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 * *
나바르 왕국, 태자의 거처인 진주 궁은 지금 피로 물들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침입자들이 칼을 휘두르기 시작한 것이다. 경비병들이 있는 힘껏 맞서 싸웠지만 적의 수가 너무 많았다.
종탑에선 쉴 새 없이 비상종이 울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지원군은 오지 않았다. 결국 경비가 뚫리고 침입자들이 궁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계집들을 모조리 끌어내라! 아이들은 전부 죽여라!"
침입자들은 무자비하게 후원을 짓밟았다. 여자와 아이들의 비명 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진주 궁의 시녀장이자 태자비의 스승인 시린은 질끈 눈을 감았다.
‘왕이 기어이 손을 쓰는구나!'
궁 안에 감금당한 처지지만 밖에 눈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시린은 나바르 왕이 태자가 이미 죽었다고 발표한 것을 알고 있었다.
‘태자가 빨리 죽지 않아 초조해진 모양이군.'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왕가는 비정하고 더러운 곳이었다. 권력을 위해 친아들을 죽이는 일 정도는 예사로 일어났다.
“스, 스승님!"
밖에서 들리는 비명 소리에 겁에 질린 무녀들이 시린을 불렀다. 어느새 태자를 위한 기도도 멈춘 상태였다. 시린은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들을 쳐다봤다.
"왜? 도망치고 싶으냐?"
“······."
"여기서 도망칠 방법은 없다. 짐승처럼 쫓기다 사냥 당하거나, 마지막까지 명예를 지키다 죽는 길뿐이다. 스스로 선택해라.”
그녀는 무녀들이 대답할 기회를 주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성화 앞에 꿇어앉아 기도를 시작했다.
머뭇거리던 무녀들이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울먹이는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체념한 얼굴이었다. 시린은 소매 밑에 감춰진 손을 꽉 움켜쥐었다.
‘미안하구나.’
신에게 일생을 바쳤다고 해도 아직 어린 소녀들이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태자를 지키다 단칼에 죽는 것이 나았다. 도망치다 붙잡히면 치욕 끝에 죽게 될 테니까.
"샅샅이 뒤져라! 어서 태자를 찾아야 한다!"
밖에서 연이어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려왔다. 시린은 죽음을 각오하며 제단 위에 누워 있는 태자를 바라봤다.
"끝까지 지켜 드릴 수 없을 것 같군요. 저승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아쉬움은 없었으나 타국에 있을 태자비에게 미안했다. 태자비가 돌아왔을 때는 모든 것이 끝난 뒤일 것이다.
“여기다! 태자를 죽여라!"
그때, 거칠게 문이 열리며 피 묻은 칼을 든 적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자리에서 일어난 시린이 호통을 쳤다.
“무엄한 것들! 여기가 어디라고 행패냐!"
기세 좋게 쳐들어오던 지들이 주춤했다. 사막은 거칠고 척박한 곳이니만큼 종교의 힘이 강했다. 무녀로 보이는 시린이 앞을 가로막자 아무도 선뜻 칼을 휘두르지 못했다.
"감히 성화가 있는 곳을 범하다니, 너희에게 신의 저주가 있을 것이다!"
시린은 매섭게 그들을 꾸짖었다. 그러자 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앞으로 나샀다.
"흥, 기세 좋은 할망구로군 단칼에 죽여 주마!"
그런데 그가 칼을 휘두르려는 순간, 허공에서 스르륵 뭔가가 나타났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하얀뱀이 었다. 머리위엔 한쌍의 작은 뿔이 몸 전체엔 비늘 대신 벨벳처럼 윤기 있는 하얀 털이 돋아나 있었다.
희미한 하얀 빛을 몸에 휘감은 뱀은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울었다.
-꾸?
“뭐, 뭐야! 이 뱀 새끼는!"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뱀을 보고 놀란 남자가 주춤 물러섰다. 그러자 뱀의 둥근 눈이 가늘어졌다.
