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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아내로 취업합니다-140화 (140/240)

140화

"왕족이라는 말은 거짓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시기에 접근한 것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수상한 여자 입니다.“

시녀장은 여자를 쫓아내길 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 확인하고 싶어요. 지금 그녀는 어디에 있죠?“

“감시탑에 있을 겁니다. 가서 데려올까요?"

“아뇨, 제가 직접 가서 볼게요."

“굳이 귀하신 걸음을 낭비하실 필요가······.”

"적일지도 모르는 사람을 집 안으로 들이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여긴 세스가 나한테 맡긴 집이니까 소중하게 지켜야 한다. 시녀장의 얼굴에도 언뜻 수긍하는 빛이 스쳤다.

“그것 외에 다른 일은 없나요?"

“창공 기사단이 그리핀을 돌려받기 위해 밖에서 대기중입니다.”

드디어 날고양이들의 주인이 온 모양이다. 안 그래도 밖에서 깟깟대는 녀석들이 신경 쓰였던 나는 반색 했다.

“잘됐네요. 얼른 줘서 보내 버리죠.”

"저, 그것이······.”

시녀장이 난처한 얼굴로 머뭇거렸다. 나는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부인! 제발 도와주십시오!"

"도와주십시오!"

밖으로 나온 나는 한 떼의 거지들과 마주했다.

머리는 어디서 쥐어뜯겼는지 엉망이고, 옷도 다 찢어져서 중요 부분만 겨우 가리고 있는 데다, 진흙 바닥에서 열심히 구르고 온 것 같은 몰골이었다.

이들이 로엔 공국의 자랑인 창공 기사단이라고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아니, 어쩌다가······.”

나는 처참한 그들의 모습에 말을 잇지 못했다. 전에 만났을 때는 그래도 기사다운 모습이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넋나간 부랑자나 다름없었다.

“그리핀이 저희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영락없이 거지 왕초로만 보이는 단장이 울먹거리며 하소연했다.

처음 날고양이들이 여기로 탈주했을 때, 단장은 금사자 기사단의 협조를 받아 녀석들을 붙잡을 수 있었다.

의외로 고분고분하게 붙잡힌 고양이들은 돌아가는 길에 기사들을 강물에 처박았다. 강이 얕아서 살았지,

아니면 그대로 저승을 건널 뻔했단다.

다음 날 그들은 각오를 단단히 하고 고양이들을 제압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철저히 농락당한 다음 구석에 처박히는 엔딩을 맞이했다.

심지어 주인이 자꾸 살아 돌아오는 것이 못마땅했는지 구덩이까지 파서 묻어 버린 모양이다. 생매장을 당할 뻔했다고 우는 단장의 모습이 좀 측은할 정도였다.

“향이냐 약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 그리핀 들은 완전히 야생으로 돌아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는 거죠?"

날고양이들이 야생 고양이가 되었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의아해하는 나를 보고 단장이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저, 그리핀들에게 저희와 함께 돌아가라고 명령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

“이유는 모르지만 녀석들이 부인의 말은 잘 듣는 것 같습니다.”

나는 황당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니, 내가가라고 한다고 가겠어? 어떻게든 알아서 끌고 가야지.

그런 내 시선을 느낀 단장은 당장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다는 것처럼 가냘프게 몸을 떨었다.

“부, 부탁드립니다. 지금 저희는 무척 절박합니다. 지푸라기 하나에도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어휴, 한숨을 내쉰 나는 지붕 위에 앉아서 우리를 홈쳐보고 있는 날고양이들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 어서!"

-꾹구르르?

-끼루루?

고개를 갸웃거리던 고양이들이 하나둘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궁둥이를 씰룩거리는 모습이 지금 상황이 꽤 즐거운 모양이었다. 나는 한 손을 척 들고 외쳤다.

“앉아!“

-꾹!

고양이들이 일제히 바닥에 엉덩이를 착 붙였다.

아니, 이게 진짜 되네? 신기해하던 나는 손을 내리며 명령했다.

"엎드려!"

-끼륵!

이번에도 고양이들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이 녀석들, 사실 고양이가 아니라 개냥이었나? 나는 마지막으로 기사들을 가리키며 명령했다.

“따라가!"

-구?

"따라가라니까?"

-구륵?

고양이들은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리며 못 알아듣는 척하기 시작했다. 자기 좋은 것만 하는 거 보면 역시 고양이가 맞는 것 같다.

머리를 긁적인 나는 멍하게 서 있는 단장을 돌아봤다.

"뭐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나 안 되네요."

“하, 한 번만 더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최선을 다했지만 환자가 가망이 없습니다."

“그럴 수가.”

절망한 단장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말 마지막 희망을 나에게 걸고 있었던 것 같았다.

‘왕의 길을 열어서 단체로 고향으로 보낼 수는 있지만······.’

굳이 남 좋은 일을 해 주고 싶지 않았다. 내가 왕의 길을 열 수 있다는 사실을 공국에 알려 봤자 좋을 것도 없고.

절레절레 고개를 저온 나는 다시 감시탑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그러자 끼룩끼룩 웃는 소리를 낸 날고양이들이 어슬렁거리며 나를 쫓아왔다.

* * *

"처음 뵙겠습니다.“

나바르의 왕족이라 주장하는 이는 남장을 하고 있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안전을 위해 여자라는 것을 숨긴듯했다.

벙벙한 윗옷과 딱 달라붙은 바지를 입은 모습이 길거리에서 흔히 보이는 심부름꾼 소년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깊게 눌러쓴 모자를 벗는 순간, 꿈결처럼 긴 검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나바르의 태자비인 파라라고 합니다.”

