나오고 손발은 검게 물들 어서 시체나 다름없었다. 몸 전체의 얼룩덜룩한 검은 반점은 그에게 손을 대는 것조차 꺼리게 했다.
그러나 이블린은 태연히 그를 살폈다. 진짜 의원처럼 손목을 짚어 보고 눈꺼풀을 까뒤집어서 색을 확인하기까지 했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명쾌한 결론을 냈다.
“아주 단-단히 체했네요.”
”······예?"
“뭔가 먹다가 걸렸다고요. 급체입니다. 급체.”
시린은 누가 봐도 그건 아니지 않냐고 따지고 싶었다. 돌팔이라고 의심하는 그녀와 달리, 태자비는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하죠?"
"원래 체한 데엔 손 따는 게 최고예요.”
태자를 제단에 앉힌 이블린이 그의 팔을 주무르게 했다. 시린과 태자비가 열심히 태자의 팔을 주무르는 동안 그녀는 태자의 등을 성의 없이 툭툭 두드렸다.
"복실아!"
태자의 옆에서 대기 중이던 복실이가 정말 싫다는 얼굴로 입을 벌렸다. 그리고 새까맣게 물든 태자의 손가락 끝을 콱 깨물었다.
순간, 정신을 잃고 있던 태자가 번쩍 눈을 떴다. 그는 고양이가 털을 토해 내기 전처럼 온몸을 꿀렁거리며 괴로워했다.
“저, 전하?"
조심스러운 부름이 끝나기도 전에 입을 벌린 태자가 시커먼 덩어리 같은 것을 왁 쏟아 냈다. 아기 팔뚝만 한 크기의 애벌레였다.
고개를 갸웃한 이블린이 중얼거렸다.
"동충하초 같은 거라도 먹었나?"
-뿍!
방심하고 있다가 태자가 쏟아 낸 것을 덮어쓸 뻔한 복실이는 분노했다. 녀석은 곧바로 불에서 정전기를 일으켜 작은 번개를 애벌레에게 쏘아 냈다.
감전된 벌레는 잠시 멈칫했을 뿐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끽끽거리는 울음소리까지 토해 냈다.
-뿌......
징그러운 모습에 불만을 내비친 복실이가 뿔쁠 날아서 이블린의 뒤로 도망쳤다. 깔끔한 왕자님인 그는 저런 흉측한 것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얼굴도 파리해졌다. 끔찍한 광경은 둘째 치고 끽끽대는 벌레 소리를 듣자 기묘한 거부감이 느껴졌다.
“얍!”
그때, 맨손으로 덥석 벌레를 잡은 이블린이 그것을 획 성화 속에 던져 넣었다. 난데없이 봉변을 당한 성화가 급하게 벌레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에이, 더러워.”
놀란 사람들이 멍하게 쳐다보는 와중에 이블린은 태연하게 태자의 옷에 손을 비벼 닦았다. 태자비가 급히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손을 마저 닦아 주었다.
”으윽, 여기는……?"
그 순간, 태자가 정산을 차렸다. 그의 몸속에 자리 잡았던 저주가 사라지면서 속박에서 풀려난 것이다.
“전하!”
”······무슨 일이 있소?"
상황을 모르는 태자는 펑펑 울며 안겨 드는 자신의 비를 보고 의아하게 여겼다. 무심결에 시선을 돌린 그는 자신을 쳐다보는 거대한 바실리스크를 발견하고 경직됐다.
"아닛?!“
자신이 헛것을 본 건가 생각하며 머리를 휘젓던 태자는 창 밖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그리핀들에 할 말을 잃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묻기 위해 태자비를 보자, 그녀의 뒤쪽에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고 있는 곰이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나?"
“응-아니야-"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이번에는 처음 보는 여자가 서 있었다. 젊다는 말보다는 어리다는 말이 어울리는, 생기발랄한 표정이 인상적인 아가씨였다.
“그대는 누구지?"
“내 이름은 대도적 이블. 태자비의 의뢰를 받고 저승에서 당신의 목숨을 훔쳐 왔다. 이제 벌떡 일어나서 당장 전쟁을 멈추도록!"
당당한 도적의 요구에 태자는 멍하게 눈을 깜박였다.
* * *
선대 공작, 케인 엘마이어는 확연히 줄어든 수하들을 보며 착잡함을 느꼈다.
치욕의 세월을 겪는 동안 꿋꿋이 옆을 지켜 오던 자들 대부분이 그를 떠났다. 일부는 축고, 일부는 살기 위해 돌아섰다. 이제 그의 곁에 남은 것은 한 줌도 되지 않는 기시들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주군.”