-부우!
뱀의 작은 뿔에서 타탁타탁 정전기 같은 것이 일어났다. 그것은 곧 뱀의 몸을 감싼 하얀 빛과 합쳐지며 둥근 번개가 되었다. 적들은 뭔가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무, 무슨…… 으아악!"
파지직 소리와 함께 번개로 변한 뱀이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순식간에 감전당한 남자들은 경련을 일으키며 썩은 짚단처럼 쓰러졌다.
-꾸우~!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뱀이 만족한 듯 그들 위를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무녀들 쪽을 쳐다봤다.
"시, 신수?"
시린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뱀에게서 강력한 신성력이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모시는 신의 힘은 아니었다.
‘다른 신께서 왜 우리를 돕는단 말인가?'
시린이 어찌 할 바를 모르는 사이 꼬물꼬물 날아온 신수는 어린 무녀의 무릎 위에 살짝 내려앉았다. 깜짝 놀란 무녀는 제 무릎 위에서 뒹굴 구르는 뱀을 보고 중얼거렸다.
"귀, 귀여워!"
-꾸?
고개를 갸웃한 뱀이 그녀의 손에 몸을 비렸다. 부드러운 감촉에 감탄한 무녀가 조심스럽게 뱀을 쓰다듬었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수님.”
-꾸!
의기양양해진 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른 무녀들에게 나희는 왜 감사 안 해?'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눈치를 보던 다른 무녀들도 우르르 몰려들어 뱀을 쓰다듬으며 찬양했다.
“정말 멋지세요, 신수님.”
"눈도 아름답고 털도 부드러우세요."
-꾸꾸꾸······.
만족한 뱀이 꾸꾸 웃었다. 시린은 신수답지 않은 뱀을 보고 더욱 혼란에 빠졌다.
그때, 창 밖에서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끼에에엑!
이어서 적들의 것으로 들리는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퍼뜩 정신을 차린 시린이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허공을 획 스쳐 지나가는 거대한 날개를 보았다.
“그, 그리핀?"
“아아악!”
도망치던 침입자 하나가 그리핀의 발에 차여 허공으로 던져졌다. 또 다른 그리핀이 그를 낚아챘을 때는 이미 충격으로 목이 꺾인 뒤였다.
사방이 날개 소리로 요란했다. 수십 마리의 그리핀들이 진주 궁 위를 돌며 침입자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장난감 취급당하는 이들의 얼굴이 공포로 하얗게 질렸다.
"도망쳐!"
"달아나지 마라! 여기서 맞서 싸워야 한다!"
우왕좌왕하는 적들을 난데없이 날아온 물기둥이 후려쳤다. 물을 조종하는 흑룡의 힘이었다.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물줄기가 피로 물든 바닥을 청소하며, 적들의 목숨까지 쓸어 갔다.
”으아아!"
운 좋게 물줄기를 피해 달아난 자들은 입구나 담을 넘어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밖으로 나서려는 순간 쩡하고 몸이 얼어붙었다.
“아아악!”
순식간에 얼음 동상이 되어 버린 동료를 보고 패닉에 빠진 자들이 뒷걸음질 쳤다. 그들은 다시 허겁지겁 궁의 중앙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그곳에는 실적을 올리기 위해 눈이 벌게진 창공기사단이 있었다.
“너희에게 원한은 없지만 좀 죽어 줘라!"
“우리도 살아야지! 한 번만 죽어 줘! 제발!"
“고향으로 가고 싶다악!"
처음엔 그들도 이렇게 적극적이진 않았다. 타국의 다툼에 끼어드는 상황이라 적당히 몸을 사리려고 했다.
하지만 적들이 그야말로 쓸려 나가는 광경을 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잘못하다간 손도 까딱 못 한 채로 모든 일이 끝나 버릴 것 같았다.
“일단 죽여! 죽여 놓고 봐!"
“저 자식 된다! 뛰어!"