윤기 나는 갈색 피부와 극도로 차분해 보이는 눈동자가 묘한 느낌을 주는 여자였다.

뭐지? 꼭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인데? 나는 그녀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태자비요?"

태자비가 왜 여기서 나와?

세스가 전쟁터로 끌려간 것은 나바르의 태자가 쓰러 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태자가 쓰러진 것이 아스트리아의 짓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국경 에서 분쟁이 일어났다.

사실 태자는 아스트리아와 잘 지내자는 쪽이었기에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우기는 것에는 장사가 없었다.

"혹시 신분을 증명할 만한 물건이라거나…….”

"왕실의 상징이자 증명패인 목걸이가 있습니다.”

태자비는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목걸이를 꺼냈다. 나는 일부러 직접 목걸이를 받았다.

살짝 스친 손에서는 나를 속이려는 악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진짜 나바르의 태자비였다.

“제가 여기 온 것은 신녀님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저를 인질로 삼으셔도 좋습니다. 무슨 대가를 요구하셔도 지불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죽어 가는 제 남편을 살려 주십시오.”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은 태자비가 간절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기, 왜 갑자기 저한테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지 모르겠는데요. 제가 신녀도 아니고…….”

“하늘의 사자와 만독의 지배자가 따르는 이가 신녀님 말고 달리 있겠습니까. 저도 한때는 무녀로서 신을 섬기던 몸입니다. 부디 속이지 말아주십시오."

대외적으로 천공신의 신녀는 왕궁에서 수행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태자비가 이곳으로 찾아 왔다는 것은 누군가 나에 대해서 말해 줬다는 소리였다.

"누가 여기로 가라고 알려 줬죠?"

움찔한 태자비가 나를 쳐다봤다. 거짓말을 하거나 얼버무리면 여기서 만남을 끝낼 생각이었는데, 그녀는 선선히 답을 내놓았다.

“제게 신세를 졌던 청탑의 마법사가 알려 줬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해 줄 수 없지만 남편을 살리고 싶다면 왕궁이 아니라 프리지어 궁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청탑?"

청탑에서 어떻게 내가 신녀인 걸 알아낸 거지? 조만간 한번 방문해서 털어 봐야할 것 같았다.

"신녀님에 대한 사실은 절대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불과사막의 신께 맹세합니다.”

절박하기까지 한 맹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안심한 태자비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입에 담았다.

“제 남편은 검은 꽃의 독으로 죽어 가고 있습니다. 유일한 해독제 또한 구할 수가 없어서, 마지막 희망은 바실리스크의 눈물뿐입니다. 무슨 대가를 치른다고 해도 좋습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태자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누가 봐도 남편을 살리기 위해 몸부림치는 가련한 여인이었다.

“마님, 믿지 마십시오. 전부 거짓말입니다.”

하지만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싸늘한 눈으로 태자비를 보고 있었다. 탑의 연락병이 단호하게 말했다.

"태자는 이미 죽었습니다. 전하께서 급하게 출정하신 것도 태자가 사망했다는 소식 때문입니다. 분명 마님께 해독제를 얻어 가서 이것 때문에 태자가 사망했다고 덮어씌울 속셈일 겁니다.”

”······아니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태자비가 부르짖었다. 그녀의 눈이 새카맣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분은 아직 축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렇게 살아 있는데, 그분께서 돌아가실 리가 없어요!"

순간, 나는 태자비를 처음 봤을 때 왜 기시감을 느꼈는지 깨달았다. 절망으로 가득 찬 그녀의 눈동자는 묘하게 세스와 닮아 있었다.

‘이런 사람에게 원한을 사면 안 되는데.'

한번 수가 틀리면 관련된 모든 것을 부숴 버리는 집요한사람이니까.

그리고 나는 절박한 순간 도와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녀의 복수 리스트에 올라가고 싶지 않았다.

“도와줄게요."

툭 던져진 내 말에 멈칫한 태자비가 나를 돌아봤다. 나는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태자님이 살아나면 전쟁도 끝나는 거죠? 그럼 도와줄게요.”

전쟁터에 끌려간 남편도 데려오고, 남의 나라에 누명 씌우는 나쁜 놈들 뒤통수도 때리고. 아주 수지맞는 장사였다.

"······."

멍하게 나를 바라보는 태자비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차마 진짜냐고 묻지도 못하고 입만 달싹이는 그녀 대신 다른 사람들이 난리를 쳤다.

“마님!"

“정말 함정일 수도 있습니다. 나바르에선 이미 태자가 사망했다는 공식적인 발표가 났습니다!"

“사망인지 아닌지는 가서 확인해 보면 되죠."

어려울 게 뭐가 있나. 왕의 길을 열어서 금방 갔다 오면 되는 걸 내 말뜻을 알아챈 사람들이 주춤거렸다.

“그쪽은 제가 가는지도 모르고 있을걸요. 그러니까 후다닥 갔다가 후다닥 빠져나오면 끝이에요.”

“너무 위험합니다. 잘못하면 나바르와 내통한 것으로 몰릴 수도 있습니다!"

“그럼 안 들키면 되지 않을까요?"

그럴 수 있는 수단도 널려 있다. 보면 굳어 버리는 뱀이라든가, 보면 얼어붙는 곰이라든가, 훨훨 날아다니는 고양이라든가.

‘창공 기사단에게도 날 도와주면 고양이들과 함께 돌아갈 기회를 주겠다고 해야겠다.'

누군가가 그랬다. 목격자가 없으면 암살인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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