“아니, 너희의 잘못이 아니다.”
프리지어 궁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케인은 수하들을 잃고서야 그 사실을 인정했다. 어떤 방법을 써도 궁 안으로 침입할 수가 없었다.
겨우 살아 돌아온 수하들은 궁에 괴물이 있다고 증언했다. 그 말을 믿지 않고 직접 쳐들어갔던 케인은 간신히 목숨만 건져서 도망쳤다.
제일 비참한 사실은 더 이상 물러설 곳조차 없다는 것이었다.
그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저택은 이미 세스 엘마이어에게 점령당한 뒤였다. 공작 부인이 된 천한 것은 그의 물건을 모조리 끌어내 태워 버리기까지 했다.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는 속이 좀 쓰렸지만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제 곧 갚아 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계속된 패배에 뼈가 시릴 정도였다.
‘이렇게 말라죽는 것인가?'
돌아갈 곳도 없다. 그렇다고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다.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차라리 하얀 탑의 감옥으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주군!“
그때 허겁지겁 달려온 기사 하나가 희소식을 전했다.
“그 마녀가 괴물들을 이끌고 궁을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뭣이? 그것이 사실이냐?!"
뜻밖의 소식에 놀란 케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기사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합니다. 목숨을 걸고 담을 넘어 확인했습니다. 괴물들이 모두 떠났습니다!"
“그럼 이럴 때가 아니구나. 당장······!"
남은 수하들을 모아서 쳐들어갈 생각이었던 케인은 멈칫했다. 무작정 움직였다가는 실패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힘으로 궁을 점령하면 괴물들이 돌아오는 순간 다시 내쫒길 거다.’
순식간에 생각을 정리한 그는 기사에게 명령했다.
“말을 준비해라 나 혼자 프리지어 궁으로 가겠다.”
”······예? 너무 위험합니다! 그 패륜아와 마녀가 주군께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그것도 좋겠지. 이번에는 혈족을 죽인 죄를 벗어나 지 못할 테니."
케인의 얼굴에 비틀린 미소가 떠올랐다. 세스 엘마이어를 파멸시킬 수만 있다면 목숨을 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멍청한 놈은 아니지. 오히려 대놓고 쳐들어가는 쪽이 안전하다.”
아버지로서 자식의 집에 방문하는 것이다. 막을 수도 없고, 막는 쪽이 더 이상하다. 그리고 그를 해칠 수도 없다. 케인이 죽으면 공작이 되기 위해 가족을 모두 죽였다는 사실로부터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을 테니까.
몇 번을 생각해 도완벽한 계획이었다.
“내가 먼저 침입해서 기회를 노리겠다. 너희는 그때까지 잘 숨어 있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기사는 어쩔 수 없이 물러섰다. 지금으로선 케인의 말대로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리고 단신으로 프리지어 궁 앞으로 쳐들어간 케인은 고함을 지르며 소란을 떨었다.
“당장 문을 열어라!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아비를 길바닥으로 내몰고도 편히 살 줄 알았느냐!”
하필 이블린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진상을 마주하게 된 문지기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문을 열어야······.”
“우리끼리 결정할 문제가 아니잖아.”
“그럼 마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버텨야하나?"
웅성거리는 이들 앞에 총관이 나타났다. 밖에서 고래고래 소리치는 케인을 본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명령했다.
"문을 열어라.”
“예?”
"마님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저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문을 열고 안으로 정중하게 모셔라.”
케인 엘마이어는 아주 치사한 방식으로 공격해 왔다. 이블린이 이 자리에 있었어도 결국 문을 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무슨 사연이 있어도 케인은 이블린의 시아버지였으니까. 끝까지 문을 열어 주지 않는다면 이블린은 불명예를 떠안게 될 것이다.
“걱정하지 말고 문을 열어라.”
뒤이어 나타난 시녀장이 거들었다. 그녀는 오히려 여유로운 미소까지 입가에 머금고 있었다.
“아직 마님께서 어떤 분인지 모르니 이곳에 발을 들이겠다고 우길 수 있는 것이다. 너희는 마님께서 지실 것 같으냐?”
한마디로 케인이 제 무덤을 파고 있다는 소리였다. 문지기들은 저도 모르게 납득했다. 그들이 생각해도 이블린이 선대 공작에게 질 것 같지는 않았다.
"심장 마비로 죽지 않으면 다행이지.”
“나이도 있으신데 무리하시는구만.”
그들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케인은 코웃음을 쳤다.
"흥, 어차피 열어 줄 거면서 버팅기기는.”
그는 스스로 불러온 재앙의 구렁텅이에 떨어지는 것도 모른 채 당당하게 프리지어 궁에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