그리핀들이 낚아채기 전에, 뱀이 쏴 죽이기 전에, 곰이 얼려 죽이기 전에 하나라도 잡아야 했다. 창공 기사들은 그야말로 미쳐 날뛰었다.
잠시 후, 진주 궁에선 모든 침입자가 제거되었다. 남은 것은 태자와 태자의 편인 생존자들뿐이었다.
사방이 조용해진 것을 느낀 시린은 무녀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거대한 검은 뱀과 함께 이쪽으로 다가오는 분홍색 머리의 여자를 발견했다.
‘저건······ 바실리스크?'
길들여지지 않는 오만한 뱀의 제왕이 여지를 호위하듯 옆에 붙어 있었다. 그것을 본 시린은 상대의 정체를 깨달았다.
‘천공신의 신녀!'
시린은 다시 집중해서 상대를 살폈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여자였다. 하지만 그게 더 이상 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런 분위기 속에서 생글생글 웃으며 걸어 다니지 못할 테니까.
‘아주 기묘한 사람이구나.'
가만히 보고 있자니 오싹 소름이 돋았다. 늑대가 양의 가죽을 쓰고 있다면 이런 느낌이 들까.
-꾸!
신녀를 본 뱀이 무녀의 품에서 빠져나가 꾸물꾸물 날아갔다. 선녀가 뱀을 반기며 손을 내밀었다.
“복실아! 어디 갔었어? 한참 찾았잖아!"
-꾸꾸~!
뱀은 신녀의 뺨에 얼굴을 비비며 반가움을 표했다.
이어서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와 함께 그리핀들이 바닥에 내려앉았다.
-끼루루룩!
-그르르륵!
녀석들은 피 묻은 부리를 딱딱거리며 애교를 떨었다. 신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녀석들의 목을 토닥거리며 칭찬해주었다.
“아이고, 그래. 잘했네. 재미있었어?"
-끼르륵! 그륵!
시린은 식은땀이 주르룩 흐르는 것을 느꼈다. 믿을 수 없게도 이 그리핀들 또한 신수였다. 뱀처럼 강한 힘을 지니고 있진 않았지만 대신 숫자가 많았다.
마지막으로 또 다른 바실리스크와 새하얀 곰의 신수가 나타났을 때는 놀랄 기운조차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강력한 신수들이 한꺼번에…….’
하지만 그들을 거느린 주인은 아무런 힘도 없어 보이는 어린 여자였다.
“아직 안 왔나?"
시린 앞에 도착한 선녀는 뭔가를 찾는 것처럼 두리번거렸다. 잠시 후, 기사처럼 보이는 이들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늦었잖아요!”
“죄, 죄송합니다!"
"빨리 연습한 대로 서요!"
기서들이 허겁지겁 선녀의 뒤에 줄지어 섰다. 만족한 선녀가 한손을 번쩍 들고 소리쳤다.
“나는 대도적 이블! 그리고 내 뒤에 있는 것은 이블 도적단이다!"
“······예?"
“우리는 오늘 태자를 훔치러 왔다!"
시린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멍하게 눈을 깜박였다. 그러자 흠흠 헛기침을 한 선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에겐 인질이 있다! 저항을 포기하고 순순히 협조해라!"
그러자 신녀와 함께 온 바실리스크 옆에서 뭔가가 움직였다. 마치 투명한 천이 벗겨지듯 스르륵 태자비의 모습이 나타났다.
비단으로 양손이 헐겁게 묶인 태자비가 민망한 듯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중얼거렸다.
“저, 저는 인질입니다. 어서 도, 도적단의 말에 따르세요.”
“엣헴, 당장 태자에게 안내하도록!"
누가 봐도 연극인 것이 분명했지만 신녀는 아주 당당하게 도적인 척했다.
"알겠습니다. 대······ 도적님.“
시린은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녀는 몸을 돌려 성화가 있는 방으로 가짜 도적단